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화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그저 놀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제법 영특한 황준우라고 하여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곳은 만금장이었다.
그리고 황씨 일가는 그러한 만금장의 주인이었다.
지방의 호족에서부터 무림세가, 흔히들 말하는 구대문파와 황가에서까지 그러한 만금장의 다음 대(代)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보는 데 귀추(歸趨)를 세우고 있었다. 상업 계열의 대다수에 손을 뻗고 있는 만금장의 돈은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어느덧 황준우도 열한 살. 베일에 쌓아 둔 채 언제까지고 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슬슬 공개하고 자리를 다지기 시작해야 할 시기다.
‘여러모로 정치나, 상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이르겠지.’
물론 열한 살이면 배울 나이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 하기 싫은 학문도 아버지의 부탁으로 하고 있는 마당에, 정치나 상업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그때가 되어서 알려 주어도 늦지 않다.
게다가 실상을 따지자면 지금의 만금장은 정치라면 모를까, 상업에 대한 것쯤은 아무렴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현재 만금장이 가진 돈은 주인인 황석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다면 그 돈은 더욱더 불어나리라.
누군가 추정하기를, 그 돈으로 천하를 산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오늘의 자리는 황준우를 그러한 만금장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공표다.
원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원한다면 언제든 쥘 수 있게 만든다.
결국 황석후의 생각은 간단했다. 거대한 만큼 욕심을 내는 이들도 많기에 보여 주는 자리가 필요하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나 그런 정치적 문제를 뒤로하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분명 따로 있었다.
“어찌 됐든 즐기거라. 오늘은 너의 날이다.”
“노력해 볼게요.”
황준우가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사람 머리만 한 크기면 성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야명주가 만금장 곳곳에 걸렸다. 그 행위에 장원 입구에서부터 모인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저 귀한 것이 이리 많다니.”
“과연 만금장!”
“배포부터가 천하제일입니다그려, 하하!”
만금장을 포함하여 달리 오대상단이라 불리는 또 다른 거부들이라 한들 넓은 장원 전체에 야명주를 거는 기행(奇行)을 토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야명주는 귀한 물건이었고, 그런 만큼 모두가 탐을 낸다. 이토록 사람이 많이 모이면 한 명쯤 흑심을 품고 욕심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나 만금장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해냈다. 심지어 야명주를 지키기 위한 무사 하나 놓아두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돕기 위해 이곳저곳에 시비와 시녀들이 줄을 서서 있을 뿐이다.
모두가 감탄하는 사이, 북소리가 낮고도 멀리 울려 퍼졌다. 이후 거대한 생일상을 차린 만금장의 현 주인, 황석후가 높은 단상 위로 올랐다.
“우선 먼 걸음으로 제 자식의 생일을 위해 행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황석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본 대로, 또는 듣던 대로 낮고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원 전체에 자리 잡은 모든 사람들의 귀에 쏙 들어왔다.
단순히 엄청난 정적이 내려앉은 탓이 아니다.
그저 밥이나 한 끼 얻어먹으로 온 일반적인 양민들은 생각했다.
‘과연 소주 대인! 범상치 않으신 분이다!’
흔히들 강호인, 혹은 무림인들이라 말하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주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듣던 대로 만금장주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구나. 우내십존을 다툴 수도 있을 정도라더니…….’
관, 혹은 궁(宮)에서 나온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생각을 했다.
‘단상에 올라온 것만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위엄(威嚴)이 가히 왕(王)에 못지않구나.’
결국 모두의 관점은 달랐지만, 최종적인 생각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 대(代)의 만금장은 명성에 흠이 없구나.’
상계에 몸담은 이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역시, 이번에도 넘어설 수 없겠구나.’
천하에는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는 다섯 개의 상단이 존재한다. 세인들은 그들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곤 하지만 상계에 몸담은 이들은 안다.
만금장만이 유일한 제일이다.
천하오대상단(天下五代商團)이라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는 다른 사대 상단이 만금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붙인 우스운 농지거리에 불과했다.
때문에 다른 사대상단은 만금장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인다면 언제든 그를 벗겨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드넓은 천하에 홀로 제일로 서 있는 만금장은 모두에게 부담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나 멀리서나마 다시 한 번 황석후를 확인한 사대상단의 주인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쉬워질까? 혹은 마음의 빈틈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만금장은 여전히 제일이었으며, 황석후는 그러한 제일상단의 주인으로서 차고 넘치는 대인이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두 자식이 있습니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죠.”
황석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어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원래 우리 황씨 일가 씨가 좀 귀한데, 제가 힘 좀 썼습니다.”
“와하하!”
“대단합니다, 만금장주!”
“과연 소주 대인!”
그 농담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모두를 잠시 지켜보다 가볍게 손을 들어 웃음소리를 멈춘 황석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은 저보다는 제 부인이 고생했지요.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어찌 됐든, 오늘은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 중 첫째의 열한 번째 생일입니다. 아들놈이지요.”
만금장의 아들.
그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소문으로 아들과 딸, 두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황석후는 둘 중 누가 가업을 잇는다 하여도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세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다음 대 만금장의 주인은 분명한 아들이다. 첫째니 명분도 있고, 둘째가 딸이니 더욱 공고하다. 모두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다들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고 함께 기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쓸데없는 말은 이쯤하고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준우야.”
황석후의 말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준우가 한숨을 쉬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좌중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황준우 하나에게로 고정되었다.
차기 만금장주.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아이.
혹은 경쟁자.
‘정말 견디기 힘드네.’
또다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른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속에 품은 마음이 어찌 됐든,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던가? 무릎을 굽혀, 그런 황준우와 눈을 마주한 황석후도 미소를 보였다.
“여러모로 힘들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번 목소리는 정말 황준우에게만 들릴 만큼 작았다.
하나 그 뒷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장원 내 모두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들.”
“축하합니다!”
황석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의 선창에 이어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단상 위로 올라온 서시가 그런 황준우를 품에 안아 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너무너무 축하해. 태워나 줘서 고마워, 아들.”
“연이도 오빠가 있어서 고마워!”
비록 여전히 시선이 쏟아지는 단상 위였지만, 가족들 품에 둘러싸인 황준우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다.
조금 피곤하고 복잡하면 어떠랴.
‘이대로가 좋다.’
새로운 삶이 이를 견뎌 내야 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그만큼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축하 인사 이후로는 식사와 연회가 이어졌다.
그때가 되어서는 황씨 일가도 높은 단상이 아닌 지면으로 내려서 모두와 함께 밥을 들었다. 사실, 그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호양상단(湖陽商團)에서 나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가장(將家場)입니다.”
“황보세가요.”
밥을 먹는 와중에도 정말로 많은 사람이 와서 손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덕분에 황준우는 좋아하는 식도락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한 입 먹고 인사하고, 젓가락 들자마자 내려놓고를 반복하다 보니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역시 이런 건 안 좋아.’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사람 참 다 똑같구나.’
밥을 먹는 와중에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곤산무관(昆山武館)입니다. 자제 분이 마침 열한 살이라 하시니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 소아(素兒)랑 딱 동갑이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소아야, 어서 인사하거라.”
“아, 안녕하세요!”
그 이름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웃음을 보이는 여아가 손을 잡아끄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수줍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다.
“자자, 이쪽 생일의 주인공에게도…….”
“아, 안녕.”
“안녕.”
흘낏 눈만 흘린 황준우가 짧게 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소아라 불린 아이는 어찌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이내 제 아버지의 바짓자락 뒤로 모습을 숨긴다.
“하하, 두 아이가 벌써 친해지려나 봅니다.”
“그런가요.”
황석후는 그럭저럭 말을 잘 받아 주었지만, 황준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어딜 봐서?’
기껏해야 인사 한 번 하고, 그다음에는 제대로 말도 못한 채 숨어 버렸다. 친해지기는커녕 다음에 보면 얼굴이나 알아볼까 싶은 인연이었다. 사실 이제 와서는 제법 식상한 이야기기도 했다. 지금까지 찾아와 인사를 나눈 이들의 대부분이 옆에 딸을 끼고 와서 이와 비슷한 행위를 반복했다. 목적이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차기 만금장주의 얼굴에 눈도장이나 찍어 두자는 것이다. 그러다 눈 맞아서 둘이 손잡고 같이 어디라도 가면 더 좋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짜증도 조금 났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다시 생각해 어찌 됐든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 것이다. 단지 그만 쉬고 싶기는 했다. 이런 자리는 황준우에게 있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슬슬 머리도 아프네. 들어간다고 할까?’
고민하던 찰나, 옆에서 열심히 떠들던 곤산무관의 관주라는 양반을 보낸 황석후가 시선을 보내 왔다.
“들어가 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하하, 녀석. 그렇게 힘들었느냐?”
“죽을 것 같아요. 진짜 체질에 안 맞는다고요. 차라리 공부가 쉬운 것 같아요.”
“오, 그리 생각한다면 한 번이 아니라 가끔이라도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지는걸.”
“앞으로 학문에 열과 땀을 쏟겠습니다, 아버지. 그러니 그런 농담은 마세요.”
“하하, 녀석. 내 자식이지만 정말 지학도 안 된 게 맞는지 의문이라니까.”
“영특한 탓이죠, 뭐.”
“시녀들 사이에서는 애늙은이라는 소문도 돌던데…….”
서시가 조금 걱정된 음색을 흘렸다. 그녀도 자신의 자식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나이에 맞지 않게 앞서갈 때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아이다운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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