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화
삼십 년도 전.
지금은 소주 대인이라 불리는 황석후가 이제 막 만금장의 장주 자리에 올랐을 무렵, 남궁세가는 그와 협상을 원했다. 여태껏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소주로의 확장을 꿈꾼 것이다. 하나 황석후는 그를 거부했다. 무림의 도움 없이 소주 스스로의 자생을 말한 것이다. 당연히 충돌이 있었다. 전대 장주는 경험이 많고 뛰어난 노인이었지만, 당시의 황석후는 이제 막 약관에 이른 애송이였다.
남궁세가 입장에서는 힘으로라도 만금장은 위협해 볼 수준으로 보인 것이다. 그 성급함이 문제였다. 황석후는 나이에 비해 수완이 뛰어났고, 만금장의 금력은 천하를 들썩이게 할 정도였다.
그들의 거친 행동과 위협적인 사실이 천하에 공인(公認)되며 손가락질이 쏟아졌고, 황궁에서부터 제재까지 들어왔다. 명분(名分)이 어찌 손쓸 새도 없이 만금장 측으로 넘어가 버렸다. 남궁세가는 당황했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 그냥 적당한 지역 소란 정도로 끝났어야 할 사건이었다. 한데 판이 너무 커졌고, 명분을 뒤집을 만한 수단이 없었다. 결국 남궁세가는 만금장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여야만 했다. 하나 황석후가 바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치권을 잃을 뻔한 소주 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원했고, 결국 검제(劍帝)라고도 불리는 전대 남궁세가주가 소주의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치욕스러운 사건은 한동안 남궁세가의 기세를 위축시켰으며, 남기제일세가의 명성마저 잃게 만들었었다. 결국 당시의 남궁세가는 봉문(封門)을 택했다. 한동안 어깨를 움츠리더라도 비상할 기회를 잡기 위해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호사다마라 하였던가?
최악이었던 상황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그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칠야의 난.
이십 년이 가깝게 지난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칠야무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남궁세가는 문을 걸어 잠근 채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그 싸움에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타 문파와는 다르게 아무런 피해 없이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칠야의 난으로 인해 입은 피해로 혼란스러운 천하 정세 속에서 남궁세가는 또다시 도약했다.
전면에는 새로운 남궁세가주와 남궁전혁이 섰다.
그렇게 다시 남기제일세가로 돌아왔다.
와중에 몇 번이고 소주의 문제로 만금장과의 마찰도 있었다. 힘을 비축한 남궁세가는 자신만만했고, 세상은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관 때보다 더욱 노련해진 황석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거목(巨木)이었고, 혼란 속에서도 몰려든 황금은 만금장의 덩치를 더욱 키워 버렸다. 결국 무수히 많은 충돌을 만들어 내고도 만금장을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세상이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온 뒤로는 더 이상 어찌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루어진 남궁세가와 소주 주민들 사이의 골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때문에 남궁세가의 무인들 역시 소주 방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가 봐야 환영도 못 받고 눈초리만 쏟아진다.
성질대로 검을 뽑았다가는 곧바로 만금장과 충돌이 발생한다.
이때 당시 불리한 것은 역시 먼저 검을 뽑은 측이었다.
때문에 화가 나도 참아야만 한다.
남기 어디를 가든 인(忍) 자를 써 본 적이 없는 남궁세가의 무인들로서는 심기가 편할 수가 없는 여정인 것이다.
‘어서 끝내고 가야지.’
남궁전혁의 명령에 따라 소주로 들어선 창천단의 삼(三) 대주 남궁호의 머릿속은 그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다가온 점소이의 질문에 아무것이나 가져오라는 의미의 가벼운 손짓으로 대신 답한 남궁호가 시선을 좌측으로 돌린다.
그와 함께 명령을 받고 따라나선 창천단 오(五) 대주 남궁혁이 쓴웃음을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네.”
“젠장.”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그들, 창천 삼대가 오기 삼 주야 전 창천 오대는 먼저 이곳 소주에 도착했다. 목표는 그들과 같았다. 대장장이, 달리 용장(龍匠)이라고도 불리는 만총을 찾을 것. 삼 주야간 밤잠도 줄여 가며 소주 곳곳을 뒤진 창천 오대가 그의 흔적을 쫓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뒤지지 못한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결국 만금장인가. 빌어먹을.”
창천 오대가 먼저 도착해 더 많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욕설을 인내하기가 힘들었다.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소주에 들어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만금장과 부딪치는 일을 꺼린다. 어찌 엮여서 좋은 경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탓이다.
결국 이 정도쯤 되면 평소라는 가정하에, 물러섰을 터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고, 더러워서 피한다며 만금장을 향해 침을 뱉고 등을 돌렸겠지.
하지만 이번 명령은 남궁전혁의 지시다.
현재 가문 내에서 가장 입지가 확고한 인물이자, 권력의 중심인 그는 차기 가주로 확정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눈에 들어서 나쁠 것은 없고, 눈 밖에 나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외당 제일 무력 조직이라고 볼 수 있는 창천단 단주(團主)의 줄이 그와 끈끈히 연결되어 있었다.
창천단에 속해 있지만, 대(隊) 하나를 이끄는 남궁호의 입장에 있어서는 먼 남궁전혁보다, 가까운 창천단주의 불호령이 더욱 두려웠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단순한 불호령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고 말이다.
“단주께 보고는 드려 봤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은 남궁호의 시선이 남궁혁을 향한다.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한다는 듯 쓴웃음을 지은 남궁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오전에 답신이 왔네. 보겠나?”
“됐어. 본다고 달라지나.”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이번 일의 중요도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떻게? 만금장은 남기에서 남궁세가 다음으로 꼽힌다. 이것도 만금장이 소주 내에만 머무르기에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만금장에서 손님일 것이 분명한 만총을 빼 온다. 무력은 당연히 안 된다. 회유? 대쪽 같은 소주 대인의 성격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협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정보는?”
“아직…….”
“…….”
남궁호는 속에서 또 한 번 뛰쳐나올 뻔한 욕을 억눌렀다. 이런 상황에 창천 오대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말을 해서 척을 질 필요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힘을 합쳐 방법을 강구하는 게 옳았다.
“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더 없었나?”
“일단 단주께서 직접 오시는 중이라고는 하더군.”
그건 또 나름 다행이다.
“단주께서도 큰 기대는 안 한다고 하시더군. 가능하면 도착 전에 빼내 올 것. 안 된다면 정보를 되도록 많이 모아 놓을 것.”
“어찌 됐든 만금장 문을 두들겨야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군.”
“거기서 끝인 게 어딘가?”
남궁혁의 말마따나, 이 정도가 다행이다.
고개를 주억인 남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점소이가 내온 소면이 상 위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시선은 가지 않았다.
“지금 먹고 가 봐야 다 얹히기나 하지. 빨리들 움직이자.”
남궁호의 말에 들어 올리던 수저를 내린 창천 삼대가 뒤를 따른다.
“동감하는 바야.”
쓴웃음을 지은 남궁혁이 그 뒤를 따랐다.
만금장과 남궁세가.
한동안 조용했던 남기 이대 세력이 다시 한 번 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마음가짐을 굳게 다잡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만금장의 대문을 두드렸다. 놀란 만금장 무인들의 달갑지 않은 안내가 이어졌고, 그들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방까지 배정 받았다.
그러고서도 이 주야를 기다렸다.
은근슬쩍 몰래 정찰을 나가 보기도 했지만 두 눈을 부릅뜬 만금장 무인들의 시선을 피하는 건 또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이득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만금장에 들어선 이후로 세 번째 해가 떴을 때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만금장의 부속 집단이라 볼 수 있는 만금표국(萬金?局)의 대표두(大?頭) 여선위였다. 붉은 비단으로 이루어진 접객당에 들어선 남궁호와 남궁혁, 두 사람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난색을 감출 수 없었다.
“큼, 우리는 만금장주님을 뵙고자 했습니다만.”
“어째서 위휘봉선(偉輝奉先)께서 이곳에 계신지……?”
위휘봉선, 여선위는 남기뿐만이 아니라 중원 전체에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팔척장신에 우람한 체형, 거대한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그는 타고난 장사(壯士)이자 용장(勇將)이었다. 한때 북방 전장을 누비던 장수였던 그는 무림에 나선다면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위인이라는 의미에서 달리 무외삼제(武外三帝)로까지 뽑혔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만금장에 오게 된 사연은 근 백 년 이내에 가장 큰 전투였다는 북방대전에서 세외팔왕(世外八王) 중 하나였던 칸 라무챠의 목을 벤 이후였다. 아군의 위기에 단신으로 돌격해 라무챠의 목을 벤 그의 용맹과 무공은 대단했지만, 뒤를 받쳐 줄 동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겁에 질린 신참 내기 사령관은 혼돈에 빠진 적을 두고 후퇴를 명했고 당시 퇴로를 뚫다 죽을 뻔한 그를 구한 이가 바로 소주 대인, 황석후였다.
세외까지 나가는 긴 상행에서의 우연한 만남에서 여선위는 자신을 버린 군(軍) 대신 은인을 택했다. 우연이 인연이 된 흔한 이야기였다. 하나 여선위가 가진 위명과 그의 업적, 또한 무공을 생각한다면 이 흔한 이야기가 남궁세가의 입장에서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남기제일이라고 불리는 그들 남궁세가에도 우내십존에 속한 고수는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전설 속 여포 봉선의 무와 기세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그가 가지지 못했던 아름답고 훌륭한 충의와 신의를 가졌다고 하여 위휘봉선이라 불리는 여선위는 우내십존에 버금가는 고수로 평가되는 무외삼제다.
물론, 그조차도 이제 와서는 옛말.
비록 표국의 대표두가 되어 스스로 무명(武名)을 깎아내렸지만 여선위는 작금 무외가 아닌 무내(武內)에 있다. 만금장을 적으로 생각하는 남궁세가의 입장에서야 부담이 되는 인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주님은 바쁘시다.”
“그, 그래도…….”
“본론만 말하도록.”
남궁호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거듭 말해, 남궁세가는 남기 어디를 가든 어깨를 편다.
결코 남에게 주눅이 들지도 않으며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설령 소주에서 만금장의 무인과 만났다고 하여도 다를 것은 없다. 비록 곤란하긴 하겠지만 눈을 피하고 어깨를 좁히지는 않는다. 하나 상대가 여선위가 되니 그조차도 힘들었다. 절로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며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다.
남궁혁이라 해도 사정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선위가 가진 위엄과 무게는 고작 그들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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