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0화
고개를 들이미는 걱정을 경호는 가볍게 다스렸다.
이제 황준우도 열일곱이다.
마냥 어린아이도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이 있고, 개념이 있을진대 정도를 벗어나겠는가?
‘도련님 말대로 쓸데없는 고지식함이다.’
마음을 놓자.
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준우의 내친걸음은 소주 도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엄청난 소비가 이루어졌다. 지난 세월 동안 사치라고는 담벼락을 쌓고 살았던 황준우가 지갑을 열고 온갖 보석과 장식품을 사기 시작하고, 뜬금없이 객점에 들러 찾아온 손님 모두에게 식사와 술을 대접하며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런 기행이 자그마치 칠 주야 내내 이루어졌다. 황준우는 쉬지도 않고 돈을 쓰고, 쓰고, 또 썼다. 경호는 그런 황준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릴 수조차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 하면 황준우가 손을 내저으며 도망가듯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돈을 제법 썼지만 덕분에 소주 주민들과의 우호는 돈독히 다졌다. 아버지인 황석후와 다르게 아직 소주에 별 다른 영향력이 없던 황준우에게 있어 이러한 행위는 마냥 나쁘다고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황준우는 한동안 해 왔듯 마찬가지로 눈을 뜨자마자 또다시 소주의 도심지로 향했다. 하지만 전날과는 달랐다. 가는 길에 몇 가지 물건을 더 사기는 했으나, 걸음이 객점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향한 곳은 도심지의 빛 속에 가려진 어두운 다리 밑 길목.
오물이 가득하고 날벌레가 들끓는 그 안으로 들어선 황준우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거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평범한 거지는 아니었다. 허리춤에 띠를 두 겹이나 두르고 있는 거지는 이름 높은 무림 문파 중 하나인 개방(??)에 속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정보를 원하면 하구(下構) 혹은 흑촌(黑村)을 향해라.
그중 전자는 개방을 뜻하며 후자는 하오문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원강호에 몸담은 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경호는 황준우가 제대로 일을 할 마음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인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정보가 필요할 테고 그 정보를 얻을 곳이 개방이라면 나쁘지 않은 상대였으니 말이다.
다만 경호가 놀란 부분이 있다면 그러한 거지 소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황준우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처음이 아니라 몇 번은 겪었던 것처럼 시선조차 두기 힘든 오물이 가득한 다리 밑을 종횡무진한다. 솔직히 좋은 집에서 나고 자란 도련님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나 그가 그렇게 거지들에게 물어물어 소주의 개방 분타주라는 인물을 만나 벌이는 일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편이 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 주야간 미친 듯이 돈을 써 댔던 모습조차 우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남궁세가 전체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실례지만 어떤 용도인지 물어도 될까요?”
소주의 개방 분타주, 철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눈치가 좋고 영악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한눈에 황준우가 누군지 알아보았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하지만 방금 황준우가 원한 목록은 그의 예상을 현저히 웃도는 것이었다.
“어떤 용도냐니, 다 필요가 있으니까 찾는 거겠지.”
“죄송하지만 명확한 목적을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남궁세가는 정의회(情意會)에 속한 정도 문파입니다. 공자께서 원한다고 하셔도 쉽게 알려 드릴 수 없다는 뜻이지요.”
“언제부터 무림맹이 정의회를 챙겼다고 그러는 줄 모르겠네. 그냥 딱 잘라 말해. 팔 거야, 말 거야?”
“…….”
철개의 두 눈에 고민이 깊어졌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구대문파를 비롯한 개방이 속한 무림맹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정의회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각자 정도 문파를 대표한다고 만들어진 집단이지만 그 성격이 너무 다르다. 구대문파는 민생의 구제와 명분을 우선시한다면 정의회는 그 이름답지 않게 가문의 사업과 이득을 좇는다.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부딪칠 수밖에 없고, 결국 중원강호라는 넓은 무대를 쪼갠 채 경쟁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것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개방을 택했고, 찾아왔다.
이득을 좇는 집단의 성격상 하오문과 정의회는 아닌 척 합(合)이 맞을 수밖에 없다. 아마 남들 모르게 적지 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거래를 지속해 나가고 있을 터였다. 반면 개방은 엄연한 무림맹의 소속으로써 정의회와는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른 조직이었다.
‘그사이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야 상관없지.’
본래 황준우가 활동하던 시절의 무림에 있어 정도 문파는 오로지 무림맹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성격이고 방향이고 마도라는 거대한 경쟁자에 황준우라는 공공의 적까지 있었으니 어쩔 수 없던 때랄까? 확실히 지금은 그때와 다른 듯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갈라졌다.
당시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칠 주야간 소주의 주민들, 혹은 외지에서 온 인물들과 어울리며 현재의 중원과 무림의 정세와 분위기를 완벽하게 알게 된 황준우는 여유로운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철개를 바라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런 황준우와 몇 번이나 시선을 마주쳤던 철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같은 정도 문파 소속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지요.”
“그래? 알겠어. 흠, 어떻게 한담. 나는 돈을 조금 쓰더라도 꼭 그 정보를 얻고 싶은데.”
“…….”
철개도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지갑을 열기 시작한 만금장의 소장주가 미친 듯이 돈을 쓰고 있다. 굳이 돈이 적게 들어도 될 일마저 크게 써서 판을 키운다. 씀씀이와 배포가 장강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였다.
찾아오는 이는 고작 창천단인데, 남궁세가 전체의 정보를 요구한 것도 그러한 배포의 연장선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이건 확실히 큰 건이긴 한데…….’
저 배포 큰 만금장의 작은 도련님이 남궁세가라는 거대 무림 세력 전체 정보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인상이나 분위기를 보아 그 엄청난 금액을 듣고도 자존심상 한 번 내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겠지. 결국 그는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이번 일만 잘 주선하면 호법으로 지위가 오를 수도 있어.’
개방의 호법이 무엇인가?
자그마치 사결제자다.
고작 띠 하나 차이지만 분타주에 불과한 삼결과 사결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직책이 가진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무공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삼결제자, 그러니까 분타주 역시 무공을 익히기는 한다. 하나 능력을 인정받거나 출신이 다른 극히 일부를 제외하자면 기껏해야 하위 무공 몇 가지를 전수받을 뿐이다. 험난한 무림에서는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 수준. 하지만 사결제자부터는 다르다. 그때부터는 개방을 지키는 호법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무공을 전수받게 된다. 양민들이 헛소문처럼 외치는 강을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고, 하늘을 날듯이 종횡하는 진짜 고수가 되는 것이다.
무림에 몸담은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그런 모습을 꿈꾸곤 한다.
물론 실제로 철개가 그런 정도의 고수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나이 이립이 다 되어 가는 그는 상승 무공을 익히기에는 많이 늦은 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못해도 일류의 벽은 두들겨 볼 수 있다.
또한 애초부터 거지 집단인 탓에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경우가 대부분인 사결제자들 사이에서는 제법 어깨를 펼 수 있을 터였다. 말만 분타주지 큰 권한도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작금의 상황보다는 몇 배나 나아진다. 분명 그렇게 될 터였다.
그 욕심이 철개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생각 없지? 그럼 나, 간다? 어디 하오문이라도 찾아가 봐야 하나. 어휴.”
결정을 내리기 전, 결국 황준우가 먼저 등을 돌렸다.
순간 흔들리던 철개의 마음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 어차피 내가 어찌할 수 있을 정도의 일도 아니야?’
이런 큰 건에서 그의 권한은 기껏해야 주선하는 정도.
책임이라면 윗줄에서 질 일이다.
“자, 잠깐! 어차피 하오문에 가 봐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 거요!?”
결국 질렀다.
“그래서 뭐, 팔 거야?”
황준우가 되물었고, 철개는 고개를 주억였다.
흔히들 개방을 일컬어 백만 방도라고 한다.
이는 허리춤에 띠를 하나라도 찬 일결제자부터를 뜻하는 것이고, 아직 띠조차 못 두른 백의개까지 더한다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였다.
그런 거지들의 대다수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로 쓰고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개방이고, 때문에 거지들의 집단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모두가 그런 것일까?
황준우는 내심 차오르는 비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개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군.’
정말 하늘을 지붕이라 생각하고 땅을 이불이라고 본다면 돈이 왜 필요하겠는가? 굳이 개방이라는 이름을 걸고 정보를 팔아 장사를 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어쨌든 거대한 집단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해서라고? 그럴 거면 거지라는 이름을 쓰지 말았어야지.
‘뭐, 내 알 바는 아니고.’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정의회니 무림맹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둘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준우는 그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가 겪은 무림강호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제 와서 앙금은 없었다.
딱히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야지.’
몇 주야간 하지 않던, 어울리지 않는 일을 몇 가지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상 큰 관심이 없던 소주의 정보와 흐름을 알 수 있었고, 남궁세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사이란 걸 완전히 인지했다. 언젠가 부딪치게 되어 있고 계속해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실 창천단주인지 뭐시긴지 하는 놈 정도야 정보 같은 것 없어도 상관없겠지만.’
창천단주는 말 그대로 밑바닥에 위치한 끄나풀일 뿐이다. 진짜 몸통은 남궁세가라는 집단 그 자체. 그런 의미에 있어 이번 정보 수집은 돈이 많이 들더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몇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
황준우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련님, 남궁세가 전체에 대한 정보라니…… 그 값어치를 짐작은 하고 계신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황준우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던 경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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