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0화
“알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모름지기 공부의 기초란 복습과 예습. 그런 의미에 있어 숙제야말로 최고의 효율을 내는 기초가 아니겠습니까. 다 도련님께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니 이해해 주시지요.”
“…….”
전생의 황준우 역시 그러했지만 다시 태어난 황준우 역시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덕분인지 백교의 확실한 논리에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버린다.
“자자, 많이도 바라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어제 배우신 입교 오 편까지만 다시 복습하고 오시면 됩니다.”
“끙…….”
굳이 알고 있는 걸 다시 익혀야 되는가 싶다가도, 잔잔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백교의 눈을 보니 입이 열리지가 않는다.
결국 한숨을 쉰 황준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후후. 그럼 이 주야 뒤에 뵙겠습니다, 도련님.”
활짝 핀 웃음을 보인 백교가 답했다.
다시 태어난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한 사실은 황준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답지 않게 변했다고 할까.’
아니, 어쩌면 전생의 황준우야말로 진짜 황준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천애고아.
일찍 죽은 스승에, 홀로 살아남아야만 했던 어린아이.
거칠고,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나 다시 태어난 황준우의 환경은 완전한 정반대였다.
커다란 울타리가 있고, 진짜 아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껏 응석 부려도 된다.
‘물론 진짜 아이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부모님이란 존재가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굳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옆에서 보아 온 늙은 유모라든가 경호, 시녀들. 게다가 이제 처음 본 스승인 백교 역시, 조금 난감하긴 하지만 그를 아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이 풍족하게 차오르는 것이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거칠기만 하던 황준우란 사내가 이렇게나 변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하나 전생의 기억이 있음을 떠올리자면 또 모순적인 일이다.
적어도 일개 글 선생에게 기가 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황준우는 그 답을 오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
결국 그게 정답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하여도, 기억이 있다 하여도 작금의 황준우는 힘없고 작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물론 일반 어린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내공으로 가지고 있지만 천조신공의 특성상 그것이 겉으로 발휘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 말해 황준우 본인이 그냥 어린아이라는 것뿐이다.
‘전생의 기억을 가졌다 한들 결국 육신이 어린아이니.’
심신일체(心身一體).
결국 마음 역시 몸을 따라가기 마련.
부정하려 한들 본인이 아직 십 세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이거늘 어찌 어른의 기를 이길 수 있겠는가? 황준우는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의 난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야.’
직후, 황준우는 깜짝 놀랐다. 단순히 그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인데 천조신공의 흐름에 놀랍도록 큰 변화가 생긴 탓이었다.
‘이것 봐라?’
천조신공의 내공은 본래부터 자유로운 편이었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애초부터 자연의 기운을 정수에 가깝게 그대로 품은 것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천조신공의 속성은 언제나 늘 황준우를 닮아 있었다.
이번 역시 그랬다.
본래 새로 태어난 이후 황준우의 천조신공은 언제나 잔잔했다.
고요한 호수 같달까.
평온한 마음에 행복이라는 충족감이 가득 차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한데 순식간에 그 고요한 물이 난장판이 되었다.
진짜 어린아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날뛰며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린다.
그렇다고 하여 황준우의 몸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날뛰지만 공격하지는 않는다. 단지 호기심 왕성한 어린아이처럼 온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덕분에 변화한 천조신공은 황준우에게 있어 큰 이득을 가져오고 있었다.
‘내가 본래 사용하지 못하던 세세한 혈도들까지 모두 깨우고 있어.’
천조신공은 본래 인체에 존재하는 모든 혈도에 내력을 쌓을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하나 전생도 그렇고 현생도 그렇고 황준우가 그러한 혈도 모두를 사용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한계랄까?
전체 기준에서 따지자면 전생에는 절반 정도까지 사용할 수 있었으며, 새로 태어난 이후로는 그 반절 정도를 깨운 상태였다.
한데 새로이 변한 천조신공이 빠른 속도로 몸을 회전하며 아직 잠들어 있던 혈도를 깨우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 내력이 쌓인 것은 아니지만 한 번 통로를 열면 내력을 쌓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길을 열면 성인이 되었을 쯤에는 정말 육백칠십구 개의 혈도를 모두 사용할 수 있을지도.’
운이 좋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놀던 내력이 뇌에까지 닿아 상단전을 일깨울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좋은 변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사실만으로 황준우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크게 짙어졌다.
무공이란 무를 갈고닦아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란 무엇일까?
먼 과거, 태초의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들로부터 벗어나 생존을 위해 무를 갈고닦아야만 했다. 두 다리를 뻗어 더 빨리, 더 멀리 달리기를 원했다. 양팔과 양손에는 강인한 힘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의 시작.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인간은 도구를 발견하였고 내공이라는 신비로운 힘을 얻었다.
처음을 잊어 갔다.
시작을 묻어 버렸다.
덕분에 작금의 무림에 있어 진짜 무를 익힌 무인의 수는 극히 드물게 되었다.
내공과 무기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아무리 대단한 천조신공을 익혔다 하여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황준우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매일 오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의 운동을 행했다. 적당한 자극은 빠르고 단단한 성장을 만들어 낸다.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땅을 다지는 일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황준우의 행동은 아버지, 황석후의 관심을 샀으나 딱 그 정도였다. 해(害)가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황석후는 어지간하여서는 황준우의 성장과 행동에 큰 간섭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황석후가 유일하게 큰 간섭을 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부다.
“끄응…….”
책상에 앉아 홀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황준우의 뒷모습을 문 틈새로 몰래 바라보는 황석후의 입가로 뿌듯한 미소가 걸린다. 혹여나 방해가 될까, 조심스레 훔쳐보던 문을 조용히 닫은 후 떠나려는 황석후를 향해 경호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댄 황석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뒷짐을 쥔 채, 인사하는 경호를 향해 손짓만을 보인 황석후의 옆을 곁에서 지켜보던 서시가 따랐다.
“큼…….”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짧게 헛기침을 흘린 황석후의 입가로 더욱 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크게 될 게야. 암, 크게 되고말고.”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황석후의 말에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음을 흘린 서시가 물었다.
“호호, 우아가 공부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아무렴, 좋다마다요. 우리 가문에도 드디어 학문으로 소문난 명사(名士)가 날 수 있는 기회 아니오!”
만금장은 소주제일의 소문난 상가다.
벌써 오 대째.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중원 내에서, 그것도 가장 황금이 많이 모인다는 소주에서도 제일을 자처하며 인심과 덕망을 쌓은 만금장은 중원의 호사가들 입 사이를 오르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굳이 나열하려 한다면 책 열 권이 모자랄지도 모를 이야기다. 하나 그중 학문과 관련이 있는 것은 몇 없다. 개중에서도 학문으로서 소문난 ‘인물’이 나온 적 또한 없었다.
애초에 황씨 일가의 씨가 귀한 탓이 컸다.
만금장을 세운 시조인 황씨 남매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동생을 가진 황준우의 경우는 감히 매우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황씨 가문은 언제나 가업(家業)을 잇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황준우는 다르다. 아직 어리지만 여동생인 황서연이 있다. 물론 황준우가 본인이 가업을 물려받고자 한다면 그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황준우가 지금처럼 무를 추구하는 바도 반대만은 하지 않았다.
다만 선택의 여지는 넓게 주고 싶었다.
황씨 일가를 빛내 줄 학사가 되기를 바라는 바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겪고 그중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찾길 원했다.
굳이 황준우뿐만이 아니라 황서연에게도 내년부터는 이것저것 원하는 바를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문과 무가 차별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작금의 명(明)은 크게 부흥하여 외부와 내부의 화합이 탄탄하게 맞물려 훌륭하게 융성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길을 가든 건강하고 훌륭하게만 자란다면 황석후는 만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너무 고집만 부리지는 마세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요.”
혹시나 하는 서시의 걱정된 음성에 황석후는 미소로 응답했다.
“당연한 일이오. 언제나 아이들이 건강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착하게 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호호, 역시 가가. 고지식하지 않아서 좋아요.”
밝게 웃는 서시를 바라보는 황석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되었음에도, 미녀가 많다는 소주 내에서도 감히 제일을 뽐내는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웃을 때에 가장 아름다웠다. 침어낙안(沈漁落雁)의 서시라는 이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서시봉심(西施捧心). 설령 시 매가 눈매를 찌푸리고 한숨을 토해도 내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울 게요.”
“가가도 정말…….”
둘만의 복도에 서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황석후가 서시의 허리를 끌어안아 짧은 입맞춤을 나눈다.
부부의 밀어(密語)가 오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양팔을 하늘 높이 길게 뻗은 황준우의 시선이 굳게 닫힌 방문을 향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검은 인영이 하나뿐이다.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던 또 다른 두 기척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드디어 가셨나?’
지겹고도 지겨운 인내의 시간이었다.
확신이 선 순간 망설임 없이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책장을 강하게 덮은 황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은 무리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바깥으로 나서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가 놀란 시선을 보인다.
“도련님?”
“어, 경호.”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놀러.”
황준우의 대답은 확고했다.
경호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물러나면 또 경호가 아니었다.
“아직 다짐하신 오시(午時)까지는 한참 남았습니다.”
“원래 다짐은 깨라고 있는 거야, 경호. 모르는구나?”
“제가 알기론 다짐이란 것이 그렇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허, 말 많다!”
뒷짐을 지며 헛기침마저 토하는 황준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경호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고작 일곱 살 아닌가? 그런데 하는 행동을 보고 있자면 이미 어른이라도 된 듯하다.
‘장주님을 따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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