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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5화 (15/373)

학사재생 15화

“그만두게나.”

전이명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길을 막아서고 있던 네 사람의 틈새로 굳은 얼굴의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 터벅.

걸음은 느리다.

얼굴 역시 평온하기 그지없다.

뒷짐을 쥔 채 다가오는 그를 본 순간 전이명은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이라는 것을 절실히 체감했다. 다가오는데 입을 열 수조차 없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도 힘들다.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중년 사내가 바로 그다.

‘소주대인!’

소문으로는 그저 인심 좋은 상인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한데 실제로 본 소주대인은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무섭다. 거대한 산악을 닮은 그가 다가오자 하늘의 햇빛마저 가려지는 것 같았다.

“아아…….”

저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흘린 전이명의 손이 무겁게 떨어졌다. 어느덧 그의 눈앞으로 다가온 황석후를 보는 고개가 절로 떨어진다.

“아빠?”

소리를 지르던 황서연마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바라본다.

“딸아이를 이리 주게.”

언령(言令)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할까?

마치 인형이라도 된 듯 그의 명에 따라 떨리는 손끝으로 황서연을 건넨 전이명의 눈이 질끈 감겼다.

‘끝났다.’

사신위의 등장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주대인 황석후.

그가 등장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었다.

“왜 그랬나?”

황석후가 물었다.

“몰랐…… 소.”

“왜 나의 아이를 납치했냐고 물은 게 아닐세.”

“…….”

“어찌하여 어린아이에까지 손을 뻗었는가? 그리 극악무도해지면서까지 원하는 게 있었던 겐가?”

“난…… 우리는 단지…….”

“악당일 뿐이지. 변명할 생각 하지 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석후가 아니었다.

어느덧 흐름의 중심으로 파고든 황준우가 서늘한 시선으로 전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석후를 비롯하여, 사신위마저 놀란 시선으로 그런 황준우를 잠시 바라본다.

“서연이는 괜찮아요?”

“무사하다.”

“오빠.”

황석후의 품에 안겨 조심스럽게 몸을 움츠리고 있던 황서연이 고개를 들어 황준우를 바라본다. 억지로라도 싱긋 웃어 보이려는 애쓰는 모습에 황준우 역시 작은 미소를 보였다.

“우리 연이, 어디 아프지는 않아?”

“괜찮아. 난 괜찮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황석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황서연의 손을 부여잡은 황준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황준우의 주먹이 곧장 전이명을 향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속도다.

비명을 내지른 후, 허벅지를 부여잡은 전이명의 턱에 솟아오른 황준우의 주먹이 직격한 것도 순식간이었다.

“크아악-!”

턱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전이명의 신영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그만. 제발 그만…… 꺼억-!”

“절대로 용서 못 해.”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전이명의 배를 짓누른 황준우가 서늘한 시선을 흘렸다. 아쉬운 점은 더한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쓰러진 전이명을 놓아둔 채, 황준우의 걸음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설 때였다.

“준우야.”

황석후가 그런 황준우를 부른다.

그 내용을 익히 짐작한 황준우가 고개를 돌려 안도의 미소를 보이려는 순간이었다.

“너는 고작 일곱 살일 뿐이다.”

“……어?”

차분한 황석후의 말에,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알고 있었다.

그 말대로 황준우는 아직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한데 왜 이제 와서 그 말이 새삼스럽게 들리는 걸까?

그제야 몸이 어딘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무리했다.

천조신공의 사단공을 이룩하고, 기억하고 있는 천조칠무를 펼친다지만 황석후의 말대로 고작 일곱 살의 육체다.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리 절세신공이라 하여도 소년의 육체가 무공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쉬어도 돼. 뒤는 내가 해결하마.”

황석후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싶은 순간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리던 전이명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지 근맥이 완전히 절단됐어.’

이제 전이명은 눈을 뜨더라도 더 이상 무인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조차 살아가기 힘든 꼴이 될 터였다.

일곱 살의 황준우로는 쫓을 수조차 없는 놀라운 솜씨였다.

보여준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조숙한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더 믿고 의지하라고 외친 것이다.

“나라고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우리 아들은 고작 일곱 살일 뿐인데…….”

“…….”

황석후의 설득이 이어지면 질수록, 육체 역시 그만 쉬라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는 이런 고집 안 부릴게요.”

“준우야.”

“일곱 살 답지 않다는 것 알아요.”

육체와 정신의 괴리감.

갓난아이 시절부터 느꼈던 그 괴상함을 잘 안다. 황석후는 그런 황준우를 걱정하는 것이다. 아이가 너무 아이답지 않다. 어쩌면 황석후와 서시는, 황준우가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질까 더 두려운 것일 지도 몰랐다. 허상이라고 하여도 믿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실상 황준우 역시 그런 사실을 알기에 되도록 아이답게 행동하려고 했다.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육체를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그 뒤를 따르곤 했다.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하나 이번 사건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칠야무신이라 불리던 시절의 황준우가 끝도 없이 기어 올라온다. 그리고 그조차도 뒤덮는 분노라는 감정이 그를 옥죈다.

생에 처음, 전생과 재생을 모두 통하여도 없던 경험이다. 도움을 베푼 상대가 그를 향해 검을 뽑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손가락질을 할 때에도,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한 그 순간조차도 월등히 뛰어넘는 분노.

뜨겁다 못해 차갑다.

그리고 너무나 예리하다.

황준우를 천하공적으로 만들고 끝까지 몰아넣었던 우내십존에 대한 복수조차 포기했는데, 이것만큼은 어떻게 막아낼 자신이 없다.

동생이 납치당했다.

그리고 위협을 겪었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역시 참을 수 없다.

이런 수많은 감정을 토로해내고 싶다.

하나 마음속에 담긴 그 사실이 입 바깥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표현해야 할 방법을 몰랐다.

결국 황준우가 할 수 있던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빠라…….”

그 말과 함께 황준우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진다.

황서연을 품에 안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황석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백학!”

“연이를 부탁하네.”

놀란 눈을 뜨는 황서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황석후가 말했다.

“아빠도 오빠 따라 다녀오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어라.”

“싸우는 거야?”

“아마?”

“다치면 안 돼.”

“그러도록 하마. 우리 아이들은 누굴 닮아 이렇게들 영특하고 조숙한지 하하…….”

끝까지, 대견하기까지 한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황석후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정면을 바라본다. 눈빛이 바뀌었다.

‘오빠라…….’

황준우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감추는 것 많은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이라 걱정도 많았는데, 방금 그 말로 차라리 다 안심이 되어 버렸다. 조금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았다. 그 말대로 황준우는 황서연의 오빠였고.

‘내 아들이니까.’

황석후가 정면으로 몸을 날린다.

그 뒤를 백학을 제외한 세 명의 사신위가 빠르게 쫓았다.

황준우가 끝인 줄로만 알았는데, 뒤를 이은 만금장의 추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함께 나선 적리단원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버렸다. 믿었던 취개마저 허망한 눈으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 순간 구황이 검이 향한 곳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위기에 처한 고억 쪽이었다.

‘놈을 살려야 돼.’

평소에 가장 미워했던 놈이,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만 할 동료로 변했다.

구황 역시 만금장의 추격이 거세질수록 희망이 그뿐이라 여긴 것이다.

“흐흐…….”

그런 구황의 속내를 아는 것인지, 절뚝거리면서도 빠르게 뒤를 쫓는 고억이 웃는다.

“빌어먹을, 웃을 시간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속도를 높여라. 지금도 위험하다는 말이다.”

“힘내고 있우. 그래도 어쩌겠소, 이게 최선인데.”

“빌어먹을 놈.”

힘겹게 만금장 추격자들의 꼬리를 떨쳤지만 아직도 지근거리다. 당장에 따라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무엇보다 잠시 모습을 감춘 어린아이 쪽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가 더 무서운 지경이라니!’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억지로 마음 한 편에 쑤셔 담은 구황이 고억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음흉하게 가는 눈을 휘는 모습이다.

“몇이나 나가냐?”

그를 향해 구황이 물었다.

“무슨 말이오?”

“무게 말이다. 무게. 설마 이백 근이 넘지는 않겠지?”

얄팍한 인상과 다르게 고억은 상당한 거구였다.

“푸하하. 사람이 이백 근이 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얼마나 되는데?”

“대략 백육십 근 될 거요.”

“그거나, 그거나.”

“엄청난 차이 아니우? 한데 그건 왜 묻소? 설마 업어 주기라도 하시게?”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장가항까지만 가면…….”

“장가항까지만 가면?”

반문이 돌아왔다.

아직 앳된 목소리.

“애새끼!”

놀란 구황이 소리쳤고, 고억도 동그랗게 눈을 떴다.

동시에 고억의 눈앞에 불빛이 번뜩였다.

“악-!”

비명을 내지른 고억이 바닥을 구른다.

“고억!”

구황은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높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시끄러. 내 동생 건드리고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어느새 황준우는 구황의 눈앞으로까지 다가와 있었다.

‘역시 빨라!’

하나 다시 돌려 말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구황의 눈이 오묘한 빛을 흘렸다.

‘이거, 아까보다 많이 약한 것 같은데?’

속도도 위력도 느낌이 확 다르다.

‘지쳤군.’

구황은 단숨에 황준우의 상태를 파악했다.

태연한 척하지만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거친 숨결을 연달아 내뱉고 있다.

처음과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죽여주겠다, 꼬맹이!”

분노를 쏟아낸 구황이 검기를 흩뿌렸다.

처음에는 함께 주먹을 맞부딪쳤던 황준우가 살짝 몸을 비틀며 그 공격을 피한다.

“기력이 많이 부족하구나!”

“…….”

황준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무리한 상태로 여기까지 뛰어와 곧장 공격을 감행했다.

예상대로 선제공격으로 고억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더 난감했을 터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

‘용서 못 해. 적어도 이놈들만큼은…….’

척 보아도 눈앞의 구황이 두목이다.

황서연을 납치하라고 지시했을 인물.

얼떨결에 들었던 인상착의와도 일치한다.

‘죽인다.’

황준우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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