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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화 (1/373)

학사재생 1화

“아미타불……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먼 옛날, 석가가 태어나서 외쳤다던 탄생게(誕生偈)를 읊는 노승(老僧)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실상 그뿐이 아니었다. 노승의 좌우로 나열한 구인(九人) 중 누구 하나 안색이 밝은 이가 없었다. 한곳으로 고정된 시선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격하게 떨린다.

노승을 비롯한 십인(十人) 아니, 새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는 장백산을 오르는 일천무인(一千武人) 모두가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에는 단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모두가 그를 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를 죽이기 위해 검을 뽑았다. 두려운 점은, 처음 함께 출발했었던 이들은 일천이 아닌, 일만(一萬)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만무인(一萬武人)!

그 어마어마한 숫자를 단순한 하급무인도 아닌, 정(正)과 사(邪), 심지어 마(魔)까지 통틀어 최고의 정예 고수들로 모았다.

줄을 지어 세운다면 드넓은 중원이라는 땅 아래에서 첫 번째부터 만 번째까지 똑바로 줄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난 병력(兵力)이었다.

한데 그들 중 구 할(九割) 이상이 드높은 장백산의 정상.

천지(天池)를 등지고 선 장발의 사내에게 모두 죽었다.

함정도 없었다.

얄팍한 계략이나, 수도 없었다.

순수한 무(武).

심지어 검도 아닌, 맨 주먹과 두 다리만으로 구천이나 되는 정예 무인을 때려죽였다.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다.

심지어 노승을 비롯한 십인.

드넓은 강호에서 사내를 제외한다면 가장 강하다고 평가 받는 우내십존(宇內十尊)조차도 감히 그를 향해 먼저 손을 내뻗지 못했다.

노승의 말이 맞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 짧은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내를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칠야무신(七夜武神) 황준우.

고작 일곱 번의 밤을 거쳐 무신의 칭호를 얻은 최초의 무인의 이름이었다.

“우라질,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구먼.”

천지를 등진 채, 고고한 시선으로 끈임 없이 자신을 향해 뛰어 올라오는 무인들을 보는 황준우의 입가로 쓴웃음이 떠오른다. 몸을 숨긴 채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다섯 무인이 각자의 병기를 든 채 몸을 날린 것 역시 동시였다.

“언제까지 땅속에 파묻힌 벌레처럼 숨어 있나 했다.”

꽝-!

지면을 발로 강하게 내리쳐 천지 주변에 쌓인 붉게 물든 눈을 허공으로 분사시킨 황준우의 두 주먹에서부터 맑은 하늘을 닮은 강기가 번쩍였다.

퍼버버벅-!

비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눈 발 사이로 핏물을 흩뿌리며 산 아래로 추락하는 시신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황준우가 거칠게 침을 뱉었다.

“지긋지긋한 중원 놈들. 내 이번 일만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서쪽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을 테다.”

실상 지금 당장도 타지인 중원 생활이 너무나 고되 고향인 고려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뿐이다. 드넓은 대지가 주는 자유와, 세상의 중심이라 외치는 한족들이 가진 기품 따위는 이미 꿈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실제 그가 본 중원은 많은 사람이 모인 만큼, 그 값을 하는 땅이었다.

‘지독한 놈도 많고, 치열한 새끼들도 많고, 억울한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고!’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오지랖이 넓다고.

황준우의 성격이 딱 그러했다.

억울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저 몇 번쯤 못 본 척 눈 딱 감고 지나갔다면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도망치듯 중원을 벗어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끝 모를 바다보다도 넓은 오지랖을 펼치다 보니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후회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그냥 내 인생이나 잘 챙길걸.’

스스로 창시하고 익혀 온 무공이란 놈이 그래도 어디 가서 부족하지는 않을 수준이라 생각하여 나댔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니, 실상 예상이나 했을까?

중원에 들어온 첫날 마주쳤던 색마(色魔)가 그 유명한 무당파의 장로였을 줄이야!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황준우였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발정난 개보다도 못한 새끼! 나이가 몇인데 제 손녀뻘도 안 될 어린 아이를 벗겨 놓고……!’

머리 위로 열이 확 뻗쳐오르는 것을 느낀 황준우의 쌍심지가 하늘 높이 솟았다.

“죽어라! 칠야무신!”

“빌어먹을 살인마!”

“으아아아-!”

그를 따라오듯 땅을 기듯이 올라온 삼십여 명의 무인이 각자의 절기를 뽐내며 기합, 혹은 괴성을 내지른다. 짧은 시간, 그들의 면면을 모두 확인한 황준우의 고개가 살짝 주억여졌다.

“살인마, 맞는 말이지.”

고작 오 년 정도밖에 안 되는 중원을 떠돌았던 시간 동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수가 몇이던가?

처음에는 억울한 자들을 돕기 위해 뻗은 손이었지만, 나중마저 그랬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쩌면 그는 또 다른 억울한 누군가를 제 손으로 죽였을 수도 있다.

수많은 원망과 저주가 쏟아져도 부족하지 않을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다.

‘이렇게 살고 싶던 건 아닌데…….’

하나 결국 그렇게 살아 버렸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차가운 눈으로 달려드는 무인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뭉개 버린 황준우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뒤에서 숨어 있으려고……!”

만 명의 무인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중 구천이 넘는 수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하나 구천구백구십 명을 선동한 진짜로 나쁜 열 명은 아직까지도 저 멀리에서 핏방울 하나 묻히지 않은 채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뿐이다.

“이런 우라질 십(十) 놈 새끼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비열한 십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황준우가 몸을 날린다.

여태껏 장백산 정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발걸음을 떼지 않던 그가 몸을 날린 순간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파앙-!

단지 뛰어나갔을 뿐인데 공기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태풍을 닮은 거친 바람이 몰아친다.

“우와아악-!”

“비, 빌어먹을!”

높은 산을 오르며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무인들 중 몇몇이 그 풍파(風波)를 이기지 못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러 산 아래로 떨어진다.

“놈을 막아!”

“칠야무신을 죽여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내십존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짧은 말에, 훤하게 뚫려 있던 황준우의 정면을 단숨에 수백이 넘는 무인들이 가로막는다.

“저깟 악당 놈들의 말이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가련한 녀석들.”

하나 정작 작금 황준우의 눈앞을 시커멓게 채운 무인들 중 본인이 선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이들 또한 열을 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황준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누군가의 말마따나 살인마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도 변명일 뿐. 일만에 가까운 사람을 가차 없이 죽인 주제에 떳떳한 것 만한 위선도 없으리라.

그런 만큼 심장에서부터 차가운 비수를 세운 서늘한 눈을 띄운 황준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달려드는 검을 푸른빛이 감도는 팔뚝으로 막아서며 반대쪽 주먹을 내지른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듯 쏟아져 나간 푸른 강기는 단숨에 수십이 넘는 무인을 휩쓸어 버린다.

“다들 비켜라!”

뒤를 이어 쏟아진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무인들은 귀와 코로 피를 쏟으며 제자리에서 무너졌다.

‘아직 많군.’

그럼에도 아직 쓰러지지 않은 무인이 반절 이상이다.

겁에 질릴 만도 하건만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혹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광기(狂氣)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무인들은 계속해서 황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놈을 죽여라! 놈을 죽이는 이는 무림의 영웅이 될 것이다!”

“새로운 무림 황제의 이름이 우리 앞에 있다!”

“칠야무신의 목에 걸린 황금만 백만이다!”

“그 돈이면 성을 하나 통째로 살 수 있다고!”

금전욕.

그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색욕(色慾)과 지배욕까지.

세상의 모든 욕심이 칠야무신과 황준우라는 이름 아래에서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날뛰고 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배길 수 있으랴?

“나 또한 미치겠거늘…….”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에 다시금 쓴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주먹 앞으로 푸른빛 강기가 원형의 형태로 몰려든다.

번쩍-! 쿠르릉-!

눈 내리는 하늘에서부터 쏟아진 번개와 천둥소리에도 눈앞을 가로막은 수백의 무인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다.

파직, 파지직-!

원형으로 뭉친 강기에서부터 뇌전이 번쩍여도 상황은 변할 것이 없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길게 주먹을 내뻗어 눈앞에 뭉친 무인들을 향해 강기를 쏘아 보낸다.

콰가가가-!

“저, 저게 뭐야…….”

“마, 말도 안 돼!”

무인들을 휘감고 있던 광기가 깨어진 것은 붉은 피가 뒤덮인 눈밭을 가르며 점점 더 거대해져 가는 푸른빛 강기가 눈앞에 다가온 뒤였다.

이미 너무나 뒤늦은 때.

콰앙-!

폭발은 거대했으며.

콰과과광-!

하늘에서 쏟아지듯 내리치는 벼락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수라장!

“끄아악-!”

“살려 줘!”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그들을 외면한 황준우가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더 이상 눈앞을 막아선 벽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단 열 명!

중원을 떠나기 전 꼭 때려잡으리라 생각하는 최악의 인물들을 정면으로 마주한 황준우가 웃었다.

“드디어 잡았다. 십 놈들.”

“갈! 예가 어디라고!”

웃는 황준우를 향해 붉은 장포를 휘날리며 관운장을 닮은 기다란 수염을 휘날리는 사내가 손바닥을 내뻗는다.

우내십존 중 일인으로 유명한 그의 이름을 황준우는 몰랐다.

단지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오, 수염 긴 메기 닮은 놈.”

“……!”

꽝-!

놀라는 그의 손바닥을 한 손으로 가볍게 사로잡은 후, 벼락같은 주먹을 날린다.

사람의 머리를 쳤는데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오며 동공이 풀린 중년의 사내가 제자리에 쓰러진다.

즉사였다.

“철호귀장(鐵胡鬼掌)이 단 일수에……!”

우내십존 아니, 이제는 우내구존이 된 무인들 사이에서 큰 술렁임이 일었다.

철호귀장이 어떠한 사내이던가?

비록 정과, 마에 비해 조금 뒤처진다고 하지만 강호의 삼대세력(三大勢力) 중 하나라 불리는 사도무림의 지존(至尊)이라 불리던 초고수다.

그런 철호귀장이 단 일수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연고도 없던 장백산 눈밭 위로 쓰러졌다.

이름 높은 우내구존이라 한들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네놈들이 하도 잘 숨는 바람에 잡는 것도 포기했었는데, 이리 제 발로 쫓아와 주다니 내가 다 고마울 따름이네. 모두, 죽을 각오는 된 거지?”

“아미타불…….”

황준우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에 신음을 흘린 노승이 불호를 외운다.

“그래도 당신은 조금 의외야. 체면 차린다고 이런 자리에는 안 낄 줄 알았거든.”

우내십존이라 불리는 이들조차 대다수 이름을 외우지 않은 황준우였지만 노승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불성(佛聖) 원공 대사.

하늘 아래 모든 무공의 근원지라는 소림의 제일고수이자, 이미 오래전에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림사를 지키기 위해 지상에 남았다는 소림의 수호신.

다 같은 우내십존이라 한들 불성에 비하자면 못해도 한 끗발씩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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