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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2화 (22/373)

학사재생 22화

“아바마마도 제가 공자와 척을 지려는 것 같습니까?”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 영특한 자신의 딸과 마주한 영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무슨 말이냐? 시키지 않아도 글공부를 시작했던 우리 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같은데.”

“후후, 그러게나 말입니다.”

말끝을 돌리는 주연하를 보고는 피식 웃은 영왕의 시선이 다시금 책을 향했다.

“후후…….”

하지만 그 시선조차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는 주연하 탓에 결국 책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책을 덮은 영왕이 주연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나 보구나.”

“제법 재미있었지요.”

“좋은 일이구나. 나도 오랜만에 친우의 집에 들러 좋았으니, 부녀(父女)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셈인가.”

짧은 수염을 쓰다듬은 영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바마마께서는 소주 대인과 어린 시절부터 친우 사이였다고 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겉으로 보기엔 대인께서 조금 더 젊어 보이시네요.”

“아이고.”

딸의 당돌한 말에 이마를 짚은 영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 친구가 나이를 속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친구가 돼 버린 건데…… 벌써 그게 이십 년 전이로구나.”

영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주연하의 입가로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

“왜 그런 게냐?”

놀라 되물은 영왕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크게 웃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아이치고 조숙한 주연하는 큰 웃음을 잘 터트리지 않았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았다.

때로 너무 즐겁거나 기쁠 때 이렇게 웃기는 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 수를 꼽자면 정말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요. 그냥 자식이 아버지를 참 닮은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네가 날 닮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예쁘지.”

“과찬이세요.”

“하늘 아래 모두가 안다. 오죽하면 폐하께서 네가 보고 싶어 이 먼 길을 직접 행차하실까.”

“아바마마도 참.”

“출발하겠습니다, 전하.”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끼어든 시녀의 목소리에 영왕이 고개를 주억였다.

“길을 서두르자꾸나.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떠나기 전, 기꺼운 친구의 얼굴을 한 번쯤 더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나 없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봤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금 책장을 편 영왕의 손길이 문득 멈추었다.

입가에 매달린 미소와 만금장에 고정된 시선.

제 딸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확신했다.

“그 친구의 자식을 만났구나.”

“그래서 즐겁고?”

“예, 아바마마.”

영왕의 입가로 더욱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대충 상황이 짐작이 되었다. 황석후에게 들은 황준우의 성격 역시 범상치는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이 만났고 결코 얕지 않은 인연을 다졌다. 그리고 쉽게 웃지 않는 아이에게 인상적인 기억을 남겼다. 부모가 그러했듯 자식의 연(緣)도 흐르듯 이어졌다.

“정말 좋구나.”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장강의 뒷 물결은 결코 급히 움직이는 법이 없건만 꾸준히 앞으로 밀고 나아간다. 세월이 그러했다. 열한 살의 인연을 뒤로한 채, 평온하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도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황준우는 어느덧 지학마저 벗어나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육 척(일 척: 삼십 센티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 온 덕에 멋지게 자리 잡은 균형 잡힌 근육. 어머니인 서시를 닮은 맑은 피부에 아버지인 황석후의 굵은 선을 그대로 간직한 황준우는 이미 외모만으로 소주에 살고 있는 뭇 여인들의 방심을 뒤흔드는 사내였다.

하물며 가문이 그 유명한 만금장이다.

그것뿐인가?

작년에는 성도에서 치러진 원시에서 장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소주뿐만이 아니라, 강소 일대에 그의 이름은 여인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이야깃거리였다.

“그러니 평소 행실을 더 조심하고, 밖에 나갈 때는 면사라도 쓰든지!”

어느덧 제법 자라 소녀티를 갖춘 황서연이 주먹을 내뻗으며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흘린다. 살짝 몸을 비틀어 그를 피한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렴 큰 상관없잖아. 이야깃거리 좀 된다고 해서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해가 왜 없어!”

제법 힘이 실린 황서연의 주먹에서 내력이 번뜩이며 바람을 갈랐다.

‘휘유-!’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는 주먹을 피한 황준우가 내심 한숨을 흘렸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무공을 가르친 덕인지 그 기세가 어지간한 강호의 절정 고수 못지않았다. 그런 주먹을 자그마치 여동생이 어째서인지 진심으로 내뻗으니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빠가 그러고 다니니까 쓸데없는 소문이 나도는 것 아니야. 바람둥이라거나, 혹은 바람둥이, 또는 바람둥이라고!”

“때지도 않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다.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나온 거야?”

다시 한 번 주먹을 회피한 황준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여자를 하나라도 만나 봤으면 그런 소문이 돌아도 이해하겠건만 전생에도, 재생한 이후에도 황준우는 여전히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채였다.

물론 여동생과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 바람둥이라는 소문이라니?

말 그대로 헛소문이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게 당연했다.

파바바밧-!

몇 번이나 기세 좋게 주먹을 내지르던 황서연은 끝내 황준우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한 채 지친 숨을 헐떡였다.

“후우, 후우. 그래도 어릴 때는 할 만했는데!”

“오늘도 위험했어. 정말로.”

물론,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위험한 적은 없었다. 다만 무공을 익히는 재미를 북돋아 주기 위해 몇 번 일부로 당해 준 적이 있을 뿐이었다.

“거짓말쟁이.”

“진짜야. 아슬아슬했다니까.”

“정말?”

“오빠 말 못 믿어?”

“그야, 믿기는 하지만…….”

양 검지 끝을 수줍게 모은 황서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주억인다.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힌 덕일지 제법 거칠고, 걸걸한 성격이 된 것도 같지만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귀여운 여동생일 뿐이었다.

실제로 황준우만큼이나 두 부모님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황서연 역시 벌써부터 소주와 강소 일대의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밖에 몇 번 얼굴을 비춘 적도 없거늘 오죽하면 벌써 강소제일미(江蘇第一美)라는 소문까지 나돌겠는가? 두 남매 모두가 외모에 관련된 혈통 하나는 제대로 물려받고 태어난 셈이었다.

여기서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이성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이도 제법 찼겠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여럿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콧방귀는커녕 거들떠도 안 본다. 부모님인 황석후나 서시가 강제라도 하면 좋으련만, 두 사람 모두 연애나 혼인에 관한 부분은 자유방임주의인지라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속을 썩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외모에 반한 인근 유망 가문의 젊은 남녀들뿐이었다.

“하아, 하아. 어, 어쨌든 괴상한 소문 좀 안 나돌게 조심하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아?”

“알지, 잘 알고말고. 누가 우리 연이만큼 날 신경 써 줄까? 고마워, 내 동생.”

황준우가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날카롭게 솟았던 눈매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풀려 버린 황서연의 입가로 헤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강아지와도 같은 그 모습에 황준우의 입가로도 뿌듯한 웃음이 흘렀다.

‘귀여운 녀석.’

동생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도 다른 남자가 황서연에 대한 괴상한 소문을 흘리고 다닌다면 참지 못할 테니 말이다.

물론 방식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를 터였다.

‘헛소문 흘린 놈을 가만히 놔두면 안 되지.’

헛소리하는 놈에게는 언제나 매가 약.

그렇게 생각하는 황준우였으니 말이다.

이른 오전에 황서연과의 무공 수련이 끝나면 황준우는 개인 수련 시간을 따로 가졌다.

지난 육 년간 육체의 성장에 따라 전생의 무공을 모두 회복한 황준우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다.

‘육단공.’

전생에는 결코 허물지 못했던 벽.

실상은 그 실체조차 보이지도 않던 수줍은 여인 같은 경지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역시 답은 상단전에 있었구나.’

황준우는 육단공의 길을 조급하게 걷지 않았다.

천조신공이 속성의 무공이라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결국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시간과 때가 필요한 법. 이른 바 왕도(王道)다. 그렇기에 결코 조급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길을 만들어 왔다. 다지고, 또 다지고,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길을 돌다리 두드리듯 조심스럽게 지나 온 결과 상단전의 완성이 가까워졌다.

‘이게 완성되면 대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그 누구도 지나오지 않은 길의 길목에 선 황준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단순히 상단전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얻은 이득도 적지 않았다.

우선 공부를 싫어하는 황준우가 장원을 달성할 정도로 뇌가 활성화되었다.

이는 두 번째 부가효과도 함께 불러왔다.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중단전, 즉 심장이다. 하나 결국 사람의 육체를 다루는 곳은 뇌가 위치한 상단전이다. 결국 뇌가 활성화됨으로써 황준우는 인체 내부에 숨은 혈도와 혈맥, 그 외의 모든 기관들에 대한 영향력을 늘릴 수 있었다.

간단한 예로 심장 박동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하고자 마음먹으면 즉시 뇌가 반응해 명령을 전한다. 이러한 명령이 일정 이상, 즉 심장을 멈추어라 수준까지 도달하면 생각만으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가짜로 재현해 낼 수도 있다. 호흡을 지극히 느리게 만들고 심장 박동 수도 정확하게 생존에 필요한 수치까지만 낮추면 될 일이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가 살수였다면 누구보다 천조신공의 육단공을 탐냈을 이야기였다.

숨조차 죽이고, 심장 소리조차 감춘다.

발걸음은 깃털보다 가벼워지겠지.

그리된다면 천하에서 제일가는 고수의 눈마저 속일 수 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이미 벌써 천하제일살수라는 말이지. 물론 취향은 아니지만.’

차라리 천하제일고수라면 훨씬 취향에 맞다.

그리고 실제로, 천조신공 오단공에 육체가 완성에 가까워진 열일곱의 나이인 황준우의 무공은 이미 천하제일이라는 칭호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꾸준히 익혀 온 유령신보와 천지요박투는 성장한 육체를 가진 지금의 기준에 있어 전생의 경지마저 뛰어넘었다.

거기다 상단전까지 개방하였고 내공의 질과 양마저 비교가 안 될 정도니 단순한 회복(回復)이 아닌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역시 그건 무리겠지?”

무서울 것이 없던 전생의 황준우는 수많은 고수의 검조차 이겨 냈지만 결국 원공 대사의 금강불괴만은 뚫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쯤 되는 것이 고작(?)금강불괴일까 싶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이라고 한들 그 힘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련님한테도 무리란 게 있습니까?”

황준우의 혼잣말에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경호가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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