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화
“시주께서 천살(千殺)을 넘어, 전 중원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하는데 어찌하여 지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천 명을 죽인 게 그리 대단해? 아, 물론 무서운 일이지. 근데 네 옆에 선 놈들도 다들 그 정도쯤은 우습게 해 먹었을 것 같은데? 심지어 그래서, 천 명도 부족하니 만 명쯤 죽이라고 가져다 바친 건 자랑스러운 일이고?”
황준우의 비아냥에 원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찌 아니라고만 부정할 수 있을까.
지금 그의 옆에 선 인물들은 정도를 대표하는 고수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강호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정, 사, 마의 무림연합군.
황준우라는 단 한 명의 사내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이들 중에는 평소 원공이 증오하던 마의 종주(宗主)마저 포함되어 있지 않던가?
게다가 결국 황준우가 천살을 넘어 만살(萬殺)을 이룩하게 만든 데에는 분명 본인들의 지대한 공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쥐뿔, 불경 왼다고 네놈이 저지른 죄는 죄가 아니게 되나.”
“소승 역시 언제고 달게 벌을 받게 되겠지요.”
염주를 굴리며 답하는 원공을 향해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낸 황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됐어. 그렇게 싸우기 싫다고 했는데…… 결국 댁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십 놈에 끼어 버렸지. 이제는 구 놈이지만.”
“악연인 게지요…….”
“인연이 될 수도 있었겠지.”
원공의 입가로 쓴웃음이 떠오를 때였다.
“말이 많군. 이러려고 여기까지 뛰어 내려온 건가, 칠야무신?”
긴 머리에 검은 도포, 용이 비상하는 듯한 무늬가 새겨진 한 자루 묵검(墨劍)을 뽑아 든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네놈도 알 것 같다. 네가 바로 그놈이지? 천마(天魔)라는 되도 않는 오만한 별호를 쓰는 지서(地鼠) 새끼.”
“……!”
“천년 묵은 묵철로 만든 검만 있으면 못 벨 게 없다고 그렇게 떵떵거리고 다녔으면서 보름을 넘게 도망만 다녀? 퉤, 겁쟁이 새끼. 네놈은 낚싯바늘에 꿰는 토룡(土龍)만도 못한 놈이야. 알아?”
“죽여 버리겠다!”
“말 많네. 말만 하지 말고 덤벼.”
“크아악-!”
천마가 달려들자 그를 따르는 마종(魔種) 계열의 또 다른 우내십존 삼인(三人)이 함께 몸을 날린다. 순식간에 황준우의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하늘과 땅이 뒤바뀌듯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마종 계열의 무인들이 자랑하는 마공(魔功)이다.
대다수의 무인들이 이 혼란 속에 빠져 제대로 된 대항조차 하지 못해 죽곤 하지만, 만약 고작 그 정도였다면 황준우는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
“어디서 잔재주를!”
팔을 풍차처럼 길게 휘둘러 마구잡이로 뒤틀리는 세상의 일부를 종잇조각 찢듯 벌려 버린 황준우가 주먹을 내뻗는다. 그 틈새로 달려들던 무인 중 하나가 눈을 부릅뜬 채 시신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땅속에도 한 놈!”
뒤이어, 황준우가 발로 땅을 강하게 내려치자 그 아래에서부터 붉은 핏물이 지면으로 새어 나왔다.
“마지막 두 놈은 함께로구먼!”
벼락같이 휘둘러진 주먹이 이번에는 하늘을 향했다.
“크아악-!”
혼란스럽던 공간이 깨어지고, 두 무인 중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으로 핏물을 흩뿌렸다.
묵검을 들어 힘겹게 황준우의 주먹을 막은 천마의 얼굴은 새하얗게 떠오른 채였다.
“그래도 천마라고……!”
비웃음을 보이는 황준우를 향해 예상치 못한 공격이 이어졌다.
“아미타불!”
커다란 불호와 함께 내뻗어진 원공의 장법을 어깨로 받아 낸 황준우의 시선이 홱 하니 돌아갔다.
그의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검을 쓰는 신선을 닮은 무인이었다.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이라고도 불리는 검선(劍仙)은 불성과 함께 우내십존 중 제일가는 고수로 뽑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검에 담긴 그 현기(玄機)는 황준우조차도 감탄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 검에 찔려 죽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죽인다.’
이미 마음에 검을 세운 황준우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주먹을 내뻗어 날카롭게 솟은 검 끝과 마주한다.
검과 주먹.
본래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대결이다.
인간의 주먹이 예기가 어린 검 끝을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말이다.
하나 결과는 반대로 드러났다.
우그극-!
검극이 뭉개지고 검선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째재쟁-!
끝내 견디지 못한 검이 유리알처럼 부서져 파편이 튀어 오른 이후에는 그를 비켜 내지 못한 검선이 핏물을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말했지? 모두 죽을 각오……!”
우내십존 중 제일이라 뽑히는 불성과 검선 모두를 쓰러트린 황준우가 눈에 불을 뿜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황금빛 기운으로 감싼 원공이 무서운 속도로 뛰어 들어와 황준우의 허리를 양팔로 휘감는다.
“어디서……!”
헛짓거리라며 원공의 허리를 향해 주먹을 내뻗은 황준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서지지 않는다.
옛 인연 따위 모두 무시하고 단숨에 죽이려는 심사로 내뻗은 주먹이었는데 원공의 허리는 묵철보다도 단단하다는 만년한철로 감싸진 것처럼 꼼짝하지를 않았다.
“으어어어-!”
비명을 내지르며 황소처럼 황준우를 밀어붙이기 시작한 원공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자연스레 허리가 붙잡힌 황준우 역시 떠밀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어디서 헛수작을!”
꽝-! 꽝-! 꽝-!
계속해서 주먹과 발을 내질러 원공의 머리, 목, 배 할 것 없이 연속으로 가격하는 황준우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 무슨……!’
제법 익힌 무공으로 중원에 나서 험난한 생활을 거치다 보니 작은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
천조칠무(天操七武).
하늘조차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무공으로 소성(小成)을 이루었으니 천하에 적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바.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만 명이나 되는 무인을 홀로 감당해 냈다. 우내십존이라 불리던 중원의 뛰어난 고수들도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소림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불성만이 그의 허리를 휘어잡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를 밀어붙이고 있다.
‘내 천조칠무가 부족한가?’
분명 그의 무공은 원공을 앞서고 있다.
애초부터 원공이 홀로 그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만한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용없을 것이오, 시주. 지금 소승의 몸은 부처님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바. 현세에 존재하는 힘으로는 해할 수 없소이다.”
“그 무슨 개소리야!?”
“죽을 각오가 되었냐고 묻지 않았소? 당연하지만, 목숨을 걸었소.”
계속해서 거친 공격을 퍼붓는 황준우를 향해 묘한 웃음을 보인 원공이 말을 잇는다.
“열반에 들기 전 우연치 않게 잡았던 깨달음의 감각을 이리 사용할 줄은 몰랐구려, 시주.”
“아, 아아…… 놔! 놓으란 말이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무공을 정식으로 익힌 이후 처음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황준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력, 내력이 조금 더 있으면……!’
물리적인 힘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 전과 같이 뇌전의 힘을 끌어오면 된다. 뇌전은 하늘의 힘. 아무리 황금으로 물든 원공이라 한들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나 당장은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산처럼 많은 무인들과 싸우며 힘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온몸을 가득 채웠던 내력도 이제는 거의 밑바닥.
때문에 싸움을 빨리 끝내려 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혀 버렸다.
‘아, 설마……!’
처음 원공과 만났던 날.
기분 좋은 마음에 술에 취해 자신의 무공에 대해 그리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었지 않던가?
천조칠무는 가히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칭할 만하다.
단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내력의 소모가 일반적인 무공을 월등히 앞선다는 것. 때문에 싸움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순간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그조차도 상관없을 정도로 황준우의 내력이 많기에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일만의 무인과 싸운 뒤라면 다르다.
애초부터 원공은 이때만을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만 끝을 맺어야겠지요.”
어느덧 다시 장백산 정상으로 올라 드넓은 천지를 향해 몸을 날린 원공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비록 내 힘이 부족하여 시주를 온연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만둬! 그만두란 말이야! 대체 무슨 짓이야, 원공!”
“부디 여생은, 편히 지내시길 바라겠소.”
파아앗-!
어느덧 육신은 사라지고 온연한 황금빛이 된 원공이 황준우의 온몸을 휘감는다.
물컹하고도 기이한 감각.
점점 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놀라운 시선으로 자신과 원공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에 조소(嘲笑)가 비쳤다.
‘어리……석은…….’
무공이 강하다고 너무 자만했다.
억울한 자들을 돕겠다는 것은 어쩌면 변명이었을 뿐.
‘뽐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완전히……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된 셈인가.’
원공의 힘에 갇혀 조금씩 무력해지며 굳어 가는 자신과 돌산에 갇힌 제천대성과 다름이 없다 생각한 황준우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시야는 완전히 어둠으로 침식되었다.
사실 불쾌할 줄만 알았다.
끈적끈적하고,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고.
분명 그 모든 것은 사실이지만 불쾌하지만은 않다.
‘불제자의 품이라 그런가?’
그렇다 하여도 기왕이면 어여쁜 비구니였으면 조금 더 나았을 텐데, 같은 헛생각을 하며 헛웃음 짓던 황준우의 머리가 갑자기 아려 왔다. 무언가가 강한 힘이 머리 양옆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짓누르는 지독한 느낌이다.
‘제천대성을 닮았다 말했더니, 이번에는 금고아인가!’
생각보다 편하다고 생각했던 데에 대한 벌인지도 몰랐다.
‘으아아! 빌어먹을-!’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찾아온 것은 놀랍게도 밝은 빛이었다.
고통이 점점 사라져 간다.
대신하여 시원한 해방감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함께 찾아온다.
흐릿한 시선 위로는 사람의 얼굴을 닮은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사내! 사내아이입니다!”
“정말이요!?”
아니, 진짜 사람이었다.
너무나 기쁜 목소리로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알아들으며 놀라던 무렵.
누군가 자신의 엉덩이를 강하게 두들기는 충격이 전해졌다.
‘아파-!’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 고통에 마음속에서부터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제 입 바깥으로는 상상도 못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울음소리.
그 뒤로 주변을 다시금 휘감는 웃음소리에 황준우는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대명제국(大明帝國), 영락제(永樂帝) 제위 십 년(十年)이 되던 해.
소년 황준우가 다시금 태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