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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7화 (17/373)

학사재생 17화

눈앞에 앉은 백교의 눈치를 보며 책장을 넘기던 황준우는 새삼스레 꽤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건 뒤로도 벌써 사 년이나 지났잖아.’

침상에만 누워 있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 것 같더니 막상 두 발로 걷고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시간이란 놈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 그동안 이룬 성과도 적지 않았다. 사 년 전 사건이 있은 이후 더욱 갈고닦은 천조신공은 벌써 오단공에 올랐다.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내공심법으로만 따지자면 전생의 경지를 모두 회복한 것이다. 물론 육체가 아직 어린아이의 그것이라 모든 힘을 소화할 수 없기에 완전히 전성기 때와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천조칠무를 펼치는 육체 자체가 아직 완벽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대단한 일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상태로도 당장 강호에 나가면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 중 오십 위 안에 뽑힐 정도였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고 육체가 성장을 거듭해 갈수록 그 순위는 자연스럽게 오른다. 천조칠무의 성취가 높아질 경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여기서 천조신공이 육단공에 도달하면?’

육단공은 아직까지 황준우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생각하기를, 아직 반절도 익히지 못한 천조칠무 만으로도 강호 전체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고수가 될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시간은 빠르게 흐르리라.

평화로운 가정 속에서의 일상은 늘어질 정도로 여유로우면서도 한시도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딱 한순간,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시간 무지하게 안 가네.’

살짝 눈을 돌려 아직도 중천에 걸려 있는 해를 바라 본 황준우가 저도 모르게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하암…….”

“…….”

정적이 흘렀다.

물론, 백교가 수업할 때가 아닌 자습 중에는 언제나 정적이 흐르곤 한다. 하나 지금의 정적은 분명히 달랐다.

‘크, 큰일 났다.’

백교를 본 지도 벌써 사 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황준우도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성격을 꽤나 파악해 냈다. 이 시점에 하품이라면 ‘공부가 쉬워서 지루하신가 봅니다’라는 말과 함께 지독한 새 과제가 떨어질 것이다. 지금의 황준우로서 딱, 하루 밤낮을 골치 아프게 머리를 싸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수준으로 맞춰 말이다. 차라리 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면 포기하고 만다.

하나 알 것 같은데 모르겠으면 호기심이 생긴다. 때로는 오기도 들었다. 모두 쓸데없는 승부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풀고야 마는 것이다. 길게 늘여 적었지만, 결국 괴로움은 황준우 본인의 몫이라는 말이었다.

“그, 그, 지루한 게 아닙니다. 그냥 조금 늘어져서…….”

백교의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반응한 황준우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 그러실 수도 있지요.”

다행히도 백교의 반응은 예상했던 종류가 아니었다.

덕분에 당황한 것은 황준우였지만 말이다.

“왜요?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황준우의 고개가 좌우로 세차게 내저어진다.

그럴 리가 있나!

“우후후, 그러면 됐습니다. 오늘은 이쯤하지요.”

“벌써?”

아직 해가 중천이다.

공부를 시작한 시간으로 따지자면 한 시진이 조금 안 된다. 약속한 반절도 채 되지 않아 백교가 먼저 수업을 끝낸 적은 지난 사 년 만에 처음이었다.

“혹시 싫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황준우가 확신에 차서 외치자,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후 웃음을 보인 백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조금 더…….”

“아닙니다!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왠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그려. 저랑 함께하는 수업이 그리 싫으셨습니까, 공자?”

백교가 아쉽다는 듯 부채를 내리며 닫힌 책장을 쓰다듬는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다시 펼칠 기세였다.

“농담입니다. 제가 설마 선생님과의 수업을 기피할 리가 있겠습니까.”

황준우가 신속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두 사람의 진중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깔깔! 저도 농담입니다, 농담. 참고로, 숙제도 없답니다.”

숙제도 없다고?

황준우의 머릿속에 점점 혼돈이 피어났다.

너무 백교답지 않다.

그래서 이상했다.

“숙제도 없다고요?”

“예, 이 주야 후면 공자의 열한 번째 생일이지 않습니까. 작은 선물 정도로 해 두지요.”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열한 번째 생일이 눈앞이다.

워낙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완전히 잊고 있던 일이었다.

“벌써라……. 가끔 보면 공자는 열한 살답지 않은 말을 자주 합니다, 후후.”

“그,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어찌 됐든, 짧은 방학 동안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이런 날은 흔치 않으니까요, 후후.”

농담 섞인 대화는 끝난 듯, 덮은 책을 품에 안은 백교가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바깥을 향했다.

진짜 수업이 끝났다.

숙제도 없다.

그제야 현실을 실감한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이게 진짜란 말이지?’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났다.

이제는 제법 적응됐다고는 하지만 본래부터 책상 앞 보다 연무장 안이 편한 황준우였다.

‘좋았어. 이 기회에 육체를 조금 더 단련해 두어야겠다.’

본래 천조신공의 육단공 부터는 천지인(天地人) 중 천(天)의 영역이었다. 신(身)보다는 심(心)이 우선시되는 경지. 하나 아직 미숙한 육체를 가진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모두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천조신공은 삼극의 조화를 궁극으로 하니 성장기에 있어 완벽한 육체를 만들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굳건해진다. 체력이라는 지반은 어떠한 무공에 있어서든 우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혼자서 할까? 아니지 역시…….’

들뜬 마음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황준우가 웃는 얼굴로 바깥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경호가 곧장 뒤를 따랐다.

“오늘 공부는 유익하셨습니까?”

“언제나 그렇듯 똑같지 뭐. 아, 방학이라는 점은 무지무지 좋다만, 흐흐.”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요.”

“당연히 좋지. 그나저나 생일이라고 해서 방학 같은 걸 주실 분은 아닌데…….”

“불안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조금 특별한 마음이 생기신 게 아닐까요?”

“그러려나.”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넘기던 황준우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가는눈은 어느덧 뒤에 선 경호를 향한다.

“경호 너…….”

“왜, 왜 그러십니까?”

“흠…….”

가는눈이 더욱더 가까이 온다.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살짝 뒷걸음질 친 경호가 재빨리 손을 크게 내저었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요!”

“솔직히 불어 봐. 생각해 보니 요즘 집안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조금 이상하단 말이야.”

무어라 딱 짚어 말하기는 뭐했다.

그냥 난잡하달까?

부산스럽달까?

하여튼 조금 정신이 없는 느낌이었다.

‘은근슬쩍 시녀들은 날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성격이 더러워서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나 황준우 본인은 스스로 말하긴 뭐하지만 고용주 입장에서 굉장히 선(善)한 편이었다. 딱히 구박을 하지도 않고, 괴상한 변태 행각은 더더욱 안한다. 쫓아다니며 시비를 거는 일은 오히려 사양이었다.

‘그런데 왜?’

역시 답은 경호에게 있다.

척 보아도 숨기는 게 많은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모릅니다! 아무것도요!”

“하늘에 걸고?”

“뭘 겁니까! 애도 아니고!”

“애인데.”

황준우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아직 지학도 되지 못하였으니 따지자면 애가 맞다.

“쳇, 절대 말 안 하겠다 이거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명령이야?”

“모릅니다.”

“아무것도?”

“……네.”

한숨을 쉰 황준우가 끝내 양손을 들며 포기했다.

‘뭐 큰일이야 있겠어.’

사소한 일쯤은 잊는 편이 좋다.

새로 태어난 이후 가벼운 마음으로 살고자 결심한 황준우가 머리를 떨쳐 내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위기를 넘겨 안도한 경호가 그 뒤를 빠르게 따른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몰라.”

“도련님?”

“아아, 정말 난 아무것도 몰라. 내가 어디 갈지 알 수가 없다니까.”

가볍고 편하게 살기로 했지만, 마음을 넓게 쓰고자 다짐한 적은 없는 황준우였다.

모른다고 해서 당황했지만 실상 황준우의 행선지는 대다수 정해진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여동생, 황서연의 방에 들른 후 곧장 연무장으로 향한다. 식사 시간과 공부할 때를 제외하자면 대부분 그 안에서 사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과거와 바뀐 점은 그 연무장에 혼자가 아닌 황서연과 함께라는 것이었다.

황준우의 말을 들은 황서연이 자의로 무공 수련에 나선 덕이다. 충격적이었던 사 년 전 사건 이후 두 사람 모두 심경의 변화가 제법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신비한 점은, 황서연에게 재능이란 것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만금장에 들어와 제법 무공을 갈고닦은 경호도 이대로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 황서연에게 따라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련님이야 뭐…….’

만금장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황석후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모두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분명 또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굳이 비교를 하려고 해도 그 차이의 벽이 너무 높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 있어 황서연의 재능은 경호에게 제법 경각심을 심어 주고 있었다.

‘호위무사인 내가 두 분보다 너무 부족해서야 체면이 안 살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홀로 연무장 한구석에서 무공 수련에 열을 올리는 경호를 보며 황준우의 눈에 고민이 어렸다.

‘저런 식으로 해서는 늘려면 한참 걸릴 텐데, 조만간 조금 도와줘야겠구먼.’

사람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옷이라는 게 있다.

무공도 그랬다.

그런 의미에 있어 지금 경호가 익힌 무공은 어울리지 않는 옷에 속했다.

“바쁘구먼, 바빠.”

읊조리는 황준우 앞에 어느덧 자세를 잡고 있는 황서연이 섰다.

“나 열심히 연습했어.”

“알고 있어.”

“자고 일어나서랑, 자기 전에 오빠가 시킨 것도 하루도 안 빠지고 다 했고.”

“장하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전 맥을 짚어 본 결과 단전 아래에 콩알보다 작은 내력이 느껴졌다. 비록 그 양은 작지만 단단하기는 굳건한 뿌리와 같다. 황준우가 천조신공을 손보아 황서연에게 맞게, 간략하게 만들어 준 선자기공(仙子氣功)이 가진 특별한 효능이었다.

선자기공은 내력을 쌓는 속도는 신공절학급에 미칠 만큼 빠르지 않지만 그 어떤 무공보다 단단하고 튼튼하게 지반을 다질 수 있다. 이는 내상으로부터 완벽히 황서연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독이나 만 가지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그 외로도 선자기공이 가진 효능은 많았다. 특히 여성의 미(美)를 가꾸어 주는 기능은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피부의 재생력을 높여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와 같은 촉감과 부드러움을 간직할 수 있으며, 잘못되었거나 미를 해칠 법한 체형은 스스로 자극하여 잡아낸다.

쉽게 설명하자면 무얼 먹어도 살이 일정 이상 찌지 않으며 훌륭한 근육을 키워 내고, 피부는 아이와도 같이 곱게 보존한다. 이는 분명 황준우의 의도가 들어간 사항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내 동생이니까.’

무슨 모습을 해도 제 눈에 가장 예쁠 사랑스러운 동생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길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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