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탑에서 그를 만나다
파천의 선언은 간단명료했다.
‘내 의지가 되었다.’ 복잡하고 난해하여 특별한 이해력을 요하지도 않았고 시종(始終)이 길어 쉽게 해석되지 않을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메타트론은 재차 확인했다.
“무슨......의미냐?” 파천에게서 답 대신 한 자락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지금 당황하고 있다는 걸 메타트론은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해서 당면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을 단 한 번도 염두에 둬본 적이 없었다.
백 번, 천 번 양보한다 해도 생령인 파천이 광명을 얻는 일 따위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확신에 차 있었다. 이처럼 처참하게 배신당할 줄은, 얼토당토않게 예견이 빗나갈 줄은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광명이 의지가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이냐?” 파천의 조금 전 선언은 메타트론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류의 언어였다.
메타트론의 귓가에는 아직도 거대한 타종 소리가 둔중한 여음으로 맴돌고 있었다. 멍해진 정신은 그를 조급하게 몰아붙였고 그럴수록 언성이 높아 갔다. 이와는 반대로 파천은 얄밉도록 침착하다.
“진정하라, 메타트론. 그대의 야욕은 그대 안에서 소멸시키고 정리하라. 더 이상의 진행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파천의 다소 엉뚱한 대답에 메타트론은 입매를 비틀었다.
순간 메타트론의 뇌리에 그의 기대를 반영한 듯 보이는 한 가지 생각이 똬리를 튼다. 작금의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은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광명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조금 전 우리 모두가 보았던 현상이나 지금 파천의 저 숨 막힐 듯 압박해 오는 신위는?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 이번엔 수호자 차례였다.
“광명은 어디 있지?” 고개를 젓는 파천의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희비가 엇갈린다.
기대에 찬 메타트론에 비해 수호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다.
“광명은 특정한 사물이 아니다. 광명은 현상도 아니다. 광명은 바른 생각이요, 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바르고 바르니 삿됨이 침범치 못하고 밝고 밝으니 큰 빛이라 한다. 광명은 우주와 하나 됨을 선언하는......바로 나 자신이다.” 메타트론도 천사도 수호자도 일시 할 말을 잃었다. 파천은 그들의 그런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멀리 시선을 두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광명은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다. 광명은 그대들과 나를 존재케 하는 근본자리이다. 광명을 어디서 찾는가? 광명은 애초부터 내 안에 있었고 이제 나는 그 사실을 확인했다.” 메타트론의 입 안에서 맴돌다 끝내 사라진 한마디는 이랬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파천이 광명을 얻었다면 앞으로 전개될 상황은 좀더 복잡해진다.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대비함이 마땅했다.
‘광명을 획득한 파천의 등장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에게 직접 영계를 침범할 구실을 준다. 천적의 등장은 침략이 아닌 생존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모든 계획은 전면수정 돼야한다.’ 확인해야 했다. 파천이 진실로 광명을 얻었는지, 얻었다면 그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두어야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지을 수 있다. 메타트론은 좀더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진정 얻었는가? 얻었다면 보여라. 은근슬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영계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음이니......신중하게 처신하라.” 수호자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렇다, 파천. 네가 광명을 얻은 것이 사실이라면 장차 우리는 가장 껄끄러운 적을 상대해야 한다. 내부의 갈등은 이후의 일이다. 또한 그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네가 얻은 광명이야말로 그들을 상대할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리라. 광명은 신의 권위를 대신한다. 언제부터 그래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실체를 규명할 수 없음에도 그렇게 믿어 왔던 데에는 신의 절대성을 모두가 은연중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신을 대면한 자 광명을 얻는다. 광명을 얻어야 완전자가 된다. 광명이 나타나면 신의 현신이 뒤따른다. 이러한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은 누구도 의심해서는 안 되는 확고부동한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수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광명의 실체에 대해서 확언할 수 있는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했다. 파천의 시선은 부정과 긍정의 뚜렷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두 메타트론에게 고정되었다.
“자, 보아라. 그대들이 보길 원하는 게 이런 건가!” 파천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곧바로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파천과 나타나엘, 메타트론과 수호자의 주변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을 품은 공간이 일시 더 높은 곳으로 이끌렸다. 마치 순식간에 이탈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이 빛은?’ 수호자를 비롯한 세 명은 난데없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주변을 가득 채워버린 빛의 정체에 대해 지극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파천의 전신을 감싼 것은 금빛 물결이요, 그 주변을 에워 싼 빛은 그것보다는 더욱 다양한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저절로 황홀해져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아름답다. 수호자는 전신을 채워 가는 항거할 수 없는 거력에 당황했다.
메타트론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힘도 그를 이처럼 난감하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무한히 쏟아져 들어오는 힘은 전신을 청량하게 할지언정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메타트론은 기분이 나빴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의 성질이 존재한다는 자체를 인정하기 싫었다.
“이것이 광명인가?” 수호자와 메타트론은 파천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나 원령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고 그 원리로써 힘을 사용한다. 지금 파천이 일으킨 빛의 성질은 그들이 알고 있는 원령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건 원령이 아니다.” 단호한 부정은 메타트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질문에 메타트론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달리 다른 주장을 펴기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원령은 물질이 아니다. 단일한 성질로 규정되지 않는 좀더 고차원적인 영적 유기체다. 원령은 동일한 성질에 반응한다. 내 의지에 반응하는 원령과 그대에게 반응하는 원령은 같지 않다.
지금껏 사람 중에 많은 완전자가 나왔고, 그들은 모두 원령체를 완성했었다. 그들이 완성한 원령체는 본질에서는 동일했지만 형상화되는 과정에서는 제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반응하는 원령 역시 그와 같이 다양했다.
원령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원령이 내 의지에 동의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해 범주를 벗어남도 자연스런 것이지.” 파천의 설명은 원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수호자와 나타나엘이 고개를 끄덕여 납득하는 것과 달리 메타트론은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했다.
메타트론이 동의하든 말든 파천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메타트론과 수호자. 그대들 둘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메타트론 그대가 사용하는 마력 역시 원령의 다른 형태. 수호자의 힘의 근원 역시 원령이다.
둘은 하나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이처럼 다른 성질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그대들은 같지만 또한 다르다. 의지의 방향성이 다르기에 동의하는 원령 역시 다를 밖에” 길어지려는 설명을 더 듣고 있기엔 메타트론의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는다.
“너는 지금 원령이 광명이란......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사실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황당해하는 메타트론의 얼굴엔 약간의 분노도 깃들어 있었다. 농락당한 심정이었다.
“네 말대로 하자면 원령체는 모두가......광명을 얻은 것인가? 또한 광명을 얻었나? 신의 권위와 무한한 능력의 상징인 광명을 나 또한 얻었다는 말이냐?” “아니, 원령체와 광명은 다르다.” 이번엔 수호자가 참견하고 나섰다.
“좀더 명료한 설명이 필요하다.” “광명은 회복된 인간의 본래적인 성정이다. 사랑. 그래, 사랑이다.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는 사랑. 사랑을 회복하는 순간 그 존재의 의식은 우주와 하나가 된다. 그대들의 원령이 불완전한 것은 그대들의 의지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령의 완전한 동의를 이끌어내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광명을 얻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원령은 더 이상 내 의지에 저항하지 않는다. 우주에 가득 찬 원령이 무한하듯이 내 의지에 반응하는 원령 역시 제한이 없다. 그대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광명의 실체는 사랑이다.
원령의 본래적인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것, 그것이 광명을 사용하는 법이지. 그 힘은 바로 이와 같다.“ 파천은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수호자를 비롯한 세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퉁겨져 올랐다. 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핑그르르 돌거나 뒤집히는가 하면 사지가 제멋대로 뒤틀리기도 했다.
전신을 터트려 버릴 듯한 압력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대항할 방법도 없었다. 그럼에도 시도일지언정 메타트론은 정체불명의 힘에 저항했다.
“이런 힘 따위로......” 메타트론의 전신을 감싸고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는가 싶었다. 그 사이로 붉은 광채가 폭발했다.
불붙은 듯싶었다. 메타트론의 주변은 온통 새빨간 화염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그는 여전히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한없이 높은 곳을 향해 떠밀려가고 있었으니. 수호자와 나타나엘이 원래의 자리로 얌전히 돌아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파천은 그 자리에 없었다. 수호자도 나타나엘도 파천의 움직임을 간파해내지 못했다. 메타트론의 분노에 찬 시선을 들여다보고 있던 파천이 작게 속삭였다.
“포기하라 그대의 의도는 불순하다. 인간들을 속박하고자 한다면......날 넘어서야 한다.” “아직 속단하지 마라. 나는 강하다. 신을 제외하고 날 이길 존재는 우주에 단 하나도 없다. 너 또한 예외가 아니다.” 메타트론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나란히 날고 있던 파천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파천의 움직임이 멎었다. 메타트론 또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 속에 의도를 숨겼던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엔 분명한차이가 있었다. 파천은 메타트론이 한없이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달랐다.
‘광명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그런 파천을 넘어서려면......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이처럼 긴장해본 적이 있었던가를 되짚어보았다. 단연코 없었다. 천궁의 천사들과 일전을 결할 때도 여유가 넘쳤던 메타트론.
그의 자부심은 남다른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광명을 얻은 너라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짧은 순간의 갈등은 파고를 높이며 메타트론을 엄습해 왔다. 지혜로운 그는 순식간에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신중하게 내심을 털어놓았다.
“파천, 진정 내 앞길을 막을 참이냐?” “더 이상 네 의지로 인간들을 속박하지 않겠다면,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나는 너와 대립할 이유가 없다.” “내가 인간들을 속박했던가? 그들의 선택이었다.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길 열망하는 자들에게 그 빛을 선사한 것이 잘못이란 말이더냐?” “그 판단은 네 몫이다. 너만은 알고 있다. 완전자가 될 기회마저 거부한 나다. 그 누구도 인간에게 주어진 기회를 박탈시킬 수 없다. 그 어떤 존재도 신의 선물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세계에 남기로 결심한 이유는 오직 그것 때문이다. 많은 것이 어긋났다. 몇몇 존재들의 이기적인 판단이 전체를 오도시키려 하고 있다. 그것만은 막을 것이다. 내 힘이 미치지 못해 끝내 이루지 못하고 소멸된다 해도 나는 결코......타협하지 않는다.” “좋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군.” 메타트론은 파천과의 피할 수 없는 승부를 직감했다. 부담스런 존재와의 대결.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그에게 매우 낯선 감정이었다. 메타트론은 눈길을 들어 멀리 허공을 주시했다.
“길고도 긴 기다림이었다. 신은 끝내......날 인정하지 않는구나. 너라는 존재를 통해......인간의 삶을, 그들의 존재 가치를 되짚어 보았지. 그럼에도......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너희들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 너희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비약을 단숨에 이룰 수 있는지.” 파천의 잔잔한 눈길을 다시 찾은 메타트론의 시선엔 숨길 수 없는 애잔함이 묻어났다. 흘러나오는 음성은 고르지 못했다.
“신에게 묻고 싶다. 왜 인간들 만이어야 하는지. 우리의 존재 의미가 너희들...... 하찮은 인간들에게 기대어 있어야 함을 참을 수 없다. 신의 각별한 주시와 배려가 없었다면 결코, 결단코 이런 황당한 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증명해 보이겠다. 버려진 존재가 선택된 존재보다도 우월할 수 있음을.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신은 그 무엇도 의도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는다. 네 아픔은 네 스스로 지운 짐이다. 벗어버림도 네 선택이지. 하지만 넌 그러길 원치 않는다. 그 짐을 신이 손수 벗겨주길 바라고 있지.
너는 너 하나만으로 부족해 다른 이들까지 네 길로 이끌었다. 신을 압박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것 또한 너만의 착각이다. 너는 결국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기엔 다른 이들이 희생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난......널 막아야만 한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너 이전에 정리되어야 할 자들이 있다. 그들의 행보를 저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때까지도 뜻을 꺾지 않는다면 결국엔 너와 나는 맞서게 될 것이다.” 수호자가 가까이 왔다. 나타나엘은 여전히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수호자가 말했다.
“파천, 너 혼자서 그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광명이 그들의 천적이라 하나 역시 한계가 있는 법. 힘을 합해야 한다. 메타트론과 너와 나 그리고 사람들까지.” 파천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로 위험하고 막강한지를. 사실 그보다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파천이 물었다.
“도와줄 수 있는가?” 결국엔 맞서야 할 입장이다. 파천은 지금 적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수호자의 시선도 메타트론에게로 향했다.
메타트론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뜻 마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호자가 재촉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너와 나의 대립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힘을 합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럴 때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었던 자들. 네 증오의 시발점이었다. 메타트론, 네 힘이 절실하다.” “너희들에게 갔던 자가 나였음을, 내가 모든 일의 발단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파천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종결된 이후로 모든 걸 미뤄두어야 할지 망설였다. 지금 그 사실을 밝힘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었다. 파천은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메타트론은 파천과 수호자를 번갈아보더니 힘없이 등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너희가 설사 원치 않는다 해도 그들과 맞서는 건 당연하다. 너희를 돕는 것이 아니라......내 적을 무찌르는 일임을......잊지 마라. 떠나겠다. 나는 내 방식대로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 메타트론이 떠났다. 수호자는 한참이나 그 상태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메타트론이 남겨 두고 간 감정의 여운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네 상실감을 이해하지만......동의할 수는 없구나.’ 나타나엘도 떠나고 수호자와 파천만이 남았다. 이곳으로 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둘의 분위기가 다르다. 광명을 찾기 위해 중간계로 들어섰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시선에 잡히는 모습들은 동일하건만 둘의 심정은 달라졌다. 특히 수호자가 그랬다.
예전에 알고 있던 익숙함은 이제 다른 표현으로 불려지길 바라고 있다. 파천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다. 적어도 수호자는 파천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네 삶은 날 새롭게 이해하는 도전이었다. 무척 낯선 감정을 다스려 익숙하게 만들기까지의 그 과정은 사람을, 신을 새롭게 해석하는 기회였지. 하지만 그 모든 게 내 안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나는 단지 네 삶의 여정을 엿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너와 멀기만 하구나.’ 수호자의 이런 심정은 지금 파천과 함께 동행함이 마땅한가를 생각해보게 했다. 이때 파천이 조금은 엉뚱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너의 개입이 과연......인간들에게도 최선이었을까?”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일까? 파천의 의식의 흐름을 수호자는 간파해 보려 애썼다. 그런 물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 표면화될 수 있었을까가 궁금했다.
“지금 날......질책하는 건가?” “너와 메타트론의 대립이 인간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들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결과물들이 모두 너희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야.” “어쩔 수 없었다. 나 또한 달리 방법이 없었어. 돌이켜 생각해봐도 당시엔 그것만이 최선이었어.” “그래, 그랬겠지.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겠지.” 그럼에도 파천은 아쉬움을 덜어내지 못했다. 막 배반의 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파천이 첨탑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의 눈은 투명하고 맑았다. 눈 깊숙한 곳에서 출렁이는 금빛의 흔들림이 신비하기만 했다.
첨탑의 기이한 생물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넌 내 길을 예비하며 수많은 안배들을 했었다. 처음부터 내가 광명을 얻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나?” 수호자는 그다지 망설이지도 않고 쉽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확신이 있었을 리가 없지. 모험이었고 시험이었어. 네가 내 앞에 다시 섰을 때조차도 나 역시 메타트론과 다름없이 믿을 수 없었으니.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물만 덩그러니 던져진 듯한......그래, 그건 신의 선물과도 같이 여겨졌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너와 같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해도 그 판단은 여전할 것 같다.” 솔직한 답변이었다.
“사람들은 메타트론을 경계하고 널 의지한다. 지금껏 그래 왔기 때문이지. 그들은 영계의 운명이 너희 둘로 인해 엇갈릴 거라 믿고 있다. 날 향한 그들의 관심은 사실은 널 향한 신뢰와 의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일곱별을 내 앞에서 곧잘 언급하곤 했다.” “영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결정된 건 그 무엇도 없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일 뿐. 희망을 줘야만 했다. 암시였지. 내가 던져 놓은 암시는 그들의 의지와 작용해 거짓말처럼 기적을 만들어 내곤 했으니까.
메타트론은 직선적이다. 그는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해 왔다. 그의 능력은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내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었다. 확실히 인간들에겐 다른 영적존재들과는 달리 개발되지 않은 잠재력이란 게 있어. 그걸 흔들어 자극하고 일깨우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다.” “어긋남이 너무도 크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내가 그들에게 다가섬이 더 큰 무력감과 상실감을 주지나 않을지......” “나도 너와 같았다. 그런 우려를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지. 지금 내가 이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있듯이.” 파천의 잔잔하던 눈길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그의 눈매에 강한 의지가 떠오르고 눈빛이 폭발하듯 강렬해졌다. 첨탑에 새겨진 생물을 쏘아보던 파천이 수호자에게 물었다.
“이 탑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혹시 알고 있나?” 수호자는 생각해보았다. 그 또한 정확한 시기를 짚어내기 난감했다. 중간계에 발을 들이는 게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처음 본 것은 아마도......제왕의 다스림으로부터 사람들이 독립하고 나서였던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것 같군. 이후라는 건 분명해.” “그 이후에 예정된 완전자가 이곳에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로군.” “흐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 이후로 완전자가 드물게 나왔으니까.” “이상한 일이야. 내 기억에도 이걸 세운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말 야.” 원래의 자신을 찾은 파천은 영계의 역사에 대해서 수호자보다도 더 세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배반의 탑이란 것조차 생소한 명칭이었으니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 하는 건 당연했다.
파천의 눈빛이 더 강렬해졌다. 그의 전신을 두른 금빛 물결이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탑을 감싸 갔다. 파천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저런 행동을 취하는지가 수호자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 때 파천이 외쳤다.
“모습을 보여라.” 첨탑 가까이까지 떠오른 파천이 생물의 감겨져 있는 두 눈을 뚫어 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일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파천으로부터 비롯된 신비한 기운은 첨탑을 엄밀하게 감싸며 압박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흐.” 파천이 뒤로 훌쩍 물러서는 것을 목격한 수호자도 급히 신형을 띄워 올렸다. 감겨져 있던 생물의 두 눈이 활짝 열리며 불붙은 듯 붉은 광채를 번쩍였다.
“놀라운 일이군. 결국엔 광명을 얻었다는 말인가?” 듣기 괴로울 정도로 괴악스런 음성이었다. 수호자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여러 번 이 앞을 거쳐 갔지만 단 한 번도 특별한 기운을 감지해내지 못했었다.
“너는 누구냐?” 수호자의 외침에 괴생물은 입을 쩌억 벌리며 웃는다.
“컬컬컬컬......” 연신 시커먼 괴연이 뭉클뭉클 솟아나오며 주변을 천천히 채워 갔다. 파천의 신색은 좀 전과 달리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야 어찌된 일인지를 알겠군. 그런 괴이한 모습을 한다 해서 날 속일 수는 없다. 왜 네 영역을 벗어났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수호자와는 달리 파천은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챈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상대는 놀라워했다.
“날 알고 있더냐?”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중 하나인 코모라! 틀렸나?” “으음, 어떻게 날 알고 있지?” “조금 전 네가 했던 말처럼 내가 광명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그런 것쯤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더냐?” “그런가? 광명이 그처럼 대단하단 말이지? 흐흐흐......” “다시 묻지. 넌 왜 이곳으로 왔냐?” “대답해야 하나?”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호! 날 협박하는 것이냐?” “코모라, 권좌에서 밀려났더냐? 동류들에게서 버림받았나?” “닥쳐라. 날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너희 중에 있을 성싶더냐?” “흠, 맞나보군. 네게서 악한 기운이 넘쳐난다.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구나. 그래서 동류들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거고, 누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전부를 얻으려 했었군.” “틀렸다. 내 스스로 떠난 거다. 다시 내 손 안으로 들어올 날이 멀지 않았다.” “어쨌든 초라하군. 비밀차원의 절대권좌 중 하나를 누리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는 것 같은데......이런 꼴이라니. 권좌는 영원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보군.” 코모라는 첨탑에서 스스로를 분리시켰다. 그는 독수리의 날개에 뱀의 머리, 사자의 몸통과 전갈의 꼬리를 한 기형의 괴 생물을 벗어 버리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새까만 기류로 감싸고 있는 근육질의 사내는 무척이나 강해 보였다. 파천이 다시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 “이름이 파천이라 했나?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와 닮은 자로군. 무척이나 닮았어. 확실히 의외야. 네가 광명을 얻은 것도, 내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도.
비밀차원의 내부사정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는 이가 신을 제외하고 또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사람 가운데 말이다. 확실히 놀라운 일이야.” “다시 묻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냐?”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난 사람 가운데서 나온다는 완전자들을 기다려 왔다. 그들과 힘을 겨루고 지혜를 겨루고 그들의 의지를 내게 귀속시켜 노예로 삼았다. 완전을 이룩하지 못한 그들 쯤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밀차원으로 보내 너 대신 싸우고 찢기고 죽어갈 자들로 선택했더냐?” “흐음, 설마하니 생각까지 읽어내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네 지혜는 참으로 놀랍구나. 거기까지 짐작하다니.” 수호자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 황당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비밀차원에서 이곳을 제지 없이 드나들다니...... 천궁의 천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신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대체......왜 이런 일을 용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저들의 능력이 이제는 신을 능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코모라. 너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어리석기 짝이 없다. 너는 지독히도 이기적이어서 네 그릇된 방종이 너만 아니라 동류들까지 망치게 한다.
사악함이 지나쳐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았건만 끝끝내는 악마를 네 마음에 불러들여 이런 짓을 벌이다니. 네가 원하는 건 혼돈이겠지. 다시금 네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네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야 하고 그를 통해 재협상을 끌어내야 할 테니.
네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서 동류들마저 배신하고 타락의 길을 자초하다니. 너는 악하다. 악한 행위는 쾌락을 좇으나 고통을 주지만, 선한 행위는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을 선사하는 법.
네 모습을 돌아보라. 네 어려움이 목전에 닥쳐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고 네 힘에 굴복했던 자들도 더 이상은 널 위로해주지 않는다.
네가 파탄을 선택했으니 널 향한 내 의지도 탓하지 못하리라.” 코모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파천의 신형에서 찬란한 금빛 물결이 흘러나오며 코모라가 쏟아낸 검은 기류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파천은 싸늘한 표정으로 판결을 선고하는 판관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용서받기엔 그동안 네가 저질러온 죄가 너무도 크다.” “너, 너는 바로!” 코모라는 두려움에 젖어 채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는 파천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처음엔 불신으로 내심 고개를 저었지만 더 큰 확신이 그 자리를 채우는 순간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두려움이 그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찌 네가?” 이 순간 코모라를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한가지였다.
‘도망가야 한다. 짐작이 맞다면 난......소멸을 면치 못한다.’ “신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리라. 다시 기회가 온다면 선하고 어진 사람이 되기를.”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이 활짝 펼쳐진다.
스스스스스스 화아아악 화려한 금빛 폭발은 배반의 탑 주변을 순식간에 채워버렸다.
수호자의 입술을 비집고 부지불식간에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제야 광명의 진정한 실체를 본 듯한 심정이었다.
‘저 정도라니.......’ 메타트론과 겨룰 때 파천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게 된 수호자.
그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빈 공간을 응시하며 탄식을 발했다.
‘저 힘을 감당할 존재가 있을까?’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파천의 한 손은 여전히 허공중에 머물고 있었다.
파천은 전면을 응시하다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만다.
“놓쳐버렸군. 역시나 위험을 예감하는 데는 나보다 한 수 위야.” “도망갔다는 말이냐?” “......” 파천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기에 수호자는 사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그것은 순식간에 공포의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자 역시나 대단하군. 그 짧은 사이에 기척도 없이 몸을 빼내다니.” 그리고 더듬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이 비밀차원에 얼마나 더 있는가. 궁금했다.
‘저런 자들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천궁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영계의 힘만으로 가능할지 의문스럽구나.’ 미지의 적은 미지의 능력으로 인해 강하고 두렵다. 단 한 번도 부딪쳐 보지 않은 적들이라 더 가늠하지 쉽지 않다.
메타트론으로 하여금 수호자와의 일치를 갈망하게 만든 근원적인 걸림돌이 바로 그들이었다. 파천의 존재는 수호자의 근심을 잠시나마 덜어주게 할 정도로 든든하게 여겨졌다.
‘결국엔 부딪쳐야 하겠지. 코모라가 저런 극단을 선택했다면 비밀차원에도 혼란이 왔다는 의미. 팽팽했던 균형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설득만으로 안 된다면 나를 내어 주리라. 그것으로도 뜻을 꺾지 않는다면...... 내가 줄 것은 안식뿐이다. 영원한 안식.’
하룬의 분위기는 고조됨과 침체됨이 적당히 뒤섞인 긴장의 연속이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군상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혼재된 질서 속에서 표현해내기란 벅차다.
인간계의 생령들과 구분하여 스스로를 영자라 자칭했던 자들은 어느 정도의 오만을 의식 속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생존을 꿈꾸는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명분보다도 절실한, 살기 위한 욕구로 모여든 자들은 한쪽의 시선으로는 마주 대하고 있는 마계와 제왕의 무리들을 담아냈고 또 하나는 명확하지 않은 희망에 두었다.
그들의 바람이 직시하는 대상이 수호자일수도, 천궁일수도, 광명을 찾으러 간 파천일 수도 있었다. 어느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질식할 듯한 이 긴장감과 그로 인한 떨쳐내기 힘든 공포감에서 해방시켜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심정은 아래 위의 구분이 없었다. 무리를 이끌어야 하는 수뇌나 그 지도력을 신뢰하고 용감무쌍하게 떨쳐 일어나야 할 자들이나 매한가지였다. 그것은 묘하게도 전체를 은연중에 지배해버리고만 마력적인 예감이기도 했다. 마지막! 너나 할 것 없이 종말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이 찾아낼 수 있는 최초의 장면에서부터 훑어 내려온다 해도 영계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절박한 위기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들은 있었다. 지혜 전사단을 필두로 막중한 지위를 위임받은 자들은 그 부담감을 떨쳐 내고서라도 앞장서서 분위기를 선도해 가야 했다.
설사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를 낚아챈다 해도 남은 것이 있을까 의심이 될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누가 뭐래도 열심이었다.
“더 이상은 진척이 없다는 건데......” 라미레스는 이 정도 선에서 종결짓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 단주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 동안 지혜전사단이 한 일은 하룬 내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을 색출해내고 그 분위기를 기화로 하룬 연합군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뒤가 구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효과를 톡톡히 본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정도는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한 가지 찜찜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루딘 족 전 족장이자 아바돈의 수괴인 케플러와 그의 하수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특히 하룬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케플러의 수족 카발라를 색출해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근심거리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다. 더 큰 싸움에 대비해야 한다.” 감시의 눈길이 뜸해지면 한 번쯤은 접촉을 시도해 오리란 판단으로 라미레스는 홀딘과 지혜전사 몇을 비행매소에 파견했다. 미스바와 현자의 신변을 보호함과 동시에 감시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었다.
라미레스는 은밀하게 비행매소의 현자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현자 역시 미스바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뒤였던지라 라미레스가 찾아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던지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맞아들였다.
“그대는......진정 의외로군.” “그렇겠지.” “설마하니 자네가 아바돈과 연관이 있으리라고는......생각지도 못했군.” “이제 알았으니 어찌할 것인가?” “으음.” “날 믿지 말게. 참고로 말해두지만 한 번이라도 마령의 영향에 놓였던 자들이라면...... 절대로 믿어서는 안 돼. 나 또한 마찬가지.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어.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가? 그래서 내가 어쨌으면 좋겠는가?” “평소의 자네답게 처신하게. 자네라면......내가 알고 있는 라미레스라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철혈의 사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하게. 아바돈과 연관이 있는 자를 대할 때는 용서를 베풀어서는 안 되네. 발본색원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어느새 더 깊이 더 많은 영역에 뿌리내려 종내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게지.” “자네 말은 그럼 모두, 모두 소멸시켜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최선이야. 또한 그들을 위한 자비이기도 하고.” “자신이 없군. 자네처럼 맑은 눈빛의 소유자를 처단하는 일이란. 이겨낼 수는 없는가?” “후후, 날 너무 과신하는군. 내 의지는 박약해. 자 보게, 이 초라한 꼴을. 이렇게 되기까지 거부할 몇 번의 기회쯤 없었겠는가.
지닌 욕심을 털어내면 남는 두려움도 없어지지. 알겠나? 어떤 변명을 늘어놔도 그들과 자의로 연계된 자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자격 없는 자들뿐이야.” “좀더......시간을 가져야겠어. 아직은......자네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게. 그대가 스스로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나 또한 그리할 테니......” 라미레스는 현자와의 대회를 다시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젖어들어 있었다.
홀딘을 제외한 부단주들은 한참 한 가지 사안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었다. 라미레스는 생각했다.
‘마령의 본주, 그놈을 처결하는 게 우선되어야 하거늘.’ 어디로 숨어들었는지조차 지금은 알 길이 없다.
아난다가 화천주의 지적에 답한다.
“그렇다고 자진해서 찾아온 자들을 내몰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럼 이대로 방치해두자는 겁니까?” “달리 묘수가 없는 걸요.” “안 됩니다. 그들의 유입은 위험 수위에 육박해 있어요. 하룬은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후방외곽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지금 둘이 하는 얘기는 얼마 전부터 하룬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영자들에 관해서였다.
화천주의 지적처럼 그들의 수는 너무도 많고 또한 무질서했다. 힘을 보태려는 의지를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연합군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들은 되려 이런 상황이 반갑지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무질서함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현재 하룬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을 강제로라도 내몰아야 합니다.” 지금껏 잠자코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부우버가 참견하고 나섰다.
“몰아낸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양해를 구해야지요. 하긴 지금 마계군이나 제왕의 군대가 진격해 들어온다면 예기치 않았던 대량 살상이 발생하겠지요. 그런 희생은 무의미합니다. 지금 하룬 내 외곽을 가릴 것 없이 영자들로 북적거리니 연합군을 원활하게 통제하는 것도 방해받을 지경인 건 사실입니다.” 호천주도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속히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들 모두를 연합군 내로 받아들여 편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들을 최대한 하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후방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설득해서도 안 되면 강제로라도.......” 라미레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사령부에서도 그런 결정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는 분위기다.
이상은 때때로 현실에서 차가운 냉대를 받기 일쑤다. 영자들의 참전 의지가 아무리 순수하고 숭고하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오히려 연합군의 움직임에 방해요소가 된다는 지적이 대다수다. 라미레스는 그 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하룬의 모습은 얼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진정 이곳이 군진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음이 컸다.
‘이제 저들로 인해 적이 침투하기에 더 용이해져 버렸다. 적의 수뇌부들이 들어왔다 나가도 움직임을 구분해내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나?’ 라미레스는 영자들이 처음 하룬에 발을 디뎠을 때, 그 무리가 늘어날 때,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확고한 결전 의지. 생명을 버리고자 하는, 그래서라도 힘을 보태겠다는 저들을 진정 우리들 손으로 내몰아야 한단 말인가?’ 착잡했다. 라미레스는 하룬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망루로 발길을 옮겼다. 군중은 더 늘어나 있었다. 그 물결의 유입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참으로 많지요?” 칠성대덕,아니 적루아였다. 라미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담아냈다.
적루아는 라미레스와 나란히 선 채 꿈틀거리는 영자들의 물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을 쫓아낼 생각인가요?” “다른 방도라도 있소?” 둘은 인간세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도 둘을 관계 짓는 중요한 감정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천아가 마계 진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과거만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셈이었다. 적루아가 물었다.
“천아를...... 만나봤다고 했죠?” “그렇......소.” “어떻게 변했던가요?”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소. 그 아이는......예전에 우리가 알던 천아가 아니오.” “아뇨. 여전히 천아예요. 당신은 천아를 포기했는지 모르지만......전 그럴 수 없어요.” “천아는 루시퍼를 제 아비로 인정하고 있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먼 길을 가버렸소. 나도 당신도 그 아이가 치러야 할 대가를 상쇄시켜줄 수가 없단 말이오.” “......” “천아와 환아 그리고 화아까지. 그 아이들을 예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오.” “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천아는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아요. 그 아이도 나름대로 이겨내고 있는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다시 돌아올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과연 그렇지.” “파천이 와야 해요. 그에게 모든 열쇠가 쥐어져 있어요. 그의 결단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거예요.” “파천. 그래, 파천이 와야 해. 그가 광명을 지니고 와야만 이 어려운 시기를 넘어설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을 찾았어요.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어요. 문제는......” “문제?” “네,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요?” “그의 성정이 이제 과거와 같지 않다는 거죠. 그것이 어떤 변수가 될지 저는 그것이 걱정되는군요.” “흐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두고 보면 알아요. 그를 만나보면 모든 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라미레스는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렸다.
메타트론이 물었다, 하룬을 칠 것이냐
중간계를 벗어났다. 대지와 하늘과 천지 사이를 떠도는 먼지조각 하나까지도 파천에게는 새롭게 다가온다.
넓은 가슴을 활짝 내밀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그 소중함이 더 큰 가치가 있는 이유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사라짐은 내 하나의 만족. 여기 두고 온 물음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하나 부딪히며 내 영혼에 새롭게 각인시켜 나가리라.’ “드디어 이 자리에 다시 섰구나.” 수호자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그 동안 기울여 왔던 각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 결실은 다름 아닌 파천. 광명을 얻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수호자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셈이었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메타트론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광명을 얻은 파천의 행보를 뒤에서 조력하는 것.’ 수호자가 물었다.
“어디부터냐?” 파천의 움직임에 대해 수호자가 예상하는 범위는 두 가지였다.
옛용을 만나는 것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을 저지시키는 것. 그 두 가지 중에 하난 우선 될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먼저 하룬으로 간다.” ‘그랬던가?’ 수호자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 모르겠다고 고백한 것은 메타트론만의 심정은 아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전을 놓아버린 이유가, 그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확장되는지를 수호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파천의 관심은 하룬에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가 출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파천의 심장 안에서 재확인되고 있음이니.
파천은 손을 들어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아그립바를 쓰다듣는다.
“크하하하, 기다린 보람이 있었음이야. 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기적이로세, 기적이야.” 파천과 수호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달려갔다.
까마득한 점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그건 이내 한 사란의 건장한 사내를 형상화한다.
망토를 펄럭이며 나타난 이는 거만한 표정에 살기까지 두르고 온 상여락 이었다. 지독한 살심은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증오의 대상은 보나마나 파천일 게 분명하다.
파천은 상여락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한 발 뒤에 처져 있던 수호자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상여락이로군.” “그렇지. 바로 맞혔어. 너로 인해 좌절을 맛봐야 했던 바로 그 상여락 이야. 뜻밖이냐? 네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아 왔음이 진정 뜻밖이더냐?” “복수란 말인가? 그렇군. 자네에겐 내가 복수의 대상이었군. 얼마 살지 않은 생에서도 이런 인과는 생기는 거였어. 두려운 일이야. 자네는 자네의 삶이 그토록 무가치했던가?” “무슨 헛소리냐?” “지난 생에 매달려 현생마저 낭비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일이야.” “내 힘이 모자라 네게 패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도 있었는데 너로 인해, 그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좌절해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다. 이제야말로 널 넘어서서 내가 너보다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해 보이겠다. 널 넘어서지 않고서는 내 존재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의 생각은 누구의 권유도 가르침도 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삐뚤어져 있었다.
상여락이 종말을 고했을 때 상천일이 보았던 눈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뉘우침의 의미가 아니라, 헛된 욕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좌절된 분노의 표현이었던가?
상여락은 그 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마지막 찌꺼기까지 토해 내려는 듯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영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데서 처단하고 싶은 게 솔직한 바람이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토록 이나 대단하게들 생각하는 광명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보여주고 싶지만 흐흐흐, 제 하나의 좌절이면 족하다.
이후 난 내 힘만으로 영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절대의 성지를 내 힘만으로 건설할 것이다.” “상여락” “말해 봐라. 마지막 유언쯤으로 들어주지.” 수호자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저렇게 앞뒤 상황 구분 못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수 있는 거지?’ 파천은 말했다.
“진실에 대하여 눈을 돌릴 수는 있어도 네 마음만은 속일 수가 없다. 네 의지가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부끄럽지 않았나? 네 욕망이 떳떳했던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네 복수의 의지가 어디서 기인하여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하하하, 고리타분한 소리로군. 너 그것 알고 있느냐?” “......?” “너 많이 변했다. 그래 변하긴 무척이나 많이 변했어. 그런데 말야, 아주 지저분하게 변했어. 예전엔 그래도 솔직하기라도 했지. 지금은 영 아니군. 우리 좀더 솔직해지자고. 너나 나나 추구하고 있는 욕망은 똑같아. 단지 그걸 획득해 가는 과정이 달라 보일 뿐이다.
난 내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선,악? 그딴 건 개에게나 줘라. 아참, 여긴 개가 없지? 크크크.” 상여락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키득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두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발악하듯 외쳤다.
“날 봐라. 난 힘을 추구한다. 난 지배하길 원하지 지배받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의지로 하나씩 만들어 간다. 그래서 신도 날 벌할 수 없다. 난 고아와 같다. 내 위에 버티고 선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 신선한 자유였어.
이제 나는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 내 힘이 월등해지면, 내 능력이 앞선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크고, 멋지지 않은가! 인간계가 지금 존재하나? 그 세계를 신이 지켜주었나?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리는 약육강식이야.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차지하고 누리며 존귀해진단 말이다.
그래서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내 시작을 알리는 거룩한 의식으로서 네 소멸ㅇ르 택한 것뿐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나무는 그늘 또한 한쪽으로만 드리운다. 이 나무는 곧 잘리고 새로운 나무가 심어지겠지. 항상 네가 옳다고 믿는 반대편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 아래 결박시켜 놓은 것도 너 자신. 네 의지의 선택이었으니 원망함은 옳지 않다.
그렇지만......기회는 아직까지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마음을 돌이켜라.” “흠, 무척이나 자비롭군. 아니면 내가 두렵나? 꼬리를 내리다니 실망이야. 이기는 자가 정의다. 이번에도 네가 이긴다면 네 말이 옳다고 인정하마. 흐흐 어떠냐? 이제야 좀 싸울 맘이 생기시나?” 이때 수호자가 개입했다.
“저자는 마령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저자의 눈을 통해 마령의 본주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셈이지. 파천, 네가 하기 힘들다면 내 손에 맡겨라. 저런 자는 한시라도 빨리 소멸시켜주는 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파천은 가만있었다. 그의 동공은 상여락의 눈 속을 지나 다른 존재와 대면하고 있었다. 파천이 말했다.
“너를 처단함이 내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확신에 서지 않은 자가 다른 이를 이끌 수 있겠는가. 먼저 널 돌아보고, 네 가는 길이 어디에 서 있나를 판단하라. 네 죄가 남의 발도 더럽히고 있음이니 그 악의적인 인도함이 네게 화가 될 것이다.” 상여락이 아닌 마령의 본주를 향한 파천의 경고였다. 이때 상여락의 얼굴에 첫 변화가 보였다. 얼굴 주위를 가득 메운 화염의 그림자는 마령의 기운이 골수에까지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두 손이 정면 앞에 우뚝 멈추더니 무엇인가를 꽉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상여락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파천, 광명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너는 그것으로 메타트론과 비밀차원을 상대하겠지. 그때까지 네 생명을 유보시켜주마. 내 앞길을 평탄케 하니 내 어떤 수족보다도 훌륭한 조력자가 아니겠는가?
광명을 보여라. 그 위력을 보여라. 네가 지닌 광명이라면 상여락쯤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안심하지는 마라. 그는 내 능력의 일부일 뿐이니.” 상여락의 움켜쥔 두 손 사이에서 희미한 형체가 빛을 발한다.
“투명검!” 수호자가 먼저 놀라 부르짖었다. 파천의 얼굴에도 의외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상여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주, 끼어들지 마라. 네가 내게 힘을 줬다지만 그 영향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나의 일이다. 광명마저 내 것으로 만들어 너마저 무릎을 꿇게 해주겠다.” 상여락은 마령의 본주에게 완전하게 제압되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파천, 자, 시작하자. 어서 광명을 내보이거라.” 파천은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저들의 생각을, 이 상황을 역이용한다면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파천은 수호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전했다. 수호자는 감탄했다.
파천이 한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번쩍 “그, 그것이 광명인가?” “으음.” 상여락에게서 두 사람의 음성이 동시에 토해졌다.
파천의 손끝을 따라 거대한 빛의 기둥이 허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거의 십장이나 됨직한 크기의 금빛 기둥은 완전한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상여락의 고개가 십 장 높이에 위치한 검극을 쳐다보다 다시 파천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대단......하군.” 파천이 만들어낸 검은 연신 밝은 빛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보기만 해도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위압스런 전경이었다.
상여락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는 돼야 내 투명검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아쉽군. 영계 역사상 이런 대결이 있었던가? 보는 자들이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상여락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광명이라도 투명검만은 어쩔 수 없으리란 확신!
그건 신앙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동기이기도 했으며 지금껏 지탱시켜 온 근원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흔들린다. 파천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광명의 위용 때문만이 아니라 파천의 변함없이 고요한 태도 그리고 곧이어 몰려들기 시작한 형체 없는 압력, 그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두 발을 넓게 벌렸다.
‘한 번에 끝난다. 지든 이기든 단 한 번의 부딪침이면 족하다.’ 상여락은 어금니를 갈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힘주어 물었다. 두 손에도 자연 힘이 들어갔다.
“후우, 준비는 됐겠지?” 파천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질문이기도 했다. 수호자의 어깨에 옮겨 앉은 아르립바의 표정에도 근심 따위는 없었다. 수호자는 말할 나위 없었다. 파천은 대답대신 빙긋 웃었다. 언제든지 시작해 보라는 뜻이었다.
상여락의 작게 흔들려가던 시선이 투명검에 머물렀다.
‘그래 막을 수 없음에야. 이건 누구도 방비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먹자 풀 죽었던 상여락의 기세가 금세 되살아나고 강력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사위로 퍼져 나갔다.
이에 반해 파천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죽여주마. 죽여서 네 이름을 이 땅에 묻어두고 떠나리라.” 최면이라도 거는 양 중얼거리던 상여락의 눈이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화를 보인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죽어라!” 스스스스스 투명검은 곧장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 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수풀 속을 기어가는 뱀이 빳빳이 쳐들고 다가오는 듯도 보였다.
수호자는 파천의 곁에서 그 전경을 숨죽이고 쳐다보았다. 아그립바는 투명검이 늘어나는 순간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차갑고 섬뜩한 살기가 동공을 파괴시키는 듯한 경험을 했다.
‘기분이 나빠.’ 아그립바가 느낀 본능적인 감정처럼 투명검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투명검이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주변의 전경이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빛을 삼켜버린다. 주변의 모든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점차 커져갔다.
막대한 압력마저 뿌리며 다가오는 투명검은 이제 희미한 형체마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파천의 영안은 뚜렷이 그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투명검의 압력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아니었다.
스팟 파천은 투명검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걸 명확하게 살필 수 있었다.
파천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됐다.” 상여락은 희열에 차 부르짖었다. 파천의 머리통을 투명겸의 검극이 관통해버린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겼다, 이겼어.” 상여락은 파천의 손끝에서 시작된 광명검이 자신이 딛고 선 대지를 양단해 오는 걸 보지 못한 듯 기뻐했다.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었다. 당연히 멈출 것이라 여겼다.
파천의 모습을 살펴 가던 상여락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진다.
“뭐, 뭐야?” 그리고 광명검의 움직임에 시선의 초점을 급하게 맞추었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의 형상을 상여락은 두려움이란 최초의 인간적인 감정을 담고서 노려본다.
“아, 안 돼” 파천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잊지 마라.” “커억.” 그 거대한 검신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음에도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그립바는 어느 새 감았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상여락의 상태를 살폈다.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두 조각이 나 뒹굴고 있을 것이란 아그립바의 예상은 빗나갔다.
휘이이잉 고독한 바람만이 장내를 쓸면서 스쳐간다.
수호자는 어찌 된 연유인지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령이 제거되었다. 상여락은 영혼이 절단되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헌데......어찌 파천은 무사할 수 있을까? 분명 투명검이 두 눈 사이를 파고들었는데.’ 수호자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파천은 잠시 상여락을 주목하여 쳐다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막 상여락을 스쳐가던 파천에게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다시는......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상여락의 축 처진 어깨가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이 순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수호자가 파천의 뒤를 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엔 상여락만이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었다.
“모든 게......끝나버렸어.” 상여락의 독백을 지나치던 바람이 휘말아 올렸다. 무릎이 꺾어지고 머리가 땅에 닿았다. 좌절은 죽음보다 고통스런 화인(火印)을 남겼다.
수호자의 질문이 파천에게로 향했다.
“투명검이 분명 네 두개골을 뚫는 걸 보았건만.” “투명검의 실체는 매우 교묘한 것이었어. 그건 허상이지 실상은 아냐. 하지만 그 효력마저 그러한 건 아냐.” 투명검은 달리 영혼의 검이라고 불려도 될 만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인 의심이나 초조, 불안, 슬픔, 두려움,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파고든다는 게 파천의 설명이었다. 효력은 영혼을 일시에 파괴시킬 정도로 치명적이다.
“막을 방법은 없었나?” “글쎄” 파천은 사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상해도 입힐 수 없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막으려고 했다면 방법이 있었을까도 의문이로군.” 수호자는 내심 기가 막혔다.
“희대의 마병인 것만은 확실하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