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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5화 (25/373)

학사재생 25화

“뭐가 그렇게 신나셨습니까. 두 분 바깥에만 나오면 그렇게 사라지시는데 말씀이라도 해 주시든가요. 정말 제 심장이 하루에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는지 모를 겁니다.”

“아, 미안, 미안.”

“건성으로 들으시면 안 된다고요, 도련님!”

“경호, 오빠도 다 알아들었어.”

“아가씨도 똑같습니다!”

경호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걷고 있던 황준우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상단전의 개발로 인해 뇌가 발달한 덕일까?

꽤나 오래전에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늙은 만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젊은 시절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열기가 넘쳤으며, 힘이 가득해 보이던 그 청년이 어느새 노인이 되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일까, 깊은 인연이 아님에도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만총이라고 했었지?’

제가 무기를 만들어 줄 테니 옆에서 지켜만 보게 해 달라고 했던가? 당시의 황준우는 이미 쫓기는 몸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기는커녕 인연을 맺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무기가 없어도 스스로가 강하다고 믿었기에 재고할 여지가 더더욱 없기도 했다. 그래서 단칼에 거절했다. 꽤나 충격 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그 얼굴은 제법 재미있었다.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드넓은 천하에서 다시 태어난 후 이렇게 우연으로 마주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서로를 이어 주는 끈이 없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터다. 그리 생각한 덕에 만총의 얼굴을 떠올리면 기분이 제법 좋았다.

‘대화라도 조금 나눠 볼걸 그랬나.’

아니다. 당시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딱 거기까지의 인연인 것이다.

만약 더한 무언가가 남았다면, 자연스레 또다시 이어지겠지.

황준우는 마음을 비우고 여유롭게 뒷짐을 졌다.

“도련님, 듣고 있습니까!?”

경호가 소리치듯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 잘 듣고 있다고.”

황준우의 입가로는 연신 미소가 그려졌다.

작금 천하의 주인은 더 말할 것 없이 황제다. 붉은 지붕의 궁전 중심에 군림한 황제의 손길은 천하 전체를 덮고도 모자람이 없으니, 그를 부정할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하나 천하를 덮었다 하여 모든 것을 가진 것 또한 아니다.

무림 혹은 강호라 불리는 영역은 분명 같은 중원 내에 있거늘 또 다른 세계에 속했다. 그들은 검 한 자루를 든 채 하늘을 날고 강을 넘고 홀로 수백의 병사를 상대한다. 황궁 내에도 그러한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에는 그런 인물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 모두를 황권과 군권만으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황제는 결국 무림만의 영역을 인정하고 대신하여 무림문파, 가문을 칭하는 이들에게 높은 세액을 요구했다. 돈을 받고 관아 혹은 일반인과 부딪치는 일이 아니라면 같은 무림인 간의 다툼에서 황궁은 완전히 빠져나간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은 대문파와 거대세가의 입장에서야 나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매번 검을 뽑을 때마다 황궁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야, 그 편이 훨씬 편했으니 말이다.

돈이 없고 가진 바가 없는 중소문파의 입장은 조금 다르긴 했다.

그들은 높은 세액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문파의 문을 닫거나 아니면 불법인 것을 알고서 계속 무림인으로 활동하든가. 물론 그들이 검을 뽑아 휘두를 때에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황궁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아니라면 이미 세액을 지불하고 당당하게 무림의 일맥(一脈)으로 자리 잡은 대문파와 세가를 상대로 머리를 조아리는 방법도 있었다. 속가에 들 수만 있다면 적어도 황궁에 같은 무림인으로 인정이 되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당대 황제의 이러한 정책은 중원 전체에 있어 나쁘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세액을 내지 못하거나 대문파의 흐름 속에 끼지 못한 중소문파는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졌고, 그들 중 대다수가 흑도(黑道)라 불리던 삼류 무림 집단이었던 덕이다.

무림인이라며 검을 찬 채 양민들을 괴롭히던 이들이 대부분 망했으니 작은 안녕이 찾아오는 것은 분명했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당하게 세액을 지불하는 대문파의 영향력과 입김이 훨씬 더 강해졌다. 하나 그 피해를 받는 것은 일반 양민이 아닌 속가에 속한 같은 무림 방파뿐이었다. 실상 황제의 입장에서야 제 손이 미치지도 않는 무림 세계의 일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최상의 결과를 불러왔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이야기다.

강산이 한 번 뒤바뀔 시간 동안 안휘를 본거지로 한 남궁세가는 강소와 절강을 비롯한 일대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단단한 담장을 쌓아 개가(開家)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남기제일(南畿第一) 남궁세가.

일대에서 그들을 막아설 수 있는 이는 개인은 물론, 집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남궁세가의 가장 깊은 심처.

가주와 그의 직계혈손으로 이루어진 진(眞) 남궁 씨의 성채와 다름없는 그곳에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푸드득-!

날개를 떨치며 제자리로 돌아온 새의 발목에 묶인 전통을 뽑아 내용을 확인한 청년이 얼굴을 굳힌 후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창궁원(蒼穹院)이라 쓰여 있는 삼 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뒤를 따르는 수백의 눈초리를 이끈 그는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가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이후 드넓은 침상에 누워 있는 거구를 확인한 청년의 무릎과 머리가 바닥을 찧었다.

“창궁무애, 남궁창천! 그의 위치가 확인됐습니다.”

“오오, 그래?”

청년의 말에 대답한 이는 침상에 누워 있던 비대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짧은 염소수염이 자란 그의 얼굴은 선하다 못해 멍청해 보일 정도였다. 둔한 손동작과 느릿하게 껌뻑거리는 눈, 둥그런 코는 둔하다 못해 답답하게까지 보였다.

그의 이름이 바로 남궁전혁이다.

세상에 알려지길 남궁제일기재 혹은 남천뇌(南天腦)라고 불리는 현 남궁세가주의 둘째 아들이자 지금의 남궁세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인물. 결국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아무리 멍청해 보인다고 한들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이 보는 것과 다르게 그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본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때로는 서로가 쉬쉬하면서도 고개를 내젓고는 했다.

모두 다 헛소문만 있다고.

남궁제일기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남궁전혁은 그저 남궁세가주의 명성을 업은 멍청이 돼지일 뿐이다. 실제로 남궁전혁은 제 앞에서 그리 말하는 식솔들을 보며 바보처럼 웃음만 보였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남궁전혁의 곁을 지킨 이는 저 홀로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했다.

‘남궁가가 키운 괴물.’

겉모습과 실없는 행동에 눈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선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은 칼날은 천하제일살수의 비도보다 날카로우며, 칠독사(七毒蛇)의 이빨보다 끔찍하다. 다들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하지만 남궁전혁 앞에서 비웃음을 보인 식솔들 열 중 다섯이 죽는다. 누가 한 일이냐고? 같은 설명을 두 번이나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남궁전혁이 한 일이다. 그럼 나머지 다섯은 또 왜 살려 놨을까? 필요하니까. 그들이 지금 남궁세가에, 혹은 남궁전혁 본인에게 쓸모 있으니까 일단은 남겨 두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버려질 터다.

잘 쓰인 못마땅한 말은 토사구팽 당하는 법이니 말이다. 때문에 무섭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궁전혁의 아버지 남궁세가주는 말한다.

남궁제일기재, 남천뇌.

그가 바로 남궁전혁이다.

지난 십 년간 가까이서 그를 모셔 온 청년은 화색이 돈 그의 반가운 얼굴을 보며 더욱 심장을 졸였다. 속내를 하나도 비추지 않은 채 살 더미에 파묻혀 그를 꿰뚫어 보고 있을 시선을 떠올린 탓이다.

“그래, 그래. 그가 어디 있던가? 얼마 전에 하북에서 발견됐었지? 이후 남기로 향하는 배를 탔고. 어딜까? 알고 있는 사실을 어서 말해 줘.”

“소주입니다. 소주에 그가 있습니다.”

재촉하는 남궁전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연 청년은 곧장 숨을 죽였다. 공기가 바뀌었다. 남궁전혁을 모르는 이들은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안다. 방금 남궁전혁은 굉장히 화가 났다. 그럴 만도 했다.

남기제일세가.

남궁세가의 유일한 골칫거리가 바로 소주다. 천하에서 가장 많은 황금이 모이고, 그만큼이나 탐이 나는 땅이지만 함부로 손을 뻗칠 수가 없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만금장이 워낙 탄탄한 탓이다. 일대에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기 위한 십여 년 동안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소주는 남궁세가 전체의 골칫거리였다. 그간 몇 번이고 만금장을 집어삼킬 궁리를 하였고 계속해서 실패해 왔던 남궁전혁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눈엣가시.

하지만 처리하기에는 만금장이 가진 힘이 만만치 않다. 금력은 추정할 수 없으며 황궁과의 인연도 깊다. 게다가 남궁세가를 제외한 몇몇 대문파와 친분도 적지 않았다. 함부로 끌어내리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때문에 남궁세가는 아직까지도 남기 무림의 왕이 아닌 남기제일세가로 남아 있는 채였다. 남궁전혁은 술을 마시는 날이면 매일 밤 분노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때문에 그의 앞에서 소주와 만금장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에 가까웠다. 다만 임무와 연계되어 있던 만큼 입을 열 수밖에 없던 것이다. 말해도 문제지만, 말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죄가 되니 말이다.

“흠, 흠.”

짧은 정적이 흐르고 헛기침을 토한 남궁전혁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청년의 입장에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일이었다.

무거워진 공기는 여전하지만 당장에라도 등 뒤에 검이 꽂힐 것 같던 살기는 사라졌다.

“소주, 소주라. 조금 거리가 있군. 그래도 모셔 와야지. 가서 잘 이야기해서 조심스럽게 모셔 와. 혹시 안 온다고 할까 걱정이기는 한데. 그래도 모셔 와. 창천단에 그렇게 전해. 할 수 있지?”

“예, 꼭 모셔 오라고 전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래야지. 어떻게든 모셔 오는 거야. 못하면 혼날 거야. 알았지?”

청년의 신형이 단숨에 남궁전혁의 방을 떠났다.

비대한 체구가 드러눕고도 남아도는 드넓은 침대에 천천히 몸을 누이며,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가 건네는 포도를 한 입 베어 문 남궁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 소주니까. 그래도 모셔 오는 거야. 암, 그래야지. 천하제일 명장 만총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 있고말고, 하하.”

입 안 가득 달콤한 과일 물을 한껏 머금은 남궁전혁이 미소를 그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웃고, 또 계속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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