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1화
“이게 웃겨? 널 놀리는 건데?”
“몰랐다. 어쨌든 재미있으니 그만 아니겠느냐?”
“거 참 말투 한 번 독특하다니까. 어휴.”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방 밖으로 나서 다시 신발을 신었다.
“연회장 까지만 데려다주면 되지? 더 이상은 귀찮게 하지 않기다.”
“피곤하면 조금 쉬었다 가도 된다.”
“너랑 나랑 같이 한방에서?”
“아무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였다. 예기(禮記) 내칙(內則) 편에서 나오는 말이지. 너 공부 안 하거나, 못하지?”
황준우가 콧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킨다.
잠시 그 모습을 조금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주연하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허식(虛飾)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서로 마음이 있다면 나이 칠세에도 한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이고, 반대가 된다면 약관을 넘어선들 무슨 상관이겠느냐?”
“너 그거 남들한테 말하지 마라. 잘못하면 끌려가 몰매 맞아. 어린 게 벌써부터 공자랑 척을 질려 그러네.”
“공자와 제자 분들의 가르침은 그 깊이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뜻도 정의롭기 그지없다. 하니 내가 척을 질 이유는 없겠구나.”
앞장서 걷던 황준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연하를 돌아본다. 눈가를 초승달처럼 살짝 굽힌 그녀의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나랑 말장난하는 거지?”
“진심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나저나, 네 이름은 무엇이냐?”
“황준우. 몰랐어?”
“자세히 듣지 않았다.”
“그럼 아까 주인 운운한 건?”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나서 그랬구나.”
“내 인상이 그렇게 쉽게 잊히는 편은 아닐 텐데.”
새로 태어난 이후, 나름대로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황준우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이는?”
“……그건 왜 물어?”
열셋이면 지금 황준우에 비해 두 살이나 많다.
신경 쓰지 않으려면 신경 안 쓸 수 있다지만, 여태껏 막말을 하다 막상 밝히려니 조금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궁금해서 묻는 것 아니겠느냐? 나도 솔직하게 대답해 줬고.”
“…….”
“대답해 주기 싫은 게냐?”
“대충 비슷해.”
그럭저럭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 대답에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비슷하구나.”
나이 한두 살 차이쯤은 세월이 흐르고 보면 큰 의미가 없는 법이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황준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을 몰아내기 위해 나눈 잡담이었는데 그조차도 계속되니 지쳤다.
물론 천조신공을 이용해 육체를 강제로 활성화시킨다면 쏟아지는 잠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깨면 또 언제 잠이 올지 알고.’
기왕 잠이 몰려올 때, 누가 불러도 쉽게 일어나지 못할 깊은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었다. 쫓기던 전생에서라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 만큼 황준우는 지금 생에서 잠 역시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있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멀기도 하네.’
평상시에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피곤한 상태로 걸으니 집이 정말 넓다는 게 느껴졌다. 정문도 아니고, 그 반절도 되지 않는 연회장까지 가는 데 일각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가족들이 드나들기 쉽게 만들어 놓은 후문이 없었다면 정문까지 가는 데에는 마차를 타고 다녀야 될 정도였으니 굳이 표현을 더 할 필요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괜히 번거롭게 한 것 같아서.”
피곤한 황준우의 얼굴을 옆에서 슬쩍 바라본 주연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황준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보였다.
‘집이 넓은 건 아버지 탓이지, 네 탓이 아니니까.’
그래도 꾸준히 걸어온 덕에 머지않은 곳에 연회장의 번쩍이는 야명주가 보였다. 주변으로 돌아다니는 시녀들과 하인, 손님들도 제법 눈에 뜨인다.
“이쯤이면 됐지?”
“고맙다.”
지친 표정의 황준우가 묻자 고개를 주억인 주연하가 답했다.
“그러면 들어가서 부모님 잘 쫓아다니고, 다신 길 잃지 말고. 안녕.”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미련 없다는 듯 등을 돌린다.
잠시 그 모습을 조금은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주연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또 보자꾸나.”
목소리는 작았다.
주변에 선 채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주연하 역시 닿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볼 수 있으면 또 보겠지.”
작았지만, 정확하게 귓가에 닿은 목소리 마찬가지로 속삭이듯 답한 황준우가 느린 걸음을 옮겨 간다. 더 이상 그를 방해하는 일도 막아서는 것도 없이 무사히 방 안에 도착한 황준우는 이번에야말로 푹 잠들겠다는 의지로 옷을 벗어 던지고 머리를 풀었다.
직후 이불을 둘둘 둘러싼 황준우의 얼굴이 곧 느슨하게 풀어졌다.
“으으, 이 부드러운 느낌.”
고운 단(緞)으로 만들어진 이불자락은 부드럽다 못해 포근하기까지 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그 안에 쏙 안겨 있으면 문득 근거 없는 확신이 떠오르기도 했다.
“역시 이불 밖 세상은 너무 위험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황준우의 머릿속에 문득 또 보자고 읊조리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연하라고 했지?”
뜬금없었던 그녀의 자기소개를 떠올리며 미소 짓던 황준우가 갑작스럽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주연하?”
드넓은 천하에 성(姓)은 많고도 많다.
굳이 읊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니, 읊으려 들다가는 칠 주야 밤낮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만큼 엄청나게 많았다. 그중에서도 주(朱)씨는 조금 특별한 편이었다. 붉은 지붕 아래에 지어진 성(城) 안에 사는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하다 칭해지는 인물이 사용하는 성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점점 떠오르는 주연하와의 대화가 확신을 더해 가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의 도도하고 애늙은이 같은 말투와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던 기품은 따라 하려고 따라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분명 나서부터 몸에 새겨지고 익힌 습관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하다.
주연하는 최소, 아니 확실하게 왕족(王族)이었다.
“나 지금 왕족이랑 맞먹은 거야?”
심지어 나이까지 속이고 놀리기까지 했다.
“그…… 왕족능멸죄가 뭐더라?”
잠시, 등 뒤가 싸늘해지는 감정을 느낀 황준우는 곧 머리를 내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만약 상대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목소리를 높였을 터다. 하나 주연하는 끝까지 침착했고, 오히려 피곤한 황준우를 걱정하기도 했다.
“뭐, 끝까지 무시한 것도 아니고. 설마 어린아이가 그런 표정 뒤에 무시무시한 칼날을 숨겨 뒀거나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걱정된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아, 젠장. 몰라. 영 뭣하면 천하랑 한판 더 뜨지 뭐.”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황준우는 다시금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엎어졌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아버지부터 찾으러 가야겠다.’
결국, 그날 밤 황준우는 원하던 단잠을 자지 못했다.
꿈속에서 진노한 황제가 칼을 뽑아 들고 군대를 진군시키니 어찌 편히 잘 수 있겠는가?
“어젯밤이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이른 오전.
동이 트자마자 부모님의 처소를 찾은 황준우를, 아직 반쯤 감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황석후가 맞이했다.
“질문할 게 있어요, 아버지.”
“해 보거라.”
대체 어떤 질문이 이 어린애 같지 않은 아들을 이른 아침부터 이리 조급하게 만든 것일까? 입가에 웃음을 그린 황석후가 물었다.
“혹시 어제 무슨 문제는 없었나요?”
“그러니까, 뭐 이상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왕족이라든가, 또 뭐 그런 사람이 찾아와서 역정을 낸다든가, 협박을 한다든가 그런 것 있잖아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한 황준우의 말에 마침 침상 바깥으로 나온 서시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친 거니?”
“그럴 리가요.”
서시의 질문에 황준우가 빠르게 정색하며 답했다.
“한데 우리 아들이 그런 질문을 왜 할까?”
양팔을 벌려 황준우를 품에 안은 서시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한다.
“어, 어머니. 잠시만.”
“그래, 잠시만 이러고 있자꾸나.”
붉어진 얼굴로 발버둥치는 황준우를 품에 꼭 끌어안은 서시의 시선이 황석후를 향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냐는 의미를 가득 담은 채로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소. 중간에 공주마마가 사라졌다고 하여 조금 난리가 났었지만…….”
황석후의 말에 황준우의 눈이 번쩍였다.
‘그 공주!’
말할 것도 없이 주연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나타나셔서 문제없이 마무리되었었지. 흠, 그러고 보니…… 준우 네가 어제 공주마마를 만난 게로구나.”
“아, 아마도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는 듯 황준우를 바라본 황석후의 얼굴에도 황당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모시면서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없고?”
“그, 글쎄요.”
“불편하게 했구나.”
“…….”
황준우가 대답이 없자 황석후가 웃음 지었다.
“이것 참, 성의라도 한 번 표시해야겠구려. 잘못하면 왕족능멸죄로 우리 가족 모두가…….”
“안 됩니다! 안 돼요!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제가……!”
“농담이다, 녀석아.”
서시의 품에서 단숨에 빠져나오며 목소리를 높이는 황준우의 머리에 손을 얹은 황석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게다. 그러니 심려 말고 마음을 놓거라.”
“저, 정말인가요?”
“난 우리 아들이 이렇게 애 같을 때가 참 좋더라.”
서시가 그런 황준우를 다시금 뒤에서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 마렴. 네 아버지가 한 번 내뱉은 말이 틀린 적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야 하지만…….”
확실히 황준우가 지켜본 황석후란 인물은 못 지킬 약속이나 일은 입 바깥으로 내뱉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걱정 마렴.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우리 아가.”
품에 안은 황준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서시가 볼을 비빈다. 그러고 있자니 다급하던 마음도 차분해지고 편안해짐을 느낀 황준우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겠죠?”
“아무렴.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겠느냐? 이른 오후에 일이 있어 일찍 출발한다고 하셨지만 아직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냉정히 고개를 내젓는 황준우였다.
간단한 아침 요깃거리를 챙겨 받은 시녀 소호는 아직까지도 만금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어린 공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주마마, 이만 가셔야 합니다.”
“…….”
“공주마마?”
“소하.”
“예, 마마.”
“너도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주연하의 질문에 소호가 하늘로 솟아오를 듯 껑충 뛰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주 마마는 황제 폐하께서도 칭찬하실 정도로 영특하신 분 아닙니까. 저뿐이 아니라 대명제국인 누구도 공주마마를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별빛을 닮은 검은 눈동자로 그런 소호를 바라본 주연하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그 무슨…… 마마?”
소호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 작은 웃음과 함께 등을 돌려 마차 위로 올라탄 주연하가 이미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중년인을 바라본다. 짧은 수염을 정갈하게 정돈한 눈앞의 인물은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영왕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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