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화
이전까지는 힘을 아끼기 위해 손속에 여유를 두었지만 남은 것은 구황 하나뿐. 살인 자체는 애초에 황준우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 될지도 모르지만, 전생에는 수도 없이 해봤지 않던가?
“죽어라!”
구황 역시 황준우를 어린아이라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전력으로 싸운다.
서로의 공격이 맞부딪치는 적은 없었다.
피하고, 반격하고, 또다시 피한다.
마치 짜 맞춘 듯한 움직임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황준우의 눈썹 끝에 땀방울 하나가 흐릿하게 맺힐 때였다.
“아…….”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신음이 흘렀다.
“잡았다, 이놈!”
동시에, 기회를 잡은 구황의 검이 황준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격전 중, 처음으로 붉은 핏물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하나 구황은 의아함에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팔 한 짝을 베어버릴 각오로 검을 휘둘렀다.
한데 어깨 위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를 남겼을 뿐, 절단하지는 못했다.
‘검이 얕았나?’
어린아이의 신체를 배려하지 못해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구황을 향해 황준우가 조소를 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내 거리야.”
구황과의 격전 중 가장 황준우를 힘들게 했던 문제.
바로 거리의 차이다.
육체가 모두 성장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 엄청난 간격이 황준우를 괴롭게 했다.
검을 든 구황이 마치 창을 든 것보다 넓은 범위를 덮어오는 것 같은 기분.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덕분에 완전히 구황의 품에 파고든 황준우가 주먹을 내뻗는다.
“이건 내 어깨의 몫이다.”
“꺼억!”
주먹 끝에 뭉친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꼬이며 구황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비명을 내지른 구황의 몸이 반 이상 굽혀졌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은 상황.
구황은 기겁했다.
어린 황준우를 내려다볼 때는 알지 못했다.
사신(死神)이라고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서늘한 기운이 그의 두 눈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다 서연이 몫이야.”
주먹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며 구황의 전신을 때린다.
“크아악-!”
고개를 내젖히며, 비명을 토하고.
“꺼어억-!”
다시 허리를 숙이며 신음을 지르고.
“쿠에엑-!”
핏물을 쏟고 엎어지는 구황을 향해 땀에 흠뻑 젖은 황준우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린다.
구황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그의 정신과 육신은 꺾이다 못해 무너져 버렸다.
“으아아!”
쓰러져 있던 고억이 비명과 같은 고함과 함께 황준우의 뒤를 덮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네놈도 죽여 달라고?”
자신의 영역에 새 기척이 들어온 순간 이미 눈치채고 있던 황준우의 몸이 구름을 노닐듯 움직여 순식간에 고억의 뒤를 점한다.
그 역시 구황 못지않은 실력자였지만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 완벽한 기회라는 생각에 방심까지 했다. 황준우의 발이 그런 고억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찍어 눌렀다.
“끄아아악-!”
머리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고억의 괴로운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두 놈 다…….”
황준우는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말할 힘까지 아껴서 때린다.
“크악!”
“커억!”
때리고, 또 때려서 무너트린다.
몸을 벗어나 마음까지 짓이기는 것이다.
죽인다는 각오였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고된 싸움에 지친 어린 육체가 그의 각오를 받아들여 주지 못했다. 단번에 죽이기에는 힘과 체력이 모두 모자라다.
하지만 실상, 황준우는 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끔 만든다.
지금의 힘이면 딱 적당했다.
무자비한 폭력은 두 사람의 눈이 풀리고 바짓가랑이 사이로 누런 물이 흐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무리하는 와중에도 굳건히 버텨주던 황준우의 몸이 흔들렸다.
그런 황준우를 받아든 것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황석후였다. 황준우의, 오빠의 분노를 끝까지 지켜보아 주던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
“수고했다.”
무겁게 말하는 황석후를 보는 황준우의 눈이 떨렸다.
또 오기를 부리고 싶지만 이번에는 정말, 힘이 모자라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황준우는 황석후를 보며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대신…… 최대한 괴롭게…….”
“약속하마.”
고개를 주억인 황석후가, 흡족한 미소를 그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황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하다. 장해, 내 아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조금 거친 방식이었지만, 가족을 위한 그 마음만은 충분히 와 닿았다.
더 이상의 끔찍한 일은 실상 일곱 살의 어린 자식에게 맡길 일도 아니었다.
어른의 법도로써, 더욱 냉정하고 처절한 잣대가 필요한 때.
의식을 잃은 구황과 고억을 보는 황석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소주를 뒤덮었던 큰 사건이 지나갔다.
주민들 모두가 팔을 걷어붙였고 아가씨, 황서연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황석후는 그런 주민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큰 힘이 되었다는 그 별것 아닌 한 마디가 소주 주민들의 마음을 또 한 번 뭉클하게 만들었다. 매번 도움만 받던 처지에서 처음으로 그의 힘이 되어 봤다.
그 감격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소주의 주민들은 황서연을 구출했던 일을 마치 영웅담처럼 떠들었다. 누구 하나 그런 주민을 향해 나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러한 영웅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소주에는 더 큰 활기가 감돌았다.
구황과 고억을 비롯한 적리단원 대부분이 추살(追殺)되었다. 살아남은 몇몇 이들은 근맥이 절단되고 단전이 파괴되어 관아에 넘겨졌다. 평소의 소주대인답지 않은 무서운 처사였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처절한 삶을 부여한 것.
황석후는 그것으로 그들의 죄를 묻었다.
벌써 며칠째, 의식을 잃은 채로도 서로를 바라보고 누운 황준우와 황서연의 침상 옆.
걱정 가득한 표정의 흑표가 황석후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번 사태는 결코 작지 않았다.
자그마치 황서연, 만금장의 작은 아가씨가 납치당했다.
본래의 만금장을 생각하자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흑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있다 생각하여 깊이 통감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표면적으로 인근에 붙여 놓은 호위무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 하나 그들의 실력이 그렇게 믿음직하지 않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호위무사 혹은 시녀라는 명목하에 두 사람을 가장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따라붙은 것이다.
실질적인 호위 임무는 바로 흑표와 그의 직속 수하 집단 암표행(暗豹行)이 맡고 있었다.
현재 모종의 임무로 주요 전력이 빠져나가 대체 병력이 붙은 상황이었다지만, 이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때문에 흑표는 구출 작전이 끝난 이 시점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이번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경우가 아닌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만큼, 만금장을 노리는 세력은 많다.
그런 만큼 황석후를 비롯한 사신위 모두가 주요 임무의 호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신경 쓰고 있는 중이었다.
거대한 집단이 움직이면 그에 어울리는 벽을 세운다.
여태껏 그렇게 지켜왔고, 잘해냈다.
별것도 아닌 도적단은 사실 경우의 수에 속하지 않았다.
황석후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었다.
“하나…….”
“그보다, 준우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묻는 데 힘을 써주게.”
“청송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청송은 만금장의 사신위 중 가장 정보에 민감하다.
전문 정보단체만큼은 아니어도, 어린 일곱 살 소년의 말도 안 되는 활약쯤은 충분히 묻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도련님은…….”
“서시에게는 내가 이야기하겠네.”
“알겠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황석후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야기해야만 했다.
‘우리 아들이니까.’
두 사람의 자식이니까.
그리고 받아들일 준비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곤히 잠든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황석후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연히 쉽게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그의 아들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오히려 더 그를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특이하지만 황준우는 두 사람의 아들이고, 황서연의 오빠일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단순히 그것뿐 만으로도 따지고 보면 깊이 생각할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적어도 황석후에게 있어 가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저 어긋나지 않고, 잘 크기만 해다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는 짙은 따스함이 묻어 있었다.
황준우는 꿈을 꾸었다.
그를 살인자라 부르는 악령(惡靈)들이 쫓아오는 꿈.
‘맞아, 나는 살인자지.’
차라리 그 정도 표현이면 우습다.
세지는 않았지만 전생, 그의 손에 죽은 무인의 숫자가 어마어마한 것은 분명했다.
마지막 대전 당시, 그를 쫓아온 무인의 숫자만 해도 일만이 아니던가?
천살성(擅殺星) 혹은 광마(狂魔)라고 불리던 놈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물론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그의 강호였고, 나름이라지만 정의(情義)도 존재했다. 하나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은 짐 하나 없다면 그 또한 거짓이었다.
그 많은 사람의 원한과 피가 손에 묻었다.
꿈속까지 쫓아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살아온 삶의 흔적이니까, 지워지지는 않을 테다.
이제 와서 왜 이런 꿈을 꾸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서연이 납치당했을 때 느꼈던 감정.
그 괴로움과 분노.
황준우의 손에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은 이들의 심정이 그와 같지 않을까?
하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고개 숙인다고 달라질 일 또한 없다.
단지 그때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이번만큼은, 다시 얻은 기회만큼은 다르게 살고 싶다. 분명히, 많은 것이 달랐다. 복수라는 사소한 일 정도는 뒤로 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흡족한 재생(再生)이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들과 함께하고, 그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복잡하게 흔들리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지독한 악몽이 멀어졌다.
“괜찮아. 오빠는 나쁜 사람 아니야.”
누군가 그랬던가?
희망은 언제나 곁에 있는 법이라고.
눈을 떴을 때, 누구보다도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는 황서연을 바라본 황준우는 입가로 웃음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눈앞의 동생이, 가족들이 바로 그에게 희망이었다.
이름 없는 야산.
타오르는 모닥불을 마주 보고 앉은 두 청년이 있었다.
그중 왼쪽, 투박한 인상에 유난히도 단단해 보이는 일(一)자 입 매무새를 자랑하는 청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별일도 다 있네. 홍산, 네가 그런 것도 궁금해하고 말이야.”
오른쪽, 여자 여럿 울려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곱상한 외모를 한 청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묻는다. 왼쪽 사내, 홍산은 답이 없었다. 본래부터 그는 말이 잘 없는 편이었다. 오히려 이번 질문이 신비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는 게 맞았다.
“첫 만남이라……. 언제나 생각하지만 인연(因緣)이란 놈이 참 그래. 제멋대로 찾아오잖아? 기척도 없고, 소식도 없이.”
“…….”
전혀 이해 못 할 이야기라는 표현을 눈빛으로 전하는 홍산에게 청년은 참으로 잘났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똑같아. 그렇게 만났어. 정말 정신이 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을 때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났지.”
옆에 있는 장작을 들어 조금씩 줄어 가고 있는 모닥불 위로 던져 놓은 청년이 아련한 눈빛을 흘린다.
“그때가…… 열한 살 때였나?”
기억은 명확할 터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청년은 아주 어린 시절, 갓 태어났을 때의 기억조차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열한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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