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3화
“경호는 내가 무슨 전지전능한 것처럼 말하네.”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엔 가장 사기적이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황준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기적이라니, 어찌 됐든 소주 제일가는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황준우의 입장에서야 경계심이 드는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상인은 신용을 먹고산다. 지학이 넘어섰을 때에 황준우를 맞은편에 앉힌 황석후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때문에 대의를 따라야 하고 명분을 지켜야 한다.
당연하지만 ‘사기’라는 두 글자에 신의와 대의명분 그 무엇도 없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 시녀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집안 좋지, 잘생겼지, 능력 좋지. 믿기지 않을 정도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요. 솔직히 저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가끔 배도 아픕니다.”
“그러니까 워낙 허황돼서 믿기지 않을 정도라 사기적이다, 이거네.”
“바로 그 말입니다.”
황준우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것 참, 아무리 그래도 상인 집안의 자식한테 사기적이라니, 끙. 아 그리고 경호 요즘 너무 솔직해진 거 아니야? 그래도 내가 어릴 때는 조금 조심스럽고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아무리 조언해도 말은 듣지 않으시고, 제 입장도 고려하신다면 당연히…….”
“아아아, 시끄러. 이 잔소리쟁이!”
결국 먼저 항복을 선언한 황준우가 고개를 휙 돌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변한 듯하지만 변한 것이 없다.
경호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황준우에게 있어 여전히 잔소리쟁이일 뿐이었다. 그런 황준우의 뒷모습을 웃는 모습으로 바라보던 경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얼마 전 소주에 장인(匠人)이 한 명 들어왔답니다.”
“장인? 장인이라면 이미 많잖아.”
“그 정도가 아닙니다. 굉장히 유명한 대장장이라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황제폐하께서도 인정하신 제일이라고 합니다.”
황제란 말에, 열한 살 생일 때 있었던 위기를 떠올린 황준우의 표정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덜컹했다. 자칫하면 제 실수로 가족을 비롯한 만금장 식구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던 일 아니던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더 무서운 것이 많다더니 딱 그 말이 옳았다. 차라리 홀로 강호를 떠다닐 때는 천하가 적이어도 두렵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 덕에 지키기 위해선 혼자인 것 보다 몇 배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더 빠른 성과를 이룬 것일지도 몰랐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천하제일의 대장장이 말입니다.”
“경호는 궁금해?”
황준우가 그런 경호를 바라보고는 안 되겠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잘 들어, 경호. 무인이란 모름지기 한 자루 검보다 제 몸을 우선시해야 되는 법이야. 육체가 완성되기 전에 그런 도구에 의존해 버린다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검선이 들으면 도련님 머리채를 잡아끌고 역정을 낼 이야기로군요.”
“노인네가 체면 없게 남의 머리채까지 잡아끌지는 않겠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짧은 말로 만병지왕이라는 검(劍)을 비롯하여 그를 다루는 무수히 많은 무인을 한 번에 깔아뭉갠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부터 말을 돌려 했지만 실상 검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하나의 도구보다 그걸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야. 너무 화내지 말라고, 경호.”
경호를 놀리듯 미소를 보인 황준우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노을이 떠오르고 있는 시간. 황준우에게서는 결코 빠질 수 없는 가족 저녁 식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가 말하길 그가 만든 검은 가히 대왕 합려의 간장막야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또한 천하제일이라며 박수를 쳐 주었다. 그때가 소문난 대장장이 만총의 가장 영광 된 순간이었다.
단순히 황제가 자신이 합려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란 것을 자랑하기 위함인지, 그가 하사받은 검이 전설 속의 명검에 못지않음이라 여기고 싶음인지는 사실 아무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만총은 마음에 한 줄기 자부심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있었고 대장장이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천하에 드높이 알려졌고 일부 대장장이 중에서는 사칭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배운 유일한 장기인 망치질이 그만큼이나 인정받은 셈이니 말이다. 덕분에 천하 어디를 가든 남의 대장간을 빌려 쓰기도 쉬웠다. 이름을 대고, 그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만총의 방문은 대장장이에게 있어 크나큰 영광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떠돌았다.
제 자랑 좀 하고 싶어서.
천하 곳곳에 간장막야에 못지않은 명장(名匠)이 있음을 소문낼 겸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곳저곳에 제가 만든 작품을 하나씩 뿌리고 다니면 현세가 아닌 먼 후대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남겠지.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이름을 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험난한 여정도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만총은 나이 이립(而立)을 시작으로 꿈을 좇아 십 년을 떠돌았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그만큼 영감을 줄 만한 일이나 사건도 많지 않았기에 그간 만든 무기는 열을 넘지 않았다.
때로는 검 혹은 도 또는 창을 만들었고 그 무구들은 작금에 와서 팔대용기(八大龍器)라 불리며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총은 만족할 수 없었다.
숫자 십을 채우자.
이립의 나이에 천하를 향해 출발할 때 만총이 목표로 했던 것이었다. 십(十)은 완벽한 숫자였으며 그쯤은 되어야 천하 곳곳에 이름을 날리다 못해 후대까지 전해지리라는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예정대로라면 그의 꿈은 나이 지천명(知天命)이 되기 전에 이루어졌을 터다. 그리하여 늦은 나이지만 장가 욕심도 내 보고, 못하더라도 세상을 향한 목표를 이루고 이름 하나 떨쳤다며 만족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어떤가.
벌써 나이 이순(耳順)이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욕심으로 시작했던 여정은 백발이 듬성듬성 피어오르기 시작한 노인이 될 때까지 그의 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약 이십여 년 전 운명처럼 이어진 하나의 만남 탓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남기고자 시작한 일이었던 만큼 당시의 만총은 하나의 무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온 힘을 다 쏟고자 하였다.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멀어 그저 그런 무기를 만들 바에야 망치를 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때였으니 그 심정이 어찌 얕았을까? 그렇게 여덟을 만들고 아홉 번째 무기의 영감을 찾아 눈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십으로 완성하고자 한 작품 역시 마지막 두 점만 남았던 만큼 감각은 더욱 예리하게 서 있었다. 남은 두 점은 앞의 여덟 점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인간 만총이 아닌, 대장장이 만총으로서의 욕심이 그의 마음을 이끌고 있던 바로 그때에 한 청년을 만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에 야성적인 눈빛의 그가 만총이 있던 객점에 들어서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마치 초식동물만 있는 평화로운 들판에 맹수가 던져진 것만 같은 분위기. 만총은 그 속에서 짜릿한 전류가 뇌를 파고드는 것만 같은 황홀함을 맛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최고의 쾌락이 그의 전신을 가득 메웠다.
‘저 사람이다.’
오로지 그를 위한 무기를 만들자.
그를 지켜보고 그를 닮은 무기를 만드는 것이다.
저런 엄청난 사내의 옆에 있으면 남은 두 점이 순식간에 나올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해서 시선으로 계속해서 남자를 좇았다. 그가 객점에서 한 그릇의 소면을 비우고 떠날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재빨리 뒤를 쫓기도 하였다. 멀어지는 그를 붙잡아 이름을 밝히고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돈도 받지 않는다 하였다.
인생 최고의 쾌락을 맛보게 해 준 사내를 향한 나름의 보상이었다.
한데 사내의 입에서 돌아온 말이 가관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알아보지. 그런 도구에 의존하면 약해지는 법이거든.”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두 주먹을 들어 올려 흔들어 보인 후, 진한 미소를 남긴 채 사라졌다.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거절에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이미 사내를 찾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후였다.
그래, 그때로부터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만총은 남은 두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잔존하듯 남은 사내의 모습을 떠올려 망치를 들어 올려 보았지만 너무나 미약했다. 조금 더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 상태로는 만들어 봐야 그 모습을 흉내 낸 껍질뿐인 무기가 될 뿐이었다.
결국 만총은 마음을 한 번 돌렸다.
사내가 무림인으로 보인다는 점에 기인해 천하에서 이름 높은 무림인들을 찾아가 영감만 얻으면 공짜로 무기를 주겠노라며 제 재주를 헐값에 팔아 보았다. 하나 모두 무의미한 일이었다. 작은 영감이 오는 것 같아 애써 망치를 들어도 당시 사내에게서 느껴졌던 야성적인 그 감각이 잊히지를 않았다. 다짐을 깨고 억지로 망치를 휘둘러보았지만 만들어진 작품은 기대 이하일 뿐이었다.
결국 만총은 마음을 또 한 번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없다면, 그를 찾아보자.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영감을 남긴 그를 찾아내면 될 뿐이다. 사랑이라는 열병에 빠진 사내처럼 그 한 사람을 찾아 천하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쯤에서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여덟 점의 무기는 이미 팔대용기라 불리며 천하 곳곳에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황제에게 인정받은 천하제일의 대장장이 만총의 이름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조금 허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목표는 이루었다고 볼 수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모습이다.
“나도 지칠 때가 되었지.”
만총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기억 속의 사내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지웠다.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찾을 수 없는 그림자를 어찌 쫓는다는 말인가? 이제 그는 남은 인생을 즐기고자 하였다. 천하제일이라는 허명 덕에 그렇게 쓰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돈은 많았으니 말이다.
때문에 소주를 찾았다.
천하에서 가장 많은 황금이 몰려든다는 그곳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의 눈을 즐겁게 할 새로운 문물과 황궁이 위치한 북경 못지않은 화려한 건물들, 맛있는 진미와 달콤한 술, 예쁜 웃음을 파는 여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속에 한참 빠져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제 죽는 줄도 모르겠지.”
어차피 옆에도, 뒤에도 누구 하나 없는 혼자인 몸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달콤한 맛이 나는 진흙탕 속에 던지려 하였다. 하나 막상 소주에서 제일간다는 기루 앞에 서자 그 걸음이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이 소주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이 땅이라면 그에게 혹시 아홉 번째 작품에 대한 빌미를 남겨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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