소설리스트

13. 천상계와 선계의 연합군 (108/111)

 천상계와 선계의 연합군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으로 치장한다 해도 전쟁은 욕망의 대립일 따름,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다. 뺏으려는 자가 있고 지키려는 자가 있어 서로간의 명백한 입장 차를 폭력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행위, 이것이 곧 전쟁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마계가 좀더 우월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침략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을 뿐 만약 사정이 이와 반대였다면 상황 또한 다르게 전개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계의 목적은 영계 지배에 있다.

 루시퍼의 거창한 의지를 빌리자면 영원토록 계속된 신의 속박으로부터 영자들을 해방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면 굳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동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영자들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마계는 자신들과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이단자의 집단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 중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일 만한 게 없다.

 ‘지배받느니 멸망을 택하겠다.’ 의지는 확고했다.

 천상계 33천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과 선계를 대표할 만한 강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싸움터에 나가 패배할 것을 미리부터 염려하는 이들은 없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거꾸러뜨리려는 의지에 보태어 그들의 심장은 ‘우리가 무너지면 영계의 운명은 끝장난다’는 부담감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천상계와 선계의 수뇌부는 진영의 가장 뒤쪽에 포진했다. 그들 주위로는 새롭게 편성된 사령부 소속의 군사들이 엄밀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대천주 제석이 태상노군을 향해 입을 떼었다.

 “저들의 전력이 참으로 강성해 보입니다. 무한계의 주력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연합된 힘이 오히려 초라해 보이다니...... .” 노군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떡인다.

 “그렇긴 하나...... . 우리 또한 만만치는 않죠. 벌써부터 기가 죽을 일은 아닙니다. 본계의 선장들이 마계의 아수라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궁의 그 말 속엔 선계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선장들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신뢰와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제석의 시선이 슬쩍 노군을 향했다가 다시 전면으로 돌려졌다.

 곁에 선 야마천주에게 제석이 하문했다.

 “선봉은 누가 맡고 있나?” 야마천주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선계 팔선 중 지선이 거느린 선장들과 본계의 천왕단 중 제4대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천왕단은 출진 전에 급조된 조직이었다. 그렇긴 해도 천상계의 자존심이라 불려도 좋릉 만큼 그들은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이었다.

 기존의 사대천왕단에 33천의 신장들이 가세한 천왕단은 천상계의 핵심 전력이었다. 더군다나 도리천이 보유하고 있던 보물들까지 그들에게 더해졌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천왕단은 4개대 4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지국천왕대, 중장천왕대, 광목천왕대, 다문천왕대라 칭해졌다. 그중 다문천왕대가 선봉으로 나섰고, 증장과 광목천왕대는 사신단의 전방과 후방을, 지국천왕대는 사령부의 전방을 책임지고 이었다.

 이와는 달리 선계는 팔선이 거느린 선장들과 선인들을 각기 8개 단위 부대로 나눠놓은 상태였다. 전방에 두 개 부대를 종(縱)으로, 나머지 부대들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횡렬 배치해 두고 있었다.

 “마계의 선봉은?” 제석의 잇따른 질문에 야마천주는 황급히 대답했다.

 “대마신 발리의 수하들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대마신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그 수하들이란 말인가?” 노군은 헛웃음을 흘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만 봐도...... 마계가 우리 전력을 얼마나 깔보는지를 알겠군.” 영계연합군의 수뇌는 한동안 밀을 잊고 침묵했다.

 늘어선 신장과 선장들 역시나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객관적인 전력차만으로 승패를 단정 짓는 것은 무리다.

 마계와 영계는 단 한 번도 대규모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었기에 서로 간 전력 우위를 평가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다.

 각기 선봉으로 나선 두 부대간의 전투를 통해 그들은 어느 정도는 전력의 우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한편 발리의 명을 받은 제7대는 기세 등등 해 적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들에게서는 단 한 점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은 굶주려 있는 야수의 것인 양 실기로 번들거렸다.

 멀리서 흔들림 없이 냉정하게 그들을 살피는 눈길들이 있었다.

 다문천대왕 백 명과 선장 50여 명 그리고 5백에 육박하는 선인들이 그 주인공들 이었다. 제일 전면에 우뚝 선 다문천왕과 지선은 천명은 넘을 듯한 아수라와 나찰들을 찬찬히 살폈다.

 다문천왕이 다소 굳어 있는 지선을 향해 여유 넘치는 어조로 제안한다.

 “본 다문천왕대만으로 저들을 상대하겠습니다. 우리측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만 ...... .” 지선은 전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실 요량이면 어서 출병하시는 게...... .” 지선의 이런 태도는 적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두렷하게 포착될 정도로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선과는 달리 다문천왕은 능글맞다 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뒤에 늘어서 있는 백 명의 천왕대원들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설사 마계의 적진 깊숙이 떨어뜨려놓는다 해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고 뒤이어 힘찬 명령이 하달되었다.

 “적들을 하나도 살려 보내지 마라.” “와와와...... .” 맹렬한 천왕대원들의 함성이 하늘을 함몰시킬 듯 힘차게 울려 나온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은 적들을 맞아 전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독수리가 활짝 날개를 편 듯한 진형을 유지한 채 그들은 적과 조우했다.

 그런데 묘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 날개의 바깥쪽을 점하고 있던 대원들이 각기 적진을 지나쳐 좌, 우와 상공, 배후를 차단하는 게 아닌가?

 그들은 마치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훈련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여 나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지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저런 실책을 범하다니...... .’ 적은 수로 많은 수를 포위한다는 게 무모해보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력 탐색의 의미가 크건만 퇴로마저 차단시켜버리면 저항은 치열해지고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할 수 도 있다.’ 지선은 은밀하게 수하들에게 명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다문천왕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곧장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시켜놓고자 함이었다.

 한바탕 요란하게 부딪칠 걸 예상했던 아수라와 나찰들은 잠시 맥이 빠진 듯 방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적들에게 포위되고 나지 아수라와 나찰들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곧 이어 그들의 눈길 속에서는 상대를 비웃는 기색이 살아났다. 포위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런 의미의 비웃음이었다.

 “모두 쓸어버려.” 제7대의 상급 아수라의 명이 하달되자 주춤했던 아수라와 나찰들이 다시금 움직여 갔다. 말이 포위지 천왕대원들 간의 간격은 너무도 넓어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제일 먼저 격돌한 건 공중에서였다.

 천왕대는 바닥에서부터 반구를 씌운 듯한 모양으로 적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수라와 나찰들을 망설임 없이 마력을 쏟아내며 위로 튀어 올랐다.

 쒜에엑 슈슈슈슈 갖가지 형상의 마력은 더해져 당장이라도 천왕대원들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 강력했다. 그 순간 천왕대원들의 손에 전에 없던 기이한 형태의 봉이 하나씩 들려지고 그것은 쭉쭉 늘어나며 서로 맞닿아 합일된다.

 그러고 나자 맞닿은 봉들로 인해 정말로 반구가 완성되었다. 결합한 봉들이 뼈대를 이룬 반구는 은은한 서광을 발하며 주변의 공백을 채워 가고 있었다.

 공격을 해가던 아수라들과 나찰들은 뭔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유 모를 불안간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뻗어내던 힘들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불안감을 떨쳐내기라도 하는 듯 더욱 힘을 돋우어 쏟아냈다. 5백 명이 한번에 일으킨 미증유의 거력은 사방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

 천왕대원들은 자신들이 설치해놓은 반구에서 2장 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신중하게 자세를 취했다. 마치 그들은 마신들이 쏟아놓은 하력이 반구에 닿을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하급마신인 나찰이나 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급마신인 아수라들도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반구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으며,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제7대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는 아수라들은 내심에서 솟구치는 불안감을 괜한 기우일거라 일축했다.

 파스스스 마신들과 마인들의 마력이 반구에 닿는 순간이었다.

 그 힘들은 마치 모래사막에 물이 스며들 듯 자취를 감춘다.

 어안이 벙벙해진 마신들이 채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을 때였다. 안으로 끌어들인 힘은 반구를 형성하는 봉들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서로 부딪히더니 전혀 감소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뱉어졌다.

 “저, 저, 저것...... .” “어어어어...... .” 마신들이 눈을 부라리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들이 떨쳐낸 힘이 다시금 돌아오고 있으니 기함을 할 듯 놀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마, 마, 막아라.” 아수라 하나가 급히 소리치며 재차 힘을 뿜어냈다. 이번엔 자신들의 공격을 되받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콰콰콰쾅” “퍼퍼퍼퍽” 힘의 여파에 휩쓸린 일부의 마신들은 산산조각 나 흩어지는 참변을 면치 못했으며 대다수는 그나마 치명적인 타격만은 간신히 면한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침착함을 잃기는 한가지였다. 그들은 섣불리 위로 솟구칠 수 없었다. 조금 전 허공에 떠 있던 마신들이 주로 참변을 당했다.

 허공에 뜬 채 쌍방향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신들이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기묘한 반응이 또 한 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어, 어, 어...... ."

 나찰은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놀람은 그의 혀를 굳게 만들었다. 좀 전에 있었던 격돌의 여력은 또다시 반구에 흡수되었고 그 힘이 다시 되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때를 맞춰 천왕대원들의 힘까지 반구에 흡수되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마신들은 마력은 퉁겨내면서 천왕대원들의 힘은 그대로 통과 시키고 있었다.

 당황한 마신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퓨슈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힘은 천공에서 떨어지는 불벼락 같았다.

 그것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거짓이리라. 생명의 위기 앞에 그들은 살고자 발버둥 쳤다.

 “으아아아.”  소용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마신들과 마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굳게 다문 그들의 얼굴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콰쾅 퍼퍼퍼퍼퍽 땅이 패 이고 뒤집어진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끊어진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고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아예 가루로 화한 마신들도 있었다.

 첫 선봉대 간의 격돌치고는 결과가 너무도 싱거웠다.

 발리 수하의 제 7대 천에 달하는 마신과 마인들의 전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의외의 결과 앞에 양측 진영은 상번된 분위기로 흘렀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본 발리가 머리꼭지까지 치솟아 오른 분기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놈들을 모조리 도륙 내라.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어서, 어서 나가란 말이다.” 동료들의 어이없는 죽음에 일시 멍해 있던 아수라와 나찰, 마인들은 발리의 고함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 목격했던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은 불길한 예감을 지우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7대를 제외한 나머지 9개 대의 9천에 달하는 병력이 이전과는 달리 전열은 정비한 채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마계와 영계연합군의 전쟁은 이제 전면전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매소 하룬에 주둔해 있는 무한계의 병력과 아돈, 대적자의 연합군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바돈이 공격의 시기를 늦추고 있다는 의외성이 무한계 수뇌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들은 왜 공격하지 않는가?

 진단되지도 예측되지도 않는 풀 수 없는 의문이었기에 기본 전락을 대폭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상대의 의도를 먼저 짚어내야 한다. 무한계는 이런 이유로 초조해져만 갔다.

 로메로는 장탄식을 토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며 그다지 위험스럽지 않음을 몇 차례나 주장하고 좌중을 설득시켜 나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시간의 지연이었다. 이런 그들의 입장에서 아바돈이 공격을 늦춰주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 결코 이쪽에서 먼저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닌 것이다.

 로메로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카포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여태껏 미심쩍게 여겼던 부분을 짚고 나섰다.

 “어차피 겨루어야 할 상대이거늘 우리가 먼저 선공을 취함이 왜 무당하단 말이오? 지금의 분위기대로 이끌려가다 보면 우리 측의 사기 저하는 뻔히 예상되는 일이오.

 그러니 이참에 먼저 선공을 취해 적의 의도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에이어도 고개를 모로 꼬더니 미세하게 끄덕이며 찬동했다.

 “슬쩍 찔러나 보는 의미라면 상당히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죠. 서로의 전력을 우위가 확실치 않은 시점이기에 선공을 한 연후 추가적으로 대책을 수립해 기민하게 병력을 운용하는 게 정석으로 보이는군요.” 대체적으로 전사단주들의 생각은 에이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한계와 전 영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전투를 치러본 집단이다. 싸움이 없었던 때보다 전투 중이었을 때가 더 많았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경험이 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그것만큼 값진 것도 없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전사단주들의 견해는 가볍게 무시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그렇지만 로메로는 요지부동이었다. 무한계 수뇌부들 간에 서열을 구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들 간에 암묵적으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위치와 비중은 엄연히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따져볼 때 로메로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요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가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의중의 계획을 밀고 나간다면 이 중에 반대할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로메로는 강경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성격이 아니다. 할 수 있는 한 침착하게 모두를 설득시켜 나갔다.

 “지금의 경우엔 상황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바돈이 취할 수 있는 움직임의 형태는 단 두 가지입니다. 공격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몸을 일으켜 그들을 칠 이유는 없습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바돈이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염려일 테죠.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이더라도 수세를 취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현재의 우리 진영은 어떤 다양한 공격에도 쉽사리 무너질 수 없는, 취약점을 최소화시켜놓은 상태입니다. 전혀 계획 없이 무리하게 선공을 취하다 역공은 당하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기다려야 할 이유는 현재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 상황은 우리 측으로서는 상당히 유리한 국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개적인 회의석상에서 자기 의견을 거의 피력하지 않던 바소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으면 어떨는지요.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게 시간인지를 말입니다. 로메로님이 그렇게까지 힘주어 주장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전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무엇이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킬 계기가 되는지를 말이죠.

 천상계와 선계, 그들만으로 마계를 막기엔 역불급이죠. 우리가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바돈을 조기에 섬멸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로메로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바돈은 그리 약하니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합니다. 현재의 전력만으로는 아바돈을 물리쳤다손 치더라도 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력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이 선계와 천상계의 전력에 보태져봐야 마계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요. 우리는 최소한의 피해로 지금의 전력을 최대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산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천상계와 선계가 돌파를 당한다면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벵골의 지적이었다. 로메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의 역량이 마계를 어느 정도는 막아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런 전제하에서 우리 전략은 논의될 수 있겠죠. 그도 안 된다면...... 이 싸움은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백기를 드는 수밖에 달리...... .” 로메로의 얼굴에 심려의 기색이 짙어졌다. 그가 걱정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바돈과 무한계가 박빙이라고 봤을 때 마계와 선계, 천상계 연합군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아야 한다. 아니, 무한계가 때맞춰 들어맞은 호기를 기회 삼아 아바돈을 손쉽게 물리쳤을 때까지는 버텨줘야 하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못한다면 이 싸움에 승산을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 벵골의 지적대로 되었을 때 무한계는 전력 유지는 고사하고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로메로는 하룬의 전력을 즉각 메덴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외를 위해 살아남는 길을 택할 것이었다. 

 전사단주들과 칠대부족장들, 메덴의 수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들은 무한계 전력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수뇌부들이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향후 영계 대 전쟁에 미칠 영향은 사뭇 대단하기에 한 순간의 실수나 오판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시간 아바돈의 수뇌들인 세 명의 하기오스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내실 안쪽에 짙은 장막이 쳐져 있고 그 앞에 셋은 둥글게 좌석을 배치하고 앉았다.

 메테우스의 서탑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던 전쟁벽화의 주역들.

 바로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바돈의 우라노스, 프뉴마, 에레츠의 세 사령관인 하기오스들. 무한계의 전력과 대치하고 있는 아바돈을 이끌고 있는 세 주역이 회동한 것이다.

 그들은 벽화의 표현처럼 실제로 필이 네 개씩이었다. 장대한 체구에 험악한 얼굴은 지니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어둠의 표상으로 불릴만한 분위기의 소유자들이었다. 서로를 구분 지을 그 이상의 특별한 특징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여는데 그 음성이 매우 탁하고 거칠었다. 마치 지저에서 울려나오는 둔중한 진동음과도 같았다.

 “마령의 본주시여, 명을 철회해 주소서.” 매우 느릿느릿하지만 분명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그는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상대를 경외하거나 두려워한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장막 뒤에서 부드러우나 확고한 음성이 하기오스의 제안을 묵살했다.

 “시키는 대로 해라. 내 명령에 토를 달지 마라, 하기오스.” 다른 하기오스가 말했다. 음성에는 상당히 불쾌해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당신은 현재 우리의 명령권자가 분명하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해서는 안 되오. 우리는 그대의 종이 아니오. 그대 정도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그대는 진정 모른단 말이오?” 마령의 본주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기오스들은 쉽게 다룰 수 없는 자들임을. 힘으로 제압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무런 득이 없음을.

 그 또한 상당한 모험을 감수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하기오스들이 진정으로 섬기고 있는 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쉬운 놈들은 아냐. 그렇지만 내가 마령의 본주가 분명한 이상...... 너희의 주인은 나를 함부로 홀대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들과 나는 아직까지는 상당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으니 말이다.’ 히기오스가 말했다.

 “아바돈은 물러서지 않소. 아바돈은 패배하지도 않소 아바돈은...... .” “그만.” 마령의 본주는 하기오스의 말을 중도에 잘랐다. 그리고 매우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내가 마령의 본주임을 잊지 마라.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난 그대들의 상관이며 유일한 결정권자이다. 이를 거부하는 건 그대들의 자유의사이겠으나 한 가지는 잊지 말고 명심해라. 그대들의 주인이 어찌 판단할지를 말이야.” 하기오스들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마령의 본주는 물결을 타듯 그들의 심중의 격동을 적절히 이용했다. 

 “전력 운용은 고유한 나의 권한이다. 그대들은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 그만이다. 이유는 묻지 마라.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것이니까.” “난 이해할 수 없소. 무적의 고르곤과 마신들을 앞세운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승리가 분명한데 왜?” “그만두라 했다.” 마령의 본주, 그의 음성이 한차례 크게 휘장을 휘저어 놓았다.

 “내가 일일이 심중의 의도를 그대들에게 털어놓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나? 아바돈은 패하지 않는다고? 한심한 소리...... . 내가 없었다면, 내가 마신을 준비하지 않고 고르곤을 불러오지 않았다면 그대들이 감히 그런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하겠다. 에레츠군을 제외하고 우라노스와 프뉴마의 제4계급 다이모니온 이상급 전원과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 마신들과, 고르곤을 이끌고 그대들은 내가 지시하는 곳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되도록 은밀하게...... . 이왕이면 무한계측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대적자들은 무시해도 좋다. 이유는 그대들이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그 말을 끝으로 마령의 본주에게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는 벌써 이곳을 떠난 후였다. 남은 히기오스들은 심중의 격동을 누르며 이 저린 신음을 흘렸다.

 “뭔가 잘못됐다. 우리의 전쟁은 거룩한 성전.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당당해야 한다.” “그는 오만한 자. 그는 비열하다. 그래서 강하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마지막 하기오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를 무시한 오늘의 처사만은 훗날 반드시 기억하게 만들고야 말겠다.” 그들은 처참한 심경을 이 몇 마디의 말로 달래고 있었다.

 마계의 7로 군은 대체로 엇비슷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을 이끄는 수뇌 즉, 대마신들의 능력차는 있을지언정 아수라와 나찰마인들의 능력에는 별다른 차가 없었다.

 실제로 편성을 살펴보면 마계의 핵심 전력은 7로군이 아닌 중앙군, 즉 마황군이었다. 아수라와 마계전사들로만 구성된 이 군대야말로 마계를 대표할 수 있었다.

 특히 마계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마계전사단의 위력은 마계 수뇌부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나 마계의 진정한 저력은 대마신과 루시퍼, 즉 마계의 지도부였다. 

 발리, 그는 역시 강했다. 선봉대의 전멸을 목격한 그는 두 눈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 했으며 그 온전한 힘을 전혀 감하지 않고 쏟아냈다. 

 앞을 막아선 다문천왕대 백 명의 합쳐진 힘도 그의 전진을 둔화시킬 수 없었다. 지선이 이끄는 5백의 정예는 추풍낙엽처럼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대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모조리 죽인다. 생령이 아니라고 해도 너희 역시 인간! 하찮은 인간의 능력으로 대마신에게 도전한 죄, 죽음으로만 대신할 수 있다. 하하하하하.” 그의 공격은 여태껏 영자들이 상상해 왔던 능력의 한계치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살아남은 다문천왕대와 지선의 예하 선봉부대가 뒤로 급급히 퇴각했다.

 천상계나 선계로서는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 아수라와 나찰들은 그들로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음이 입증됐다. 그러나 대마신인 발리는 거기서 제외시켜야만 했다. 그 하나로 인해 전열이 무너졌고 견고했던 방어벽이 허물어지다니.

 4대천왕 중 하나인 다문천왕이 발리의 앞을 막아섰다. 꿈틀거리는 번개의 형상을 한 기형(奇形)의 창을 움켜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발리의 공격권 안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슬쩍슬쩍 아무렇게나 흔들어대는 것같이 보였던 그 손동작에 막대한 힘이 실려 있음을 감지한 발리는 상대를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쩌쩌쩡 전신이 일시간 마비되는 듯한 쩌릿한 충격에 다문천앙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4대천왕 중 하나인 내가...... 이대로 허무하게 대마신에게 굴복할 수는 없...... 어.’ 그의 마지막 자존심리 격발 되었다.

 “천지에 존재하는 뇌정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 다문천왕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집중하려 애썼다. 그의 주변으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발리가 가소롭다는 듯 냉소했다.

 “그까짓 힘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성싶더냐? 새로운 걸 구경시켜주지.” 발리의 두 손이 붙을 듯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장심을 아래로 해서 빠르게 원을 그렸다. 두 팔을 힘껏 뻗으며 머리 위에서 모았다. 손바닥 사이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흐흐흐흐, 이 정도쯤은 막아낼 수 있겠지?” 조롱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때 다문천왕이 발악하듯 외침을 토했다.

 “가라.” 휘류류륭 창을 중심으로 강력한 돌풍이 몰아쳤다. 그 기운에는 뇌정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발리도 앞쪽을 향해 손을 밀어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한 셀 수도 없이 많은 시뻘건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빠르게 전면을 채워 갔다. 두 가지 전혀 다른 기질의 힘이 만났다.

 잔뜩 일그러진 다문천왕에 비해 발리는 지극히 평온한 얼굴이었고 여유가 넘쳐 보였다. 지켜보던 눈들은 거대한 폭발을 예상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측과는 달리 상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다문천왕이 뻗어낸 힘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했으며 주춤거리더니 급기야 한 공간에서 멈춰서 힘을 잃어 갔다. 핏빛 기포는 다문천왕의 그 가공한 힘을 부드럽게 감싸며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의외의 상황 이었다 발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역시 그랬어. 너희들을 두 발 아래 지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우리들에 비해 너희는 그 동안 전혀 발전이 없었군. 그러니 오늘의 결과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는 거겠지.” 이죽거리는 발리에게 다문천왕은 노화가 가득한 음성을 토해냈다.

 “닥쳐라. 잠시 우위를 점했다고...... 나를 이겼다고 속단하지 마라.” 두 힘의 접점은 점차로 다문천왕에게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예전 무한계의 분트발이란 자나 거신족의 최강자였던 카라반이란 자보다도 못하군. 천상계의 천주, 그것도 4대 천왕 중 하나라는 다문천왕이 말야. 하하하하.” 발리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다문천왕은 그 입을 뭉개버릴 수가 없었다. 더할 수 없는 수치심을 감내해야만 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관찰하던 자들도 뜻밖의 결과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대마신이 약간의 우위를 점하리란 예상은 했지만 지금 전개되는 상황은 너무도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본진의 사령부레서 그런 상태를 지켜보던 대천주 제석이 한탄했다.

 “저 자의 말처럼...... 그동안 우리가 안일했었던가? 마계는 힘을 키우고 있었던데 비해...... 우리는...... . 그랬군. 그랬어.” 참담한 심정 이었다. 물론 다문천왕의 실력이 천상계 최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33천의 천주들 가운데서도 그보다 강한 자들은 여럿 있었으며 월등하게 강한 강지도 존재했다.

 또한 그 자신이 알기에 그 보다 하위 천주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강한 천주가 둘이나 있었다. 발리가 언급한 분트발이나 카라반에 버금가는 강자가.

 둘의 힘겨루기는 점차 치열한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흐합!” 다문천왕이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 전신에서 발광이 일어나며 화신을 한다. 그의 손에는 더 이상 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발리가 입매를 비틀며 괴소를 흘려낸다. 

 “흐흐, 그도 좋지.” 발리의 길고 윤기 도는 검은 머리칼이 발 맡에서 꿈틀거렸다. 발리는 그 자리에서 고요히 선 채 다문천왕이 하는 양을 살폈다.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발리와 다문천왕이 일대일 격전을 벌이는 통에 아수라들과 나찰들의 진격은 잠시 멈춰졌다. 그건 연합군측도 마찬가지였다. 

 마계 총사령관인 헤르파의 곁에는 라아그와 헤렘, 라넷 그리고 대마신 중 하나인 브리트라가 모여 있었다. 브리트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발리를 선봉에 세운 것은 아무래도 실수인 듯한데...... . 어떻게 생각하나?” 헤르파에게 한 질문이었다.

 브리트라는 발리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여겼다. 자신의 승부에만 관심이 있었지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하는 데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더군다나 사령관의 명령에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일을 벌이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르파는 씽긋 웃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죠. 적들은 다문천왕의 참패를 보고 나서 사기가 많이 저하될 것입니다. 전체 전력에서뿐만 아니라 수뇌부들간의 대결에서도 현격한 격차를 느낀다면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죠.” “쉽게 항복할 것이라 여긴단 말인가?” “그렇진 않겠지. 아마도 끈질기게 저항할 겁니다. 허나, 결국엔 굴복할 수밖에 없을 테죠.” “과연...... 그럴까? 인간들은 말야, 생령이든 영자들이든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스런 구석이 있거든. 그러고 보니 우리들 역시 예전에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군, 후후후후.” 헤르파는 대답을 피하고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발리와 다문천왕의 싸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영언으로 대마신 찬드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찬드라의 위치는 발리의 군대 바로 뒤였다.

 “곧 진격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발리님과 다문천왕과의 승부 결과에 상관없이...... 공격 을 속개시켜 주시길.“ “알았네.” 브라트라가 물었다.

 “합류한 귀계의 전력을 이용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텐데.” “곧 투입할 생각입니다.” 브라트라는 헤르파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한 가지만 묻지. 일거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건 저들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 헤르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만을 흘렸을 뿐이었다.

 “그럴 만큼 적이 강하지 않다고 판단해서입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8할의 전력은 보유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시험해 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상대와 우리 쪽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자네 역시 아바돈이나 제왕의 군대를 염두에 두고 있나보군.” “확신은 아닙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영계의 모든 전력들을 적으로 일단 규정지어 놓고 그런 판단을 기초로 해서 마계의 전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전력에 여유가 넘친다는 말이기도 했다.

 빌리와 다문천왕의 대결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지세히 들여다보면 힘차게 몰아붙이는 건 다문천왕 혼자일 뿐 발리는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상당히 소극적인 수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간혹 다문천왕을 조롱하는 말을 흘리며 즐기고 있었다.

 “하하, 이거 영 실망인데. 천상계 천주들의 진면목이 이 정도라는 사실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 다문천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말이지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고 그의 손짓 발짓에 따라 그 기운들은 발리의 주변을 에워쌌다.

 몇 번이나 위치를 바꿔 가며 발리의 허점을 파악해보려 애썼지만 결국은 허사였다.

 ‘놈은 정말이지...... 거대한 철벽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견고한 철벽. 내가...... 이처럼 무기력하다니.’ 그는 지쳐 가고 있었다. 적을 극복할 수 없다는 자신감 상실은 급격하게 그의 힘을 약화시켰다. 싸움에 임한 투사로서 가장 치명적인 상태이기도 했다.

 이때 4대천왕의 세 명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이십니까?” 4대천왕의 둘째인 증장이 지국에게 의견을 물었다.

 지국은 난처했다. 다문이 발리의 상대가 아님은 확실해졌다. 그렇다고 자신들 중 하나가 개입하기엔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깔아뭉개 차라리 도움을 주지 않고 지켜보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문이 먼저 도움을 청해 오기 전까진...... . 지켜볼 수밖에 없네.” 이때 광목이 제안했다.

 “그렇다고 도울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제가 천왕대를 이끌고 발리의 군대를 치겠습니다. 그러면 선계 쪽에서도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발리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 틈에 기회를 엿보아 다문과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면...... .” 그럴 듯한 의견이었다. 지국은 흔쾌히 승낙했다.

 “즉시 시행하라.” 그들 역시 사령부의 허락을 얻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건 발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증장천왕대가 발리의 후면에 도사리고 있는 마계군을 공격했다.

 너무나도 급작스런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비교적 가까이 있던 지선과 정선(靜仙)도 엉겹결에 격전 중에 합류했다. 혼전이었다. 그런 중에도 발리는 다문과 상대하는 것만을 고집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헤르파는 즉각적으로 찬드라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또다시 전면전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발리는 꿋꿋이 다문과의 싸움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새로운 전선, 하룬으로!

 선발대에 합류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했던 너울은 요즘 상당히 심각한 휴유증을 앓고 있었다.

 쓸쓸히 파천의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당시의 심정은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함을 경험케 했다. 그는 그때처럼 스스로의 나약함이 부끄러워본 적이 없었다.

 선발대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대원들은 지금 하룬에 돌아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모여 있었다. 이런 조치는 아난다의 주선으로 이뤄진 수뇌부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서였다. 너울은 마계와 대치하고 있을 선계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각시를 비롯한 선계에서 차출된 선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천상계 출신들도 동일했다.

 그들은 여전히 선발대원이기를 고집하고 있었으며 그 심정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 심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할 일이 없군.” 너울은 그렇게 말했다. 숙소를 정해주니 하릴없이 밀려와 구겨지듯 웅크리게 되었다. 하룬의 긴박한 전경과는 어딘가 동떨어진 모습들을 하고 여기저기 뭉쳐서 시큰둥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물론 선발대원들 모두가 그런 처지인 건 아니다. 초기 대원들 중에서도 아난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레나도 상당히 비중 있게 대접 받고 있었고, 앙샹뜨는 전사들 간에 흔하게 있는 사소한 감정다툼 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수련자의 자격을 박탈당했던 도나투스나 무한계 영자들에게 경원의 대상이었던 브라함과 페드로도 상당한 위치를 은연중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카이로나 페리칸, 불칸과 몰간이야 워낙에 이름난 자들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선계와 천상계에서 처음부터 소집되었던 초기 선발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선계와 천상계로 돌아가도 실제로 주력으로 편성되지도 못할 처지이기도 했다. 너울의 말을 각시가 받았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우리처럼 태평인 것도 다 복이지.” 그러자 마고가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별 생각 없이 말을 툭 뱉어놓는다.

 “복은 무슨. 무능력의 소치지.” 무력함. 그랬다. 선발대원들 중 어느 쪽에서도 반길 이 없는 비중 없는 인물들!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절망감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힘이 없기에 싸우고자 하는 열정조차 무시당해야 하는 현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비관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없기에 그들은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울이 말했다.

 “우리는 그래도 선발대잖아.” 찬다마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파천이 돌아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거지.” 마고가 그들의 대화에 참견하고 나섰다.

 “뭘? 어떻게?” “글쎄......그건...... 구체적인 방법은 나도 모르겠지만.” 제명된 도나투스가 껄껄 웃으며 그들의 작은 변화를 반겼다.

 “방법이야 찾아보면 많지. 당장 밖에 나가보면 할 일은 지천일 거야. 너희들은 좀더 일찍부터 이랬어야 했다.” 권터가 맞장구를 쳤다.

 “아암, 그렇고 말고. 사실 이 하룬에서 너희들만큼 유명한 작자들도 몇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선발대잖아. 선발대가 몸소 나서서 전사들을 독려하고 일각의 힘이나마 보태는 모습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감동을 줄 거다.”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황당한 기대였다.

 “정말 그럴까요?” 순진한 각시의 반응에 도나투스가 헛기침을 흘렸다.

 권터의 그 말은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너무도 감상적인 기대였다.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무심코 던졌던 말이 이젠 도나투스로서도 수습이 안 될 정도였다.

 권터의 말에 용기를 얻은 선발대원들이 숙소를 벗어났다. 그들은 정말이지 어떤 일이든 마다 않고 작은 힘이라도 보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낄 공간은 그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롬멜 전사단의 조장 하나가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 너울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공식적인 통보 사항이 없는 한 제 임의대로 여러분을 소속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네.” 너울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전사들 중 하나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무심코 한마디를 쏘아붙인다.

 “선발대원들 아냐? 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야?” “할 일도 없고 하니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셨나 보지.” “팔자들 늘어졌지 뭐야. 산부에서는 왜 저런 자들을 귀빈 대접을 하나 모르겠단 말야.” 자기네들끼리 작게 소곤거린 말이었지만 선발대원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괜히 걱정이 앞서 따라나섰던 도나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마치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양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죽어 있던 선발대원들이다. 몇몇 역량 있는 선발대원들이야 하룬에서도 중요 위치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지 않던가? 오히려 천덕꾸러기의 신세나 다름없다는 게 정확했다.

 그걸 자각하고 있던 대원들은 그 소리를 듣고 나자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하룬을 뛰쳐나가고 싶은 맘만 간절했다.

 “그만...... 가자.” 이레네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지나던 전사들이 무심코 뱉어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처연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암흑과 빛은 완전하게 분리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대개는 그렇다. 빛의 영역에 암흑은 다가서지 않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법.

 그러나 지금 파천이 다가선 곳은 그와 같은 일반적인 상리를 완전히 벋어나고 있었으니. 기껏해야 빛이 다가서지 못하는 사각에만 제 영역을 확보해야만 할 암흑이 당당하게 빛과 공존하고 있었다.

 빛과 암흑의 공존! 기묘한 현상은 파천을 난감하게 했다.

 수직으로 뻗은 거대한 탑은 뾰족한 첨단 부분을 중심으로 네 개의 두드러진 기둥을 사방에 둘렀다. 각기 하나씩의 기둥에는 청, 홍, 백, 자색의 큰 구슬이 박혀 있었고 그 밑으로 용의 모습을 표현해 놓은 듯한 기둥에서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주변을 압도할 만한 웅장함의 무게가 느껴졌다.

 파천은 그 앞에 서서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탑의 주위 사방에는 빛과 어둠이 물결치며 서로를 희롱한다. 파천은 기묘한 전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첨탑에는 파천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생물이 조각되어 있었다.

 “독수리의 날개에 머리는 뱀의 형상, 몸통은 사자, 꼬리는 전갈의 것인 듯하다. 이 탑은 대체 뭐지?” 파천의 중얼거림에 수호자가 답했다.

 “배반의 탑.” “배반의 탑?”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탑의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언뜻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자들이 거쳐 가야 하는 중간계의 관문 중 하나다. 너와는 관련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흠...... 그런가? 하긴...... 나는 완전자가 되고자 함이 아니니...... . 그런데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지?” “이 탑은 신의 속성 중 파괴와 징벌을 상징하는 것. 무슨 이유에서인지 완전자 중 일부가 이곳에서 모든 걸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 빈번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들은 이곳에서 한참 동안을 목 놓아 울었고 미친 듯이 광소를 흘리다 오던 길로 돌아갔다.” “...... .” 그들은 신의 다스림에서 제외된 비밀차원으로 자원해서 흘러 들어갔고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 이후부터 천사들은 이곳을 가리켜 배반의 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배반의 탑이라...... . 물론 신에 대한 배반을 이름이겠지? 참 기이한 일이군. 완전자의 반열에까지 이른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신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비밀차원으로 자진해서 들어가야만 했을까?” 파천은 지극한 호기심에 두 눈을 빛냈다.

 수호자는 담담한 음성으로 파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환기시키려 했다.

 “가자. 이곳은 너와 인연이 닿아 있지 않은 곳.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파천은 그곳을 떠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파천의 시야에서 첨탑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첨탑의 기이한 생물이 번쩍 눈을 떴다. 새파란 광망을 흘리며 고개를 슬쩍 돌리는데 그 방향이 사라진 곳이었다.

 그 생물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시커먼 암흑의 기류가 뭉클뭉클 솟아나고 그사이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때가 왔다. 새롭게 계약을 맺을 시기가 도래했다. 이번에도 과연 신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모든 건 인간들에게 달려 있다. 그들이 신을 의심하는 한 악마의 무리들은 손쉽게 혼돈의 주인이 될 수가 있지. 그 편이 내게는 좋은 것을, 흐흐흐흐흐..... .”

 반가운 손님이 무한계 진영에 합류했다. 그는 귀계의 칠성 중 하나인 대덕이었다. 인세에서 천마의 부인이었던 적루아.

 그녀가 칠성대덕의 신위를 회복하고 무한계로 합류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대동 않은 채 혼자 하룬으로 왔다. 귀계가 공공연히 마계의 편을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고 둘이 한통속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녀가 하룬에 등장함으로 무한계는 귀계라는 껄끄러운 적의 대두를 현실로 받아들여만 했다.

 대덕은 무한계 수뇌들과 잠시 회동을 가진 뒤 곧바로 선발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귀계의 귀령들은 육체가 없다. 허나 칠성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반 귀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현격한 차이의 영력과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마계의 마력이나 영자들의 프리즈마 유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강자들로 공인되어 있었다.

 적루아는 선발대원들이 있는 곳에 이르자 얼굴을 활짝 폈다. 아난다와 카이로와 페리칸,

 소군을 다시 만난 반가움 이상의 희열의 빛이 그녀에게서 뻗어 나왔다. 숭고한 빛.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신비한 기운이 모두를 기이한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대덕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녀는 누구의 안내도 없이 이곳을 스스로 찾아왔다. 마침 카이로등도 함께 있던 자리였던지라 그들 간에 반가운 해후의 시간이 흘렀다.

 대덕은 말했다.

 “이곳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이레네가 피식 웃으며 자조적인 음색을 흘렸다.

 “빛이라...... .” ‘절망의 빛이겠지.’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너무도 환한 빛. 그래요 이것은 희망의 빛이에요. 여러분들이 계심으로 인해 영계는 무사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레네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이었는데 대덕은 대답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 놀람 또한 그 혼자만의 것이었다. 

 아난다는 대덕을 자리로 이끌며 구계의 동정을 물었다.

 “그들의 선택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돌이키길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들은 이미 수렁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죠. 그리고 그 길이 더 달콤할 것이라 말하더군요. 어쩔 수 없죠.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죠.” 칠성 중 가장 불가해한 존재가 대덕이라 했다. 그녀는 반대의 입장에 서서 적이 되겠노라 선언하고서도 무사히 빠져나왔으며,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루시퍼를 만나 전쟁 상황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 모두의 생각이었다. 칠성대덕은 모든 것에 초연해 보였다.

 그녀는 칠성 중 가장 탁월한 예지력을 지니고 있다. 그건 다른 차원계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런 이유로 단 한마디도 허투루 들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파천에 대해서도 예언을 한 바가 있었다.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했으며 그가 장차 큰 세 가지를 잃고 큰 세 가지를 얻는다고 했었다.

 ‘사부님은 지금껏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장차 또 잃을 것이 있으며 얻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소군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대덕이 또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은 강성하여 선계와 천상계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지요. 그렇지만 그들 역시나 저력은 무시 못 하죠. 가장 원만한 결과가 생겨날 겁니다.” 아난다가 다급하게 질문했다.

 “원만한 결과란 게 뭐죠?” “로메로님도 그렇게 질문하더군요.” 대덕은 빙긋 웃었다.

 “순리대로 되는 것이죠.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도 완전히 극복하기 전에는 그 안의 순리에 따라야 하는 법. 뿌린 자가 거두겠죠. 당장에 위험은 커 보이나 마계가 하룬과 메덴을 동시에 정복하지 못 하고서는 원하는 결과를 쉽사리 얻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암류는 그들 자체 내에서도 여러 갈래이니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 같기도 하네요.” 쉽사리 단정 지어 풀어내지는 않는다. 대덕은 묘한 미소를 흘리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아난다는 뭔가 알 듯도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파천에 관해서 물었다.

 “파천님은 광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앞날을 내다보는 건 생명수와 그 위의 광류(光流)를 보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광명은 광류로서도 알 수 없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 어찌 제 짧은 능력으로 함부로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 “......?”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그분은 본래의 자신을 찾게 될 것 같네요.” 대덕은 애매한 짐작으로 마무리했다.

 그녀는 현재의 마계와 천상계, 선계연합군 간의 전쟁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천상계는 처음에 뜻밖의 우위를 점함으로 기세가 올랐지만 근본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뒤로 밀리고 있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천상계나 선계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전력을 운용하기에 단시일 내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면적인 격돌을 피하고 국지전의 형태로 유도해 나가고 있으며 전력의 손실이 우려되면 후퇴시켜 배후의 새로운 전력으로 대체 하는 식으로 버텨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면서도 놀라운 것은 마계에서도 전체 전력의 3할 이상을 투입하지 않고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처럼 대응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연합군측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패색이 더 짙어지기 전에 요단을 내리라 봅니다. 그것만이 지금의 전력이나마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아난다가 물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 같습니까?” “영계는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한계가 전장이 되었으니 이곳 사정에 밝은 무한계 진영으로 합류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대덕은 천상계와 선계가 결국엔 하룬으로 합류하게 될 것이라 단정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아난다는 그 후의 상황을 짚어보았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선계와 천상계가 무한계 진영을 합류하는 게 득인지 손해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내심으로 고개를 젓는 아난다.

 ‘좋지 않다. 전력을 하나로 집결하는 건 겉으로 보기엔 현명한 처사 같지만 사실 외부의 적들도 단일한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명확해진다. 더군다나 현재처럼 적이 하나 이상일 때는 협공의 우려도 있다.

 모르겠군.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이 진정 좋은 건지를.’ “그들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손실은 큽니다.”

 대덕의 말과 전황은 너무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마계의 7로군 중 2개 군단과 중앙군에서 아수라들로만 구성된 2천의 정예만을 차출해서 전선에 투입 했는데도 상황은 급히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8선이 이끄는 선계의 전력과 천상계의 마신단 전원이 전선에 모조리 들러붙어 간신히 막고 있는 상황이었고 수세인 접전 지역을 천왕대에서 지원을 해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점차 무한계의 중부권 쪽으로 밀리고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상 개전이 되고 나서 대규모 접전 양상으로 치닫다보니 형세는 애초의 예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실상 마계로서도 이 정도로 우위를 보이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으니 천상계나 선계가 받은 심정 충격은 꽤나 큰 것이었다.

 연합군은 전선의 접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마계의 2로군단의 수만 물경 2만을 헤아린다. 결국 전면과 측면 그럴 때마다 제석과 노군은 뒤로 조금씩 후퇴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제석이나 노군도 이제는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진두지휘하느라 열을 내고 있었다. 수적인 열세가 이 정도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지는 누구도 짐작 못한 일이었다.

 마계 7로군의 병력 7만에 중아군인 마황군의 병력 3만, 거기다 귀계의 1만에 달하는 구령들. 10만을 상회하는 정예 병력을 천상계와 선계의 8천이 좀 넘는 인원으로 막아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단지 그들이 기대한 건 개개인의 월등한 실력 우위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의외로 간격이 크지 않아 그다지 기대할 게 못 되었다. 게다가 큰 기대를 걸었던 천상계의 천주들도 대마신에 견줄 정도는 아니란 점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마계는 아직 7로군 중 5개 군단과 중앙군인 마황군도 투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정도의 전력 차이를 보이는 상태에서 전략이나 전술이라는 건 무용지물이었다.

 선계8선 중 하나인 태선이 노군에 있는 사령부로 와 급히 전황을 보고했다  “이대로는......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분명 노군은 그런 표정이었다.

 “달리 묘책이라도 있소?” 모두는 허둥대고 있었다. 대책을 수립해 돌파구를 제시해야 할 지도부나 전선에 투입돼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신장이나 선장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8선 중 넷과 33명의 천주 중 17명아 전선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들로 인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티고 있다는 게 정확한 말 이었다 마계와 연합군을 합해 현재 형성되어 있는 전선에만 2만 5천이 득실대고 있었다.

 “...... .” 묘책을 묻는다. 태선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저들이 열중에 둘을 투입했는데도 이 지경이거늘...... . 달리 방법이 있을 수가 없겠지."

 나머지 여덟마저 투입된다면 살아남을 자 얼마나 되겠는가?

 노군의 옆에 섰던 충선이 제안했다.

 “대마신 발리와 찬드라를 직접 노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나마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본진과 적들 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벌려 놓습니다.” “그런 연후엔?” “후퇴 명령을 내려야겠죠.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과부적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껏 농락당하다가 전멸을 면키 힘듭니다. 그런 예측이 확실하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로 후퇴한단 말이오? 저들이 우리를 놔줄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 가서 숨겠소? 끝까지 사우는 수밖에 없소.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마지막 하나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갈 곳은 ...... 바로 하룬입니다.” “하룬이라면?” “으음.” “설마?” 주변에서 충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이들이 저마다 당혹감을 표시했다. 

 “그렇습니다. 무한계의 주력이 있는 바로 그 하룬입이다. 그들과 힘을 합해야합니다. 

 다행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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