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1화
자식은 아버지를 보고 배운다니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경호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한데 장주님은 한 번 업무를 보시면 진득이 앉아 계시는 편인데…….’
황준우는 도무지 엉덩이 붙이고 있는 것을 잘 못한다. 가끔 무술 수련을 한다며 연무장에 서 있을 때는 지붕이 무너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점을 생각하면, 집중력이 모자라다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알 수가 없네.’
어려서부터 모셔 온 작은 도련님은 정말 의문투성이였다. 심지어 의외성도 넘쳤다.
‘이러다가도 또 무슨 사고를 치실지…….’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는 경호를 잠시 곁눈질로 바라 본 황준우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아버지, 어머니도 방금 오셨다 가셨잖아? 한동안은 굳이 신경 안 쓰실 거라고.”
걱정만 가득하던 경호의 얼굴에 질렸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이걸 노리셨던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시끄러워, 경호! 그러다가 어머니 아버지가 쫓아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런 경호를 향해 오히려 핀잔을 준 황준우가 다시 뒷짐을 진다. 이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경호, 저기 너랑 닮은 표정 짓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던 경호의 시선이 황준우의 손가락을 따라 정면을 향했다. 무슨 사고라도 쳤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는 시녀였다.
“제가 저런 표정입니까?”
“비슷해. 어?”
짧게 답하며 시선을 거둔 황준우의 시선이 그 뒤를 곧바로 따르는 또 다른 시녀에게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시녀의 손을 잡고 있는 황서연을 발견했다.
“연아!”
제 여동생을 향해 기쁜 목소리를 흘린 황준우가 양팔을 벌리며 뛰어간다.
“오빠다!”
황서연 역시 그런 황준우를 발견했는지 활짝 핀 미소를 보인 채 뛰어와 품에 안긴다.
감격적인(?) 두 남매의 상봉을 멍하니 바라보던 경호와 시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짧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사랑하는 여동생을 품에서 살짝 떨어트리며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 황준우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아침에 밥 먹었을 때보다 키가 좀 더 큰 것 같은걸?”
“진짜?”
황서연이 보석과도 같은 큼지막한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린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더욱더 흐뭇한 미소를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당연하지. 어이구, 귀엽기도 해라. 그나저나…….”
잠시 황서연에게서 시선을 떼며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오던 시녀를 바라본 황준우가 묻는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
“아, 그게…… 장을 보러 가는 길인데 아가씨께서 따라오고 싶다고 하셔서…….”
“장? 장은 갑자기 왜?”
“오늘이 칠 주야에 한 번 있는 어시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렇구먼. 어시장이라. 확실히 생선은 신선해야 맛있는 법이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황준우와 달리, 경호는 시녀를 향해 걱정된 시선을 보냈다.
“두 분이서만 가십니까?”
고작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의 외출이다. 떼를 쓸 만큼 어리고, 예측하기도 힘들다. 시장과 같이 복잡한 장소에 데려갔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큰 경을 치게 될 터. 당연하다 싶은 경호의 걱정에 시녀가 작은 웃음을 보였다.
“장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아…….”
시녀의 말에 살짝 민망한 신음을 흘린 경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애초에 황석후의 허락도 없이 황서연과 그런 장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 장원 문밖을 나서는 순간 그녀를 지키기 위한 호위무사들이 기척을 감춘 채 따라붙을 터다. 굳이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 어린 황서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수단이다. 여기서 또다시 경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역시 황준우의 행동이었다.
“좋아, 그러면 연이 오빠랑 같이 갈까?”
“진짜!? 좋아! 오빠랑 같이 갈래!”
“도련님?”
개나리꽃이 활짝 피는 것만 같은 밝은 미소를 보인 황서연의 손을 이미 꼭 잡은 황준우가 경호를 의아한 듯 바라본다.
“그…… 공부.”
“아까 한 말 잊었어? 날씨도 이렇게 좋고 우리 예쁜 동생도…….”
당당한 표정으로 경호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굳어진다. 그 연유는 오래지 않아, 경호의 등 뒤로 나타난 기척과 목소리에 의해 밝혀졌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구나.”
“장주님!”
“장주님을 뵙습니다!”
놀란 시녀가 목소리를 높이고, 경호가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그 사이 식은땀이 가득 흐르는 얼굴이 된 황준우가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피운다.
“간식을 전해주러 갔다 방에 없어 한참을 찾아다녔구나. 어디 가려는 길인 게냐?”
황석후의 물음은 딱히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겁거나 분위기를 뒤바뀐 것도 아니다.
한데도 어째서인지 위협적이다.
“어, 음…… 그게…… 잠시 그냥 산책 정도를…….”
“오호, 시장까지 말이냐?”
“…….”
마치 뱀 앞의 개구리가 된 마냥 바짝 굳은 황준우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경호의 입가로 감출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도련님이 아무리 막무가내라고 해도 일곱 살이라는 말이지.’
저 나이 또래에는 아버지가 제일 무서운 법이다.
“내가 네 운신의 자유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공부가 싫어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아들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란다.”
“그, 그렇죠?”
“오시까지는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다짐까지도 하지 않았더냐. 상인에게 있어 신뢰란 목숨보다 귀중한 것일진대 어찌 네가…… 휴우.”
짧게 한숨을 내쉰 황석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뭐. 수가 있겠느냐. 네가 오죽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다녀와라. 다만 내일부터 백 선생에게…….”
“아버지이-!”
백교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창백한 표정이 되어 목소리를 높인 황준우가 양 주먹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불민한 아들이 배움이 부족하여 잠시 잊었습니다. 약속이란 소중한 것. 신뢰란 목숨처럼 여겨 꼭 지켜야지요. 크게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해야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 빠른 실천이 정답 아니겠습니까? 아들은 다시 공부를 하러 돌아가 보려 합니다.”
그 말과 함께 연이의 손을 살짝 놓은 황준우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연이야, 시장은 혼자 다녀와야겠구나.”
“오빠, 안 가?”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 황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응. 이 오빠는 공부가 매우 소중하거든.”
황준우가 황서연에 이어, 황석후의 두 눈을 뻔히 바라보며 말한다.
그 모습에 흐릿한 웃음을 지은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내일 굳이 백 선생과 면담을 할 필요는 없겠구나. 다만 약속은 잘 지켜져야겠지.”
“물론입니다. 아버지. 그럼 이만 불민한 아들, 진짜로 공부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럼 저도 쫓아가겠습니다. 장주님!”
황준우가 돌아서고 빠르게 인사한 경호가 그 뒤를 쫓는다.
“힝…….”
“다음에는 꼭 같이 가줄 터니 너무 섭섭해 말거라.”
황서연이 잠시 아쉬운 눈을 빛냈지만 황석후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오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면 장주님 저도 이만 시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아, 어서 가보시게.”
다급해 보이는 시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황석후가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을 무서워하며 곧장 태도가 바뀌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고작 일곱 살로 볼 수 없는 아들의 어투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녀석, 대체 저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건지…….”
기실 방금이 아니더라도, 황준우는 가끔씩 저런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는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석후는 반대의 경우였다.
“흠…… 벌써 저리 말재간을 좋은 것을 보니, 역시 내 아들은 천재인 게 분명해.”
혼잣말은 아니었다.
황석후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호위하는 사방위(四方衛)가 숨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석후가 그들에게 굳이 침묵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학문의 대가가 나오는 거야. 허허허. 내 아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영특한 것 아닌가? 하하하! 대답 좀 해보게, 흑표.”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진 팔불출 아버지의 자식 자랑에는 끝끝내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소주는 천하에서도 내놓으라 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시를 감싼 물길, 그 위를 떠다니는 배들과 아름다운 길에 늘어선 고층 건물까지.
예로부터 천하의 길은 북마남선(北馬南船)으로 이어진다 하는 넓은 대륙에서, 남측에 위치하여 수상물류의 시작점과 다름이 없는 소주는 가난한 이보다 부자가 더 흔하다는 다소 특이한 도시일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도시의 규모가 또 엄청나지는 않아 아쉬운 면모가 많았는데, 때문에 소주에서 나고 항주에서 자라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장성한 사내들의 말일 뿐.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온갖 신기한 것투성이로 가득한 황서연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건물들과 물길, 수많은 사람들까지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와아-!”
“우와아-!”
“우화아아-!”
등의 환호성을 연신 내지르는 황서연의 손을 꼭 잡은 시녀, 재향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우실까?’
둘째라서 그럴까? 아니면 딸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 도련님이 이상한 건가?’
분명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것은 같은데 황준우와 황서연은 무언가 다르다. 굳이 말로 할 수 없는 기묘한 차이점이다. 분명 외모로는 둘 다 어머니를 닮아 부족함이 없고, 곱기도 참 고운데 이상한 느낌이다.
자식을 키워보기는커녕, 아직까지 남자조차 알지 못하는 처녀, 재향으로서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때문에 그녀는 만약 나중에 자식을 낳는다면 꼭 딸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작고 깜찍한 황서연의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려오고는 할 정도다.
딱히 불쾌하거나 슬픈 탓이 아니라,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심장이 아프다니! 일반적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한데 재향은 어린 시절부터 황서연을 보며 그런 경험을 자주하고는 했다.
두툼한 볼살을 건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혹여 힘주어 손을 잡으면 부러질까 걱정되는 탓에 긴장도 하게 된다.
결국 재향에게 있어 황서연과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은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황석후 역시 그런 재향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가깝게 황서연의 옆에 붙여 놓은 것이다.
하나 잠마저 황서연의 옆에서 자곤 하는 재향이라고 해도 십이시 모든 하루를 황서연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때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잠시나마 떨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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