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선발대의 신념과 선택 (110/111)

 선발대의 신념과 선택

 흐느끼는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천지 가득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사방이 흑암으로 채워진 중에 그 소리만이 유일한 변화의 흔적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은 하나 제외됨 없이 숨죽이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 생경한 느낌도 잠시, 점차 그 소리에 동화되어 기묘한 감정상태로 접어들게 한다. 

 어찌 들으면 바람소리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였다. 저마다 다르게 들었지만 모두가 환각에 빠져든 건 동일했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은 마음에 새로운 느낌들을 출현시켰으며 그 가운데 안식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일부의 존재들에게는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했다.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파천과 아퀴나스는 숨을 고르며 소리에 더 집중해 갔다. 카오스가 남긴 흔적은 지울 수 없도록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아퀴나스의 탄식은 현재의 상황이 어떤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모두가 혼돈 중에 잠겨버렸구나. 카오스의 목마른 울음소리가 내 소중한 것들을 삼켜버렸다. 그토록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내 힘으로도 막지 못했다.” 여기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파천은 아퀴나스를 위로하지 않는다. 아퀴나스는 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원천적으로 차단시킬 방법은 없었을 텐데. 대처함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도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은 덜어내지 못했다. 파천은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고 또한 이런 흐름을 방치한 것도 사실이라고, 어쩔 수 없었노라고. 

 “카오스를 구별시켜 드러내기만 했어도. 실체를 찾아내기만 했어도.”  아퀴나스의 자책이 이어지는 동안에 파천의 시선은 카오스가 떠난 곳으로 따라 흔들렸다.

 흘러내린다, 터진다, 녹는다. 부서진다. 그리고 새로운 개체로 변형된다.

 혼돈 중에 모두가 사로잡혔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으며 그 양상은 너무도 참혹했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시작일 뿐이었다.

 “파천.” 메타트론의 부름은 의미를 형성하지도 못한 채 다다르지 못하고 공허하게 파천을 비껴갔다. 흔들리는 시선은 메타트론을 넘어 수호자, 선발대를 지나쳐 한없이 확장돼 갔다. 파천의 멍한 시선 속에서 아퀴나스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너와 나 둘 중에 하나가 반드시 옳다고 확신할 수 있나? 이 현상계에 절대적으로 존중해줘야 할 숭고한 진리라는 게 있었던가?” 제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 그것뿐인 것이 억울하다는 듯 아퀴나스는 더 큰 소리로 고함 질렀다.

 “지금의 네 개입은 교묘하게 변명거리를 좌우에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극단적인 이기심에 다름 아니다. 너와 내가 적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 지극히 단순하지. 내가 네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네 굳건한 의지를 시험하고 뒤흔드는 명확하지 않은 우리의 태도 때문이겠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무참히 부셔버릴 위험스런 존재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방비한답시고 저 꼴사나운 무리를 이끌고 온 네 모습이 ... 내겐 왜 이리 초라하게 보이는 걸까? 좀더 솔직해질 수는 없었나? 우리 눈과 귀를 속일만한 달콤한 타협안을 가져올 수는 없었단 말이더냐? 우리들의 기억이 네게는 그처럼 무가치한 것이었나?” 파천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퀴나스의 떠드는 소리에 매료되었다거나 온전히 동의함은 아니었다. 또다시 파천의 의식을 흔드는 아퀴나스의 외침!

 “너와 내가 없어져도,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이 세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착각하지 마라, 파천. 가면을 벗어라. 넌 완전자도, 그렇다고 저들과 같은 나약한 인간도 아니다. 네가 돌아오길 염원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면 그래서 눈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되었다.

 키케로, 너의 ... 지금의 네 모습은 ... 소중한 무엇인가가 부셔져 흩어질까 봐 초조와 불안에 떨고 있는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 그래, 우리가 이 세계에서 몰아내버렸던, 우리가 혐오하던 바로 그놈, 카오스의 지저분한 냄새가 난다.

 정돈되지 않은, 명확하지 않은 의지로 늘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다고 믿었다. 주변은 물론 자신조차 파멸로 밀어 넣고도 제 존재의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지.

 자, 보아라. 널 향한 의심의 눈초리들을. 한때는 그처럼이나 맹목적으로 널 지지했던 헤르바르트조차 네 진실 된 의도를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뭐라 하는 것 같은가? 저자가 이제 우리를 멸하고 노예로 삼고자 왔구나. 저자가 우리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왕이 되고자 왔구나. 저자가 우리를 꺾고 제 영광을 세우려고 왔구나. 해볼 테면 해봐라 ... ”

 “파천!” 메타트론의 짜증 섞인 부름에 파천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정신을 추슬렀다. 메타트론을 위시해 수호자와 선발대 등이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얼굴엔 짜증이 덕지덕지 불어 있었다.

 “갔다 온 일에 대해서 설명해줘야지?” “그래, 그래야지.” 파천이 뭔가 이상하다. 수호자만이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파천, 너무 무리한 요구다. 우리가 여기서 더 긴장하길 바라나본데 ... 그러다간 시작도 하기 전에 주저앉고 말 거야.” 파천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메타트론이 재차 다그쳤다.

 “결과는?” 파천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선 무겁게 입을 열어 갔다.

 “둘 중에 하나. 남는 자가, 이기는 자가 입을 열어 말할 것이다.” 그렇게 결론지어지기까진 아퀴나스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그가 파천을 몰아붙이며 싸울 뜻을 내비쳤고 격렬히 타오르는 결전 의지를 파천은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메타트론의 눈 속 깊은 곳에서 반짝이기 시작한 생기와는 달리 수호자는 암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피할 길은 없었나?” 스스로에게 재차 물음이 던져졌다.

 ‘진정 피할 수는 없었던가? 헤르바르트의 말처럼 처음부터 다른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고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현실을 일깨운 건 메타트론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자, 자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처음부터 이러리라고 예상했던 일이니까. 이제부터 세부적인 사항들을 검토해봐야겠는데 ... 아무래도 파천이 이곳 사정에 밝으니 내 특별히 지휘관의 자리를 양보하지.” 파천은 간략하게 의견을 정리해 내놓는다.

 “그들은 오만하다. 자신들의 능력이 신에 버금간다고 여기는 자들인지라 세력 전으로 나오지는 않은 것이다. 여섯 지도자 그리고 그들의 최측근 소수. 아마도 ... 상대해야 할 자들은 우리의 수를 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좀 근거가 약한 확신인데 ... 믿어도 될까?” 루시퍼는 즉각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소모전으로 나온다면 꽤나 번거로울 텐데 왜 그들이 그런 유리함을 버린다는 거지?” “수의 많고 적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으니까. 물음에 대한 답. 그들도, 우리도 ...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적에게서 찾고자 한다. 그 결과물로서. 그들의 고매한 자존심이 다른 여타의 우연이 침범해 원래의 뜻이 훼손되는 걸 용납하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는 아퀴나스가 원치 않는 일이다.” 메타트론이 파천의 의견에 동조하며 거들고 나섰다.

 “그렇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어쨌든 비밀차원의 여섯 우두머리만 제거하면 끝이란 말인데 ... 예상보다는 좀 시시한 감이 있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버리라고 충고해주고 싶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신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게 된 자들. 내부적인 갈들이 치열했음에도 지금껏 원칙을 고수하며 이 세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끊임없이 외부로 눈을 돌리려는 자들은, 그들의 충동을 다스리고 억제할 수 있었으니 장악력과 지배력의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도자들의 존재감은 충분히 경탄할 말할 것이지.

 이곳이 좋아 영원히 눌러앉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진정 여기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너 자신에 대한 신뢰만큼이나 그들을 무겁게 대하도록. 네 생명의 끝은 너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항시 잊지 마라.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너로 인해 내 종말을 일찍 맞이하고 싶진 않아.” 지나치듯 던진 말이었지만 메타트론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던지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 정도란 말인가? 믿기 힘들군.’ 마지막으로 넘어서야 할 벽과도 같은 존재 파천.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이나 파천을 인정한다. 그런 파천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허투루 들을 게 아니었다.

 파천이 제안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해보자. 수호자와 난 선발대를 이끌겠다. 전력을 분산하자는 얘기다.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싶다. 긴밀한 연락을 통해 서로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필요할 때 행동을 같이 한다. 원칙은 각개격파다.” “그들이 한 곳에 모이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군.” 루시퍼의 질문이었다. 루시퍼를 대하는 파천의 태도는 메타트론과는 또 달랐다. 아무래도 예전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파천의 눈빛은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져 있었다.

 “그들이 모여 있다면 우리 또한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이게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한데 어울려서 힘을 합하기엔 여러모로 껄끄러운 구석들이 많다. 자기주장들이 강해 외부의 약한 자극에도 쉽게 분열한다.

 위기라고 판단되면 일시간 힘을 합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믿지 못한다. 일치할 수도 일치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 간의 견제와 균형이야말로 이 세계를 지탱시켜온 핵심이었으니. 만약 이런 내 예상이 깨진다면 ... 우리 싸움은 좀더 힘들어지겠지, 아주 많이 ... ” 메타트론은 파천의 제안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파천은 이어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들과 기타 알아두면 좋을 만한 여러 가지 정보도 덧붙였다. 그 중에는 의미가 모호해 과연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열된 기호 정도로 인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메타트론이 무리를 이끌고 사라진 연후 수호자가 지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놨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전력을 굳이 양분한 진정한 이유가 듣고 싶은데?” 그랬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믿음처럼 서로 간의 전력이 팽팽하다면 전력을 분산해 유리할 게 하나도 없었다. 각개격파란, 포장만 그럴 듯한, 전략으로는 왠지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파천은 수호자를 위시한 선발대 전원을 하나씩 훑어가며 조심스럽게 속내를 꺼내놓았다.

 “우리 중 과연 몇이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들과의 정면대결은 ... 백 번 되짚어 생각해보아도 사실 무모한 일이지. 요행을 바라고 밀어붙이기엔 위험 부담이 커. 너희들 중 단 하나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미련스럽게 강행해야 할까? 다시 한번 말하마. 내 생각이 짧았다. 너희들을 데려 오는 것이 아닌데 ... ” 대체 무슨 소린가? 한참 용기백배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싸움을 앞둔 용사들을 향해 지휘관이란 작자가 뱉어낼 말은 아니었다. 설사 현실이 그렇다 하여도 대책을 강구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짜내어야 할 파천이 저런 나약한 말부터 꺼내놓는 저의가 뭐란 말인가? 모두는 파천의 말을 수긍하기보다는 그 점이 의아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파천의 나직하나 힘 있는 음성이 선발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번 싸움의 목적은 비밀차원의 붕괴나 파괴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영계를 위해서도 비밀차원은 존재함으로써 더 유익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는 그 수위를 넘어선 감이 없지 않지. 비밀차원은 변수가 많은 곳이고 그런 이유로 여기 오기 전까지 무엇을 결정했든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이 싸움을 하자고 한다. 피할 수 없겠지. 허나 아직은 아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파천은 뜻 모를 말로써 닫아두었던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파천의 의도는 간단한 듯 보이지만 꽤 복잡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 수호자를 포함한 모두를 속여 왔다고 고백했다. 선발대를 이끌고 비밀차원에 들어선 데에는 영계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 요소를 제거한다는 일차적인 목적보다도 더 절실한 두 가지의 시도가 숨어 있었다.

 그것이 단지 시도에서 그칠 것인지도, 원하는 결과물을 손 안에 움켜쥘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하나는 메타트론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전력을 적의 손을 빌려 약화시키는 것. 그 목적은 이변이 없는 한 어느 정도는 성취될 거야.” 파천의 확신에 찬 어조만 보아도 비밀차원의 저력이,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일지 알만했다. 그런 곳에 파천은 위험천만하게도 선발대를 데려 온 것이다.

 “선발대를 동행시킨 것은 메타트론의 주력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의심 없이 동의를 구해내기 위해서 너희들을 이끌고 왔다. 그리고 이 싸움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싸움이어야 하고 또 ... 너희들이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너희들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어이없고 황당한 순간이었다. 선발대를 이끌고 온 이유가 고작 그것이 전부라고 이해시키기엔 무리가 따랐다. 좀더 그럴 듯한 설명이 뒤따라야만 했다. 모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라미레스가 벌컥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메타트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데려 왔다고? 그리고 돌아가라고? 파천, 잘 들어라.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왔고 그 결심엔 지금도 변함없다.

 네 말처럼 우리 모두의 싸움이야. 살아남는 건 차후 문제. 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지만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이제 네 판단이 개입할 수 없다. 그래, 까짓 죽지 뭐. 싸우다 적보다 약하면 죽는 건 당연해. 아무도 널 원망하지 않아. 전쟁에 뛰어든 이상 죽음은 거부할 수만은 없는 숙명과도 같다.

 운이 좋다면, 그래 운이 좋다면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겠지. 하룬을 떠날 때 반드시 결과가 좋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라고? 난 절대 그럴 수 없다.” 라미레스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그와 똑같은 의견들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흘러나왔고 하나같이 그 결심은 다른 이가 어찌 해볼 수 없을 만큼 굳건하기만 했다. 하지만 파천은 가만 고개를 저을 뿐이다.

 “만용이다. 가치 있는 죽음이라면 말리지 않겠지만 전혀 ...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더 절실한 이유가 있다. 모두 예측한 일이지만 지금쯤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공격을 감행했을 터.” 수호자가 파천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현재 확보된 하룬의 전력으로도 그들과 충분히 겨뤄볼 만하다. 그건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 “천만에. 마령의 본주! 그를 벌써 잊었나? 우리가 이곳에서 생명을 부지해서 돌아간다 해도 정작 하룬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면 ... 과연 ... 우리는 스스로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우선은 하룬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큰 우리의 사명이다.

 지금의 정황이 둘을 한 번에 방비하게끔 허락하지 않기에 이곳을 먼저 왔어야 했지만 하룬도 버려둘 수 없다.” “그럼 넌? 너 혼자서 이곳에 남아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지?” “나 혼자가 아니다. 여기 수호자도 있고 메타트론도 있다. 그리고 비밀차원의 복잡한 상황이 되려 우리를 안전하게 할 것이다.” 파천은 어이없게도 적들의 그 막강한 힘이 자신에게 보탬이 될 것이라 했다. 그의 머리 속엔 대체 무슨 계획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파천의 끈질길 설득에도 불구하고 선발대원들은 그다지 수용할 뜻이 없어 보였다. 이미 결심한 이상에는 절대로 뜻을 꺾지 않을 기세였다.

 라미레스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마령의 본주가 멍청한 놈이 아닌 이상 초전부터 참여해 깔짝대지는 않겠지. 그러니 우리에게도 아직은 시간이 충분하다. 우리 힘이 네게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 저들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스런 행동이라면 네 말대로 ... 그리 하겠다.

 하지만 잠시라도 저들에게 곤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여기 남을 절실한 이유가 된다. 우리들만 돌아간다 해서 환영받을 리도 없고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시키는 쪽에 승부를 걸고 싶다.” 사실 파천이 애초의 계획을 수정하면서까지 급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직은 확인되지 않은 비밀스런 존재! 한 가지 떨쳐버릴 수 없는 직감이 위험 신호를 깜빡이며 그를 조급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 ’ 파천은 두 번째 목적에 대해서 털어놨다.

 “저들은 강하다. 저들의 현 구도는 균형이 무너져 지극히 위험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아퀴나스라는 이름은 저들 중 특별하게 영광을 받고 있다. 그 이면에 어떤 힘이 작용했는지를 캐볼 생각이다.

 만약 내 짐작이 맞는다면 ... 그는 내 전부를 이곳에 묻어도 승리할 수 없는 변수가 된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어떤 시도도 무모하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너희들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처음의 계획대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파천은 여기 오는 내내 그 생각으로 불안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도 그럴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면 그 순간 모든 계획은 전면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비밀차원을 언제든 위험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 모든 부정적인 염원의 저주라고 불러야 할 그 존재는 오래 전 나를 포함한 이곳의 지도자들에 의해 봉인되었었다.” 파천은 그 힘을 미약하긴 하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끈적거리는 은밀한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께름칙하다고도 했다.

 파천은 광명을 얻고 중간계에서 코모라를 대면했을 때부터 그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비밀차원은 그래서 우선순위 정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봉인이 해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제 거의 확신이 되어 있었다.

 ‘최악의 경우 아퀴나스가 이 일에 개입돼 있다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그것만 아니라면 차라리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걸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선발대원들은 파천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 간절한 호소들이 모두 자실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지어낸 거짓일 거라 생각하는 듯 무감동한 시선을 보내오고만 있었다. 이쯤 되면 누구 고집이 더 센가로 판가름 날 것 같지가 않다.

 양자는 땅이 꺼져라 하늘이 날아가라 한숨만 푹푹 내쉰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뚝심으로 무장한 채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선발대의 의지가 아무래도 이긴 것 같다.

 “할 수 없지.” 파천이 백기를 드는 순간이었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위험에 선발대가 노출되기를 자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발대의 안전을 볼모로 도박을 해야 한다. 비밀차원에 들어선 이후부터 파천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그럴수록 불안감은 증폭되어 갔다. 파천은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누구 하나라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불안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파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수호자는 파천이 현재 느끼고 있을 심정적인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양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가 선발대를 이끌겠다. 파천, 너는 미심쩍은 부분을 먼저 확인해봐라. 그런 연후에 우리와 합류하는 게 낫겠다.” 결국 이렇게 해서 파천은 혼자 움직이게 되었고 수호자와 선발대는 파천의 당부대로 적과 대면하는 순간을 조금 더 늦춰 보기로 했다. 불만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메타트론은 불타는 시선으로 한 곳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이쯤 가까이까지 접근했으면 작은 기척으로라도 맞아줘야 정상이건만 기대했던 반응은커녕 오가는 그림자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다.

 “흠, 이놈들 보통내기들이 아니군.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겠지?” 이 순간 메타트론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감각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이곳이 비밀차원이라지만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메타트론의 예민한 감각에도 어떤 존재감도 포착되지 않는다. 아니 무언가에 의해 그런 감각의 영역이 훼손되고 방해받고 있다는 게 더 적적할 표현이었다.

 “좋아. 내 앞에서 그런 자신감을 보인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던가를 깨닫게 해주지. 루시퍼!” “네.” “선봉을 맡아라. 저 화려한 궁성을 깡그리 부셔버려라. 그래도 기어 나오지 않을지 지켜봐야겠다.” 루시퍼가 고개를 까닥이며 뒤돌아섰다. 그는 주변에 늘어선 대마신들을 점검이라도 하는 듯 다시금 확인했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모조리 소멸시킨다. 자비 따위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라. 모든 존재들이 우리를 왜 악마라고 부르는지를 보여줘라.” 과연 그런 의미를 이해나 하고서 하는 말일까?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주변 공간을 함몰시킬 듯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루시퍼와 일곱의 대마신들이 한꺼번에 공중 높이 솟구쳤다. 영계의 어떤 초강자도 이들의 위엄찬 모습을 보았다면 두려움으로 전신을 떨어댔을 것이다.

 거대한 궁성이 허공 높이 걸려 있었다. 단숨에 공간을 단축시킨 루시퍼의 눈길이 한 곳에 고정된다. 목표는 동일했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궁성을 포위하며 늘어섰다. 아직까지도 기척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한꺼번에 힘을 발동시켰다.

 화려한 빛줄기들이 사방에서 생겨나 궁성의 최상단부에 모아졌다.

 파스스스 쿠루루루룽 콰쾅 빛은 저항 없이 궁성을 통과했고 중심부에서 시작된 균열은 곧장 빠르게 확산됐다. 웅장한 공성이 미세한 먼지로 흩어져 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렇게도 거대하고 화려했던 궁성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모든 것이 꿈이요, 환상이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눈앞에 일시에 환해지자 텅 빈 공간을 주시하는 시선들엔 의문만이 가득했다.

 메타트론은 기가 차 중얼거렸다.

 “파천, 네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대마신들도 기운이 빠져 망연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기 바쁘다. 충성스런 대마신 발리가 재빨리 보고를 한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도주한 듯 보여집니다.”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좋았을 뻔했다. 대답이 없는 건 당연했다. 루시퍼는 대마신들에게 좀더 넓은 지역을 포함시켜 조사할 것을 명했다. 메타트론은 고민을 거듭했다.

 ‘이놈들이 한 곳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놈들이 힘을 합했다면 ... 최악의 상황이란 말인데 ... .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정명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아니면 ... .’ 처음부터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걱정이 커져만 갔다. 파천과 수호자 그리고 자신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불안감은 더욱 부피를 키워 간다.

 “나를 따라라.”

 메타트론이 파천을 찾아 움직이고 파천이 또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그들의 적으로 맞서야 할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깊은 침묵과 함께 했다.

 그들 사이에 아직도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던가? 오래지 않아 침묵은 헤르바르트의 잔잔한 음성에 의해 녹아들었다.

 “어떤 입장이었든 이제는 하나로 통일시킬 때가 왔다. 더 이상의 대립은 어리석다. 키케로와 메타트론, 수호자. 이들 세 존재의 능력은 우리가 힘을 합하지 않고서 거론할 수 없다. 그들이 적임을 선언한 이상 우리도 그에 걸맞는 대응을 결정해야 한다. 그것도 신속히!” 코모라는 아퀴나스를 의식하며 자신의 주장을 조심스레 펴나갔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다. 총동원령을 내려 깡그리 쓸어버리면 된다. 그런 후에 차원을 넘어 영계 전체를 정복한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천궁과 부딪치게 되겠지만 ... 충분히 해볼 만하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길 원했던 진실은 이제 너무도 분명해졌다. 약속은 신이 먼저 파기했다. 우리의 싸움은 생존을 위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정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코모라는 아퀴나스의 처사에 불만이 많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캄파넬라가 힘을 실었다. 

 “진군하자. 우리가 뜻을 모은 이상 두려울 게 없다. 키케로와 메타트론, 수호자가 버거운 상대이긴 하지만 이곳은 우리의 세계. 우리의 권능이 작용하는 곳. 제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이곳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지. 우리가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유리함을 버린다 해도 ...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코모라와는 달리 캄파넬라는 단념이 빠른 편이었다. 아퀴나스는 한곳으로 다섯을 불러들이며 비밀차원의 전 생명체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킬 것을 먼저 지시했다. 그런 연후 공간을 닫아걸었던 것이다. 캄파넬라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

 “그래서 우르르 몰려가서 꼴이야 어떻든 승리만 쟁취하면 된다는 건가? 그런 모습을 보인 후에도 과연 지도자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지켜 갈 수 있으며 존경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 보는가?” 바르트의 발언은 한참 신이 나서 떠들었던 캄파넬라와 코모라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그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승리가 너희에게는 가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지금껏 도전을 받은 예도 드물었지만 그럴 경우 언제나 난 상대를 존중했고 정당한 승부를 펼쳤다.

 적을 예우함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신뢰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얻게 될 승리를 더 값지게 해주었다. 모두들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계략을 꾸며 함정에 몰아넣거나 뒤통수를 치거나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싸울 생각이라면 이쯤에서 난 빠지겠다.

 키케로가 적은 무리로 이곳을 찾았을 땐 적어도 그가 아는 우리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칠 거라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캄파넬라가 반박했다.

 “그럼 묻자. 정당한 승부를 위해이기는 걸 포기해야 할 경우, 너는 그때도 그런 주장을 펴겠는가? 너 하나의 긍지와 명예로 인해 이 세계야 어떻게 되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야 어떤 상태가 되든 상관없다는 말이냐?” “그렇게 말한 적 없다.” “그럴 경우 넌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그야 물론 ... .” 재빨리 말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퀴나스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 간다.

 “물론 당연한 말이다. 저들이 먼저 정당함을 잃지 않는 한 우리가 야비한 짓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번 싸움은 우리들 선에서 끝낸다. 그런 연후 그때까지 살아남는 이가 있다면 ... 그가 모든 걸 결정하게 될 것이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영광을 홀로 누려도 좋으리라.” 아퀴나스의 그 말은 키케로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담고 있기도 했다. 그는 그처럼 이번 싸움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퀴나스의 두 눈이 빛을 발하며 타오른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준비는 끝 ... 났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일만 남았다. 그들과의 싸움이 시작되면 아름다운 우리들 세계는 조금씩 사라져 갈 것이다. 우리의 시작이자 출발점이었던 잊혀진 공간은 차단시켰다.

 두려움은 잊어라. 미련도 버린다. 각오를 새롭게 하라. 그간 대립만 해오던 우리들이었지만 이제는 힘을 합해야 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살아남아라. 이 세계를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아 주기를 ... 당부하겠다. 그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퀴나스와 지도자들은 비밀차원의 모든 생명체들을 잊혀진 공간이라 불리는 곳으로 인도해 들였다. 그리고 이곳과 분리시켜버렸다.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절실했던 것이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싸우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 키케로를 만나고 오겠다.” “그는 왜?” 코모라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아퀴나스는 그곳에서 사라져 갔다. 그의 음성만이 남겨진 자들에게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의 운명을 점쳐봐야지. 아무리 부정 해봐도 키케로는 여전히 키케로인 것을.” 코모라가 화가 나 소리쳤다.

 “대체 그가 왜 두려워하는지를 모르겠다. 아퀴나스에게 제반사항에 대한 결정권을 맡겨도 좋을지 솔직히 회의감이 인다. 그는 아직도 키케로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음이 틀림없다.” “걱정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야. 신중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결단력이 약해서라면 ... 비난의 여지가 많지. 더군다나 키케로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어찌 그를 이기리라 기대하겠는가?” 그러자 빈델반트가 코모라와 캄파넬라를 번갈아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가장 성원해주어야 할 너희들이 먼저 의심을 갖다니. 그런 얄팍한 심사를 지녔으니 우리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을. 예전엔 아퀴나스와 의견 대립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신뢰한다. 왜냐고? 그는 적어도 너희들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진 않으니까. 

 그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너희가 과연 이해라도 할 수 있을지 ... . 그리고 난 믿고 싶다. 그는 우리들 중 가장 지혜롭고 강하다. 예전의 키케로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를 영원의 침묵 중에 잠들게 하기엔 충분하다. 그가 하지 못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빈델반트의 조롱에도 아랑곳없이 캄파넬라가 강경한 어조로 제 주장을 펼쳤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너희들 모두에게 묻겠다. 아퀴나스는 가끔 우리들 의견은 무시한 채 독단적이 행보를 할 때가 많다. 만약 그의 결정이 우리 모두의 이익과 반대된다면 그땐 어쩌겠는가? 그때도 아퀴나스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가?”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모두는 서슴없이 아퀴나스를 버릴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위험한 자들이 자유를 원한다.

  파천과 선발대가 빠져나간 하룬엔 긴장이 더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핵심 전력이 이탈했으니 당연한 변화라 할만 했다.

 다행인 것은 적진에서도 메타트론과 루시퍼를 비롯한 핵심 전력이 빠져나가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 전력 우위를 보이는 건 이제 하룬이라 해도 무방했다.

 진내의 움직임마저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 있는 제왕과 마계의 군대. 지척에 서로를 두고 있으니 경계가 삼엄했다. 

 시간이 흐르며 긴장의 빛은 누그러졌고 불안은 씻겨졌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까지 게을리 하진 않았지만 비교적 평화롭다 할만했다. 그래도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부를 단속하는 걸 잊지 않는다.

 현재의 하룬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지도부는 로메로와 그레고스였으며 제석과 노군, 제왕들이 힘을 보탰고 지혜전사단이 분주히 움직이며 수족 노릇을 자임했다. 군대의 편성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으며 사기는 드높았다.

 주목할 점은 하룬에 속한 자들 치고 이제 적이 침입해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 여기는 이가 없었다.

 이런 안정된 분위기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시점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최적의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심리적인 안정은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된 것이다.

 하나는 제왕들의 가세로 수뇌부의 전력이 상승한 점이고 나머지는 파천이 안배해놓은 보호막으로 인한 안정감이었다. 적들 중 보호막을 뚫고 하룬 내부까지 침입할 수 있는 전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제왕들의 믿음직한 모습은 애초에 가졌던 일반의 선입견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일정 구획을 담당하며 파수꾼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었다.

 하룬의 중심도로에 나타난 로메로와 그레고스를 발견한 군중들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 뒤로는 지혜전사단의 부단주인 부우버와 홀딘이 지혜전사들을 대동하고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 군단의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격려하는 한편 한시라도(원본에는 ‘하시라도’로 되어있었지만 오타인 것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편성된 전력을 용이하게 진군시킬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했다. 7군단까지 다 둘러본 후 망루에 오른 로메로가 적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가 떠난 이후 저들은 곧장 전력을 합했습니다. 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호막을 부수려 할 것입니다.” 그레고스가 말을 이었다.

 “보호막을 부술 만한 능력자가 저기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지는 않겠지. 침투가 가능한 소수라도 공격은 있을 거야. 거기에 대한 대비만 철저하게 해둬도 돼.” 로메로는 보호막을 부술 만한 능력자를 떠올려보았다. 제왕 마르시온이라면 가능할까? 내심 고개를 젓는다. 하룬에 합류한 제왕들이 확인해준 사실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도 보호막을 제거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마르시온이 강하긴 하지만 자신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들며 적진에 그만한 강자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마계는 더욱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시퍼와 대마신들이 빠져나갔으니 최강자라 해봐야 헤르파와 라넷 정도였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현재의 대치상태였다. 보호막을 제거할 수단이 있었다면 저들은 진작에 진격해 왔을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불수하고 로메로와 그레고스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근심거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령의 본주!

 그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일단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너무나도 적었다.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대에 대한 막연한 심려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하룬의 지도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군단장들은 요즘 예하의 편제를 새롭게 하느라 분주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사령부가 일체 관여하지 않고 맡겨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급조된 편제라 허점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지휘자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독특한 개성이 부여되고 있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휘 층의 중간을 두텁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중간을 간소화하고 소부대 단위에 중점을 두는 이도 있었다. 군단장들의 보고가 끝났을 때 그레고스가 지금껏 고심해 왔던 문제를 꺼내놓았다.

 “여기 웅크려 있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토벌을 도모해보는 게 어떻겠소?” 보호막 안에서 숨을 놓고 있는 게 영 마땅치 않았던 것일까? 로메로는 그레고스의 내심을 진작부터 엿보아왔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있었다. 

 그레고스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여타의 지휘관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다. 지켜내기만 하면 된다. 책임에 대한 집중력은 파천과 선발대가 돌아올 때까지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굳이 나가서 적을 맞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1군단장인 야마천주가 적극적으로 제 의견을 피력한다.

 “저들과 우리의 전력 차는 근소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돌발적인 변수가 있다면 예측은 빗나가겠지요. 굳이 유리함을 버리고 적과 대등하게 겨루어볼 필요가 있을까요? 설사 적을 물리쳤다 하더라도 우리의 손실 또한 만만치 않을 겁니다. 타협할 여지도 없는 일입니다.” 야마천주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설란이 물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변수라도 있나요?” 누구보다 현명하고 신중한 그레고스가 괜히 저런 현안을 꺼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심중에 담아두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는 그레고스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였다.

 “근래에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소. 옛용에게서 연락이 두절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념이 내 판단을 흐리게 한 듯하오. 괘념치들 마시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로메로가 덧붙였다.

 “마령의 본주 때문인 듯싶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에 대해서는 어떤 대비책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든 있을 게 분명한데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지요.

 최악의 경우 ... 마령의 본주가 보호막을 제거할 능력이 된다면 ... 그리고 그 틈을 타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면 그보다 위협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현 시점에 적들의 전력을 위협이 되지 않을 수위까지 줄여놓자는 제안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그레고스. 

 로메로의 상세한 설명이 있고 나서야 모두는 이해한다는 표정들이다. 타당성이 있는 의견이었음에도 여전히 망설여진 수밖에 없다.

 이후 여러 가지 수습해야 할 현안들에 떠밀려 일단은 보류되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좀더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기로 했다.

 메타트론은 몇 번이나 파천과 영언시도를 해봤지만 결국엔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다른 이들을 놀라게 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이곳엔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힘이 존재한다. 비밀차원, 역시 만만한 곳은 아니야.” 처음 그들과 헤어졌던 곳을 들러보았지만 아직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메타트론은 처음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져든 것이다. 루시퍼가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그들을 찾아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들을 찾아내면 결국엔 자연스럽게 만나지겠지요. 현재로선 그 방법밖에는 없을 듯합니다만 ... .” 루시퍼가 말끝을 흐린다? 무엇이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메타트론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불길함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무슨 일인가 ... 판단을 벗어나 있는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메타트론도 파천이 느꼈던 예의 그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의 종적을 찾아내기만 하면 만사가 술술 풀려 가리라 안일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적을 찾아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체의 종적을 감지해보고자 멀리까지 확장시켜보아도 일정 영역 이상은 감각이 미치지 않는다. 정체 모를 신비한 힘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은 그 힘의 실체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단정 지었다. 그런 확신이 깊어질수록 심정의 외피는 딱딱하게 굳어 간다.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어. 신중해서 나쁠 건 없겠지.’ 메타트론과 일행은 또다시 어딘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 거대한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한 적을 조금이라도 빨리 조우하기 위해서 그들은 또다시 움직여 가야만 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 이 앞에 다시 서는 순간이 올 줄이야.’ 아름드리 석주가 하늘 높이 솟았고 바닥은 기이한 도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나씩의 기둥 마다엔 지면에 연이어 하나씩의 금속판이 둘러져 있고 그곳으로부터 밝은 광채가 흘러나와 사방을 밝혔다. 석주는 동심원을 그리며 7개씩 7겹으로 포진했다. 파천은 첫 번째 석주가 시작되는 지점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곳을 세움으로써 사람에서 신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곳에 가둠으로써 우리는 영원토록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더 이상 영혼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파천은 석주를 쓰다듬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기억의 첫머리쯤에 있을 그 존재를 떠올리자 오싹한 한기가 침습해들었다.

 “놀라운 일이야. 그때의 생생한 경험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을 줄이야.” 앞을 향해 한 걸음씩 딛을 때마다 내심에서 솟구치는 불안의 그림자는 점점 더 분명한 실체로 다가온다.

 하나, 둘, 셋 ... 이제 남은 석주는 단지 하나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7개의 석주는 다른 것들보다 더 크고 우람했다. 금속판은 한데 이어져 있었고 가운데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정확하게 동신원의 중심자리였다. 표면에 갖가지 형상의 도형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고 석주들의 끝에서 뻗어 나온 사슬들이 한곳에서 만났다. 허리 어림까지 올라와 있는 금속판을 파천의 손길이 스치고 지났다.

 스르릉 묘한 기음이 흘러나왔다. 파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음성을 발했다.

 “진정 ... 진정 봉인이 ... 풀렸단 말인가?” 파천은 지금까지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변수를 거기다 하나씩 대입하며 경우의 수를 만들었다. 흐릿했던 단색의 밑그림은 점차 다양한 색감으로 채색돼 갔고 좀더 뚜렷해졌다.

 한참 뒤 파천은 눈앞을 살피는 일에 열중했다.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잔 경련은 점차 큰 떨림으로 변하며 전신으로 번져 갔다. 석판의 중심 즉, 여러 갈래의 사슬이 하나로 만나는 곳은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그 사이로 번들거리는 것은 시커먼 어둠이었다.

 이번만은 예감이 빗나갔기를 빌고 또 빌었었다. 파천은 허탈했다.

 “아퀴나스, 진정 ... 네가 한 짓이더란 말이냐? 아니길 빌겠다. 만약 네 짓이라면 너와 비밀차원은 아무것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평정심이 깨졌다.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의 감정이 더 컸다.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다.

 아퀴나스였다. 그는 중앙의 금속판을 사이에 두고 파천의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퀴나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파천의 눈에서 뿜어지는 찬란한 금빛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마땅히 준비했어야 할 변명거리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제 심정 또한 격동하고 있는 파천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동일하기에 그랬다. 파천이 물었다.

 “누구 ... 짓이냐?” 아퀴나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도 ... 모른다.” 그 대답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순순히 긍정할 수 있게 하는 이유는 뭘까? 아퀴나스에 대한 신뢰가 그처럼이나 깊다고 이해해도 좋은 것인가?

 아퀴나스가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파천에게는 한 줄기 구원의 빛과도 같이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반겼다. 안도의 숨을 토하며 파천의 눈빛이 원래대로 침착해졌다. 

 바라봄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아퀴나스는 당연한 의무라도 되는 듯 모든 걸 털어놓았다.

 “우리들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봉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그들 중 누가 알고 있고 모르고 있는지조차 난 여태껏 파악하지 못했다. 입을 열어 그들의 기색을 살필 용기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

 그들 모두를 혐의 대상에 두고 오랜 시간 관찰해 왔지만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중 하나이거나 그들 모두일지도 ... 아니면 전혀 엉뚱한 존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도 모르지. 

 그도 아니면 카오스가 자력으로 봉인을 풀었을지도. 허망한 말이겠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가 자력으로 봉인을 풀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서 제외되지도 않았을 거고 이곳에 갇히지도 않았겠지. 우리들 중에 하나! 다른 존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 네 말대로다. 카오스의 의지는 봉인을 스스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지가 못했다. 그의 특성이 힘을 공급받기 용이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 이곳만은 예외로 두어도 좋다.” 비밀차원의 일곱 지도자가 힘을 합해 봉인한 것은 두 가지 경우에만 깨어질 수가 있었다. 첫째는 그 의식에 참여한 당자들 중 하나가 직접 봉인을 깨는 것. 다른 하나는 그들 일곱의 합쳐진 능력보다 월등한 힘으로 봉인을 깨는 것.

 그래서 아퀴나스의 결론 역시 파천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엔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아직도 산적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있었다.

 “그를 봉인에서 풀어놓아 얻을 게 뭐지?” 무엇을 얻고자 했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를 풀어놓은 자가 정말 우리 중 하나라면 ...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얻고자 하는 것을 가졌다면 지금과 같은 구도일 리가 없다. 특이할 만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지금껏 없었다.” “아니 변화는 있었다.” “그게 뭐지?” “ ... ?” “그건 바로 너다.” 아퀴나스는 실소를 흘리며 파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의심하나?” “모르겠다. 네가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어둠에 숨은 바로 그자의 의도라면 너를 전면에 세우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네게 영향을 끼쳤을 거란 건 분명하겠지.

 네가 원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너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그의 의도가 숨어 있으리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너를 지도자들 중 으뜸으로 만들어서 뭔가를 획책하려 했겠지. 당장에 내가 보기에도 너희들의 균형을 깨어졌고 그로 인해 언제든지 비밀차원은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너희들의 문제는 비밀차원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좋다. 그렇다고 해두지. 이젠 ... 어쩔 건가?” “찾아내야지. 놈의 뜻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소멸시킬 수 없다면 다시 ... 가둔다.” 아퀴나스는 부정적이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키케로, 알고 있나? 그는 예전과 다르다. 이 세계 전체에 그의 숨결이 머물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숨고자 한다면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 “드러내길 기대하진 않는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잊었나?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는 완벽하게 독립된 인격체가 되었다. 그는 위험부담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가져다 줄 욕망의 성취가 크다는 걸 안다.

 의도를 더 빨리 이룰 수 있을 기회라고 판단된다면 그리고 직접적인 개입으로 제 손으로 모든 걸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모습을 드러낸다.” “놈의 목적은 지금도 변함없이 ...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것일까?” “그것만은 변함이 없을 거야. 놈은 더욱 간교하고 신중해졌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던 그가 이토록 오랜 시간 기다려 왔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봉인을 누가 풀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아퀴나스, 하나만 묻자. 왜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안 순간 모두에게 알려 대책을 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질책인가? 다른 방도라는 게 과연 그 당시에 나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네가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내가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봉인이 풀린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는 것. 그의 능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을 것이란 두려움. 

 그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 나 아닌 다른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 중 하나에 의해 저질러졌음을 뻔히 알고 있는데 .. 그들 역시 이 사실을 알면서 침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쉽게 입을 열수가 없었다. 기다려야만 했다. 먼저 움직여 주기를, 그래서 어떤 틈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봉인이 풀린 게 사실인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모든 건 원만했고 지극히 평화로웠다. 나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새로운 기대를 갖기도 했었다. 그가 달라졌구나.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가 아니구나.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입을 다문 채 어떤 변화가 생겨나기를 기다렸다.” “코모라의 일은?” “첫 번째 징후였지. 코모라는 아주 자주 두려움을 드러내곤 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자 조급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모두에게 배척당했다. 경계하고 있는 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었던 거야.

 그를 지지하던 자들마저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그는 이곳을 박차고 나가 사람들에게로 갔다. 그때 난 처음으로 코모라를 의심하게 되었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더 이상 회복하지 못했고 중심에서 멀어져 갔다.” 아퀴나스는 파천이 이 세계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파천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상세하게 파악해 갔다. 단서를 얻어야만 했다.

 ‘완벽하다. 놈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두고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하고만 있다. 아니 과연 그의 개입이 있었을까 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지극히 변화가 느리다. 어디에 있나? 누군가를 통해 무엇을 획책하고 있나?’ 제일 걱정스러운 건 카오스가 완전하게 각성하였을 경우였다. 그가 여길 떠날 수는 없다. 비밀차원은 그에게 또 하나의 봉인이었다. 만약 전혀 알 수 없는 변수에 의해 그가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었다면 잠복되어 있는 위험도도 그만큼 커진다.

 허나 그것만은 제외시켜도 좋을 기우였다.

 ‘완벽하게 각성을 한 후라면 ...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아직은 때가 이르다.’ 아퀴나스가 의외의 말을 했다.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키케로, 너뿐이다.” 그랬던가? 당시 비밀차원에 남아 있지 않았던 파천만이 혐의에서 자유롭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적으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로 인식하게끔 하다니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파천은 아퀴나스와 상당한 시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이어 갔다. 파천은 아퀴나스가 처음 접하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아퀴나스가 받고 있는 심정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카오스가 된 것이다. 위험한 존재이긴 하지만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이지. 문제는 그를 일깨운 자의식을 파괴하고 영역을 확대시켰을 때다. 

 그때 각성은 이루어지고 그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최초의 동인으로 거슬러 올라간 카오스는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모든 관념들에 혼란을 불러들인다.” 아퀴나스는 궁금했다.

 “너라면 ... 너라면 제어할 수 있나?” “아니, 각성한 카오스는 최후단계의 소멸에 해당된다.” “무슨 의미지?” “ ...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전 이 우주는 대정화의 시기가 오고 곧장 휴식기를 맞게 되지. 카오스의 소멸과 더불어 말야.” “그럼 ... 그렇다면 그의 소멸이 곧 ... ” “그래, 카오스는 세상이 열리는 순간 생겨나지만 각성은 마지막 시기에 이루어지지.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카오스가 봉인을 풀게 된 것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한 것이라면 ... 그것은 각성을 이루었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그럼 ...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 ” “그 ... 런가.” 자조적인 되뇌임은 아퀴나스의 뇌리 속에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스스로의 힘이, 능력이 이 세계에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해 왔었다. 그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광명을 얻은 파천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파천에 대해서도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오스의 각성이랑 것이 그처럼 절망적이 상황이란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파천의 단언은 아퀴나스와 다른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각성한 카오스를 상대하는 건 전적으로 파천의 역할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숨겨진 마지막 파천의 비밀이 바로 그것에 결부되어 있었다.

 카오스에 대한 대부분의 비밀스런 사실들이 파천에게서 아퀴나스에게로 전해졌다. 하지만 끝내 파천은 자신과 관계된 부분에 의해서만은 언급을 피했다.

 마계의 진영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합류한 마르시온은 자신을 억압할 존재가 사라지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위세를 보였다. 제 속을 남에게 숨기지 않는 다소 직설적인 성격의 마르시온은 마계의 대포자인 헤르파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불만이 가득한 논조로 한껏 기세를 올리며 헤르파를 압박했다. 장시간에 걸친 마르시온과의 논의는 헤르파의 심신을 피곤하게 할 정도였다.

 "이대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참인가? 이렇게 소심한 자가 있나. 함께 도모함이 마땅치 않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메타트론님의 당부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독자행보를 선언했을 것이다.” 상대에게서 반응이 없자 마르시온은 더 큰 소리를 내어 헤르파를 힐난했다.

 “싸움을 겁내는 자가 어찌 마계를 대표하게 되었을까!” 이쯤 되면 누구라도 반응이 있기 마련인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눈을 반개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심기가 상했던지 마르시온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마르시온이 탁자를 내리쳤다.

 탕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석물로 된 탁자가 쪼개지며 주저앉았다. 돌가루가 날리는 사이로 마르시온이 벌떡 일어서 있었다.

 “좋다. 나 혼자서라도 공격을 감행하겠다. 네가 파천의 아들이었다고 듣긴 했으나 루시퍼의 양자가 된 이후로 과거를 버렸다고 여겼거늘 이제 보니 그 모든 것이 위장에 불과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너한테 마계의 대군을 맡긴 루시퍼가 가련하기 그지없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너와의, 아니 마계와의 동맹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추후 루시퍼가 돌아오면 그에게 이 일을 추궁하고 따지겠다.” 그제야 헤르파가 눈을 떴다. 실내엔 그 둘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헤르파의 뒤엔 언제나처럼 라넷이 그림자인 양 함께 하고 있었다.

 라넷은 마르시온의 방자한 행동이 못마땅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고 있었다. 헤르파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음색은 영락없이 파천을 닮았다.

 “진정하시오. 그대의 재촉함이 아니라도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으니.” “뭐라고!” “그대의 말처럼 당장 진격해서 얻을 게 있다면 왜 그리 않겠소. 얻는 건 곳하고 모두를 잃을지도 모르기에 주저앉아 있는 것 아니겠소?” “부딪쳐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니 이런 약골을 루시퍼가 왜 양자로 받아들였는지 모두지 알 수가 없구나.” 헤르파는 빙긋 웃기만 했다. 마르시온이 남에게 드러내는 행동과는 달리 사실은 속이 깊으며 음흉한 위인이란 걸 헤르파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과장된 모습도 실상 진실된 속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짐작한다.

 헤르파는 진심으로 동조한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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