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화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침묵 속에서 늘어져라 앉아 있던 황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 말 없지? 다음부터는 별일도 없으면서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자고.”
“……!!”
남궁장언의 두 눈에 당황이 어렸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고, 실제로 그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를 상대함에 있어 누가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나가 버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데 그 일이 일어났다. 황준우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짜 접객당 바깥으로 나가 버린 것이다.
“다, 단주님?”
갑작스러운 사태에 얼어 있던 남궁호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동시에 접객당에 놓인 상 하나를 주먹질로 반으로 쪼개 버린 남궁장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온다.”
이를 가는 그의 붉은 눈에 짙은 분노가 떠올랐다.
다음 날, 예상대로 남궁장언이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이른 오전에 말이다. 황준우는 이번에는 전날과 달리 곧바로 그런 남궁장언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바쁘다고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해.”
“그, 그래도 될까요?”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여도 남궁세가의 창천단주다. 전날에도 황석후를 찾았는데 황준우가 나섰다. 심지어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 나와 버리기까지 했다. 한데 오늘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검을 뽑는 사이가 아닌 이상 조금 난감한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전해.”
황준우는 웃으며 손을 저은 후 머릿속으로 남궁장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성격이 다급한 편이고 권위적이다.’
언뜻 생각하면 단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문제다.
하나 그것이 또 남궁장언의 장점이기도 했다.
‘성격이 급하니까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싫어해서 신중하기까지 해.’
권위를 빌려 상대를 괴롭히는 방법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가 외부의 행사에 나서면 대부분의 인물들은 남궁장언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강한 권위 의식을 가진 그는 작은 꼬투리마저 부풀려 원하는 바를 얻어 내곤 했으니 말이다.
“상대에게 너무 빌미를 주는 게 아닐까요?”
웃고 있는 황준우를 향해 경호가 물었다.
“빌미?”
“아무리 그래도 남궁세가의 창천단주니까요. 얼굴조차 보지 않은 채 돌려보낸다면 분명 이걸 빌미 삼을 텐데…….”
“아아, 난 또 뭐라고. 그걸 바라는 거야.”
황준우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거듭 말해 남궁장언은 권위 의식이 강하고, 그를 통해 빌미를 잡아내 명분을 만들곤 한다.
“딱 좋아. 나 그런 사람 좋아하거든. 비열할 정도로 지독한 사람.”
“……도련님?”
“어쨌든, 원하는 바니까 기다려 보자고. 아, 그리고 어제 남궁장언인가 남궁장충인가 하는 그놈이 우리 집 탁상 부수고 갔다며? 그거 장부에 적어 두고.”
“알겠습니다.”
벌써 몇 번째,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황준우를 따르는 경호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고 상식이 있으니 어릴 때와는 다를 거다?
‘왠지 더하는 것 같은데…….’
도리를 알고 인정을 행한다는 백교의 평가마저도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확하게 칠 주야였다.
일곱 번의 밤과 낮이 지나간 후, 남궁장언이 검을 뽑았다. 그 소식을 들은 황준우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접객당으로 향했다. 사실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에는 조금 기대도 했다. 기세 정도가 아니라 살기가 등등한 상태에서 검까지 뽑았다. 사달 하나쯤은 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별일 없네?”
문을 열고 들어선 황준우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분명 남궁장언은 검을 뽑고 살기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무언가를 부수지도, 베지도, 난리를 치지도 않았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나름대로 침착성을 유지하기 위함일 터다.
그런 남궁장언을 보고 피식거리는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게. 다시 만났네.”
“만금장의 소장주인가?”
“쓸데없는 호구 조사하러 온 거면 그만 가고.”
“이…… 건방진!”
“진짜 할 말 없나 보네. 그럼 또 칠 주야 기다리든지. 바쁜 사람 이만 간다.”
황준우가 이번 역시 미련 없이 문을 돌려 접객당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동시에 커다란 콧김을 내뿜은 남궁장언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게냐? 어린놈이 귀한 곳에서 자랑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이 아저씨 글렀네, 쯧.”
혀를 찬 황준우가 다시금 접객당 바깥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고 검을 뽑은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남궁장언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접객당 내부 날카로운 검기가 수없이 번뜩였다.
“우리 집 접객당에 귀한 물건이 조금 많지 않나?”
“많지요. 근래에는 도련님이 사두신 보물들도 제법 쌓여서 더…….”
답을 하던 경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적어 놔. 그게 다 돈이야, 돈. 흐흐.”
음흉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황준우의 뒷모습을 보는 경호의 등 뒤로 축축한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야?’
고작 열일곱.
많다면 많지만, 적다면 적은 나이다.
심지어 황준우는 집 안에서 자라 바깥 경험이 없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이 빼어나고 예측할 수 없이 튄다. 자신이 열일곱이었던 때를 떠올린 경호의 눈에는 이제 옅은 감격마저 차올랐다.
‘결국 이것도 싸움이란 말이야.’
반면 황준우는 이번 사건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남궁세가가 원하는 것이 있고, 황준우는 그것을 내줄 생각이 없다.
그러면 싸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책상 앞에서 입을 놀린다 한들, 이것은 싸움이다. 그리 생각한 것만으로도 황준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귀책이 떠올랐다.
싸움의 귀재.
무공 실력으로 정점에 올랐던 그가 황금과 귀책마저 두른 채 싸우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고금제일의고수가 되어 가는 과정에 선 황준우는 조금도 조급함이 없었다.
또다시 삼 주야가 흐르고, 남궁장언이 직접 그의 앞에 찾아온 순간까지도 말이다.
“손님은 접객당에 계셔야지. 여기까지 오면 되나?”
가벼운 복장으로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황준우가 웃는 얼굴로 말한다.
동시에 검을 뻗은 남궁장언이 황준우를 향해 뜨거운 분노를 토했다.
“네 이놈! 아무리 만금장의 위세가 높다고는 하나 나 역시 대 남궁세가의 창천단주인 바! 보름을 가까이 얼굴조차 보이지 않은 채 무시한 일은 도리가 아닌 것이다! 알고 있느냐!?”
“훈계를 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네 이노옴!”
“아저씨, 계속 말하지만 본론만 하자.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소주에 발 한 짝도 못들이게 할 수도 있어.”
황준우의 스산한 말에, 분노를 토하던 남궁장언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농담이 아니다.
남기 내에서 다른 누군가가 저와 같은 말을 했다면 비웃음을 보였을 것이다. 오히려 상대를 남기 어디에도 발 들이지 못하게 내쫓았을 테지.
하지만 소주에서 만금장은 다르다.
마음먹고자 한다면 정말 그들을 완전히 바깥으로 내쫓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서로 피를 보자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양보를 해야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당장의 임무는 실패하게 된다. 남궁전혁으로부터 이번 임무의 막중함을 전해 들은 남궁장언의 입장에서야 그렇게 허망하게 물러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총, 만총을 내놔라. 그러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해 주겠다.”
결국 그의 입에서 먼저 본론이 튀어나왔다.
본래 책상 위의 협상이란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상대 쪽이 불리한 법이다. 때문에 서로가 가진 패를 최대한 감추려 하는 것이고. 물론 황준우는 남궁장언의 그러한 목적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맨입으로?”
“맨입! 맨입이라니! 네놈과 만금장의 무례를 잊어 주겠다는 것 아니냐!?”
“무례라…….”
황준우의 입가로 조소(嘲笑)가 떠올랐다.
“언제 남궁세가랑 우리가 무례를 따지고 그럴 사이였던가? 그런 식으로 치면 허락도 없이 남의 집 안마당까지 들어온 아저씨가 벌이고 있는 행패는 무례가 아니고?”
“이, 이, 이 어린놈이!”
“경호!”
황준우의 외침에 재빨리 근처로 다가온 경호가 품에서부터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읽어 봐.”
황준우는 그를 받아 남궁장언에게 던졌다.
빳빳하게 펼쳐진 종이가 마치 비수처럼 그의 손안에 도착했다.
‘익힌 무공이 제법이군.’
그런 황준우의 행동에서 순식간에 또 다른 정보를 얻어 낸 남궁장언이 찬물이라도 맞은 듯 머리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힘없는 종이를 빠른 속도로 상대에게 날려 보내는 기술은 못해도 일류 이상의 무위와 반 갑자 이상의 내력을 필요로 한다. 고작 열일곱인 황준우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굉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세가나 구대문파에서 나온 후기지수 수준인가.’
제대로 된 문파도 아닌, 상승 무공 구결을 몇 개 가지고 있는 상단에서 이만한 인재가 나왔다는 것은 분명 주목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무수한 생각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는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 차갑게 식었던 머리에서는 다시 열이 들끓었다. 황준우를 바라보며 머리끝에서 목까지 붉은 핏줄을 가득 세운 남궁장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이…… 무슨……!”
“댁이 우리 집 접객당에 머무는 동안 벌인 손해에 대한 배상 내용이야. 그중에는 내가 진짜 아끼던 보물들도 많았는데 후……, 안타까워. 그거 다시 구하려 해도 쉽지 않을 텐데.”
“네, 네놈이……!”
“그러게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았어야지. 어린애도 아니고 성질난다고 아무렇게 칼부림하면 쓰나. 대충 금자로 삼만 문 정도 될 거야.”
“말도 안 된다!”
접객당에 척 보아도 귀해 보이는 물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만금장의 접객당이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중에는 그의 안목을 감탄하게 하는 보물도 몇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금자 삼만 문이라니!
그 정도면 남궁세가 전체의 반년 운영비에 맞먹었다.
남궁장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인 것이 당연했다.
“말이 왜 안 돼? 거기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귀한 줄 알아? 이제는 돈 주고도 못 살지도 모른다고. 거기다 순식간에 귀한 보물을 잃은 내 마음은? 그 상처는 누가 치료해 주나? 솔직히 금자 삼만 문이면 거저지, 거저. 안 그래, 경호?”
“예? 예!”
얼떨결에 큰 목소리로 답한 경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남궁장언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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