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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3화 (33/373)

학사재생 33화

“납득할 수 없다! 애초에 네놈이 그런 시건방진 태도로 나서지만 않았어도 없었을 일 아니냐!?”

“아, 이 아저씨 또 말이 안 통하네. 댁이 어린애냐고? 나이가 몇이야? 설마 나보다 어린가?”

황준우의 막말에 당황한 것은 남궁장언이 아닌 그 뒤에 선 남궁호와 남궁혁이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몇 날 며칠 옆에서 보좌하며 괴롭힘 당하던 두 사람은 남궁장언이 가진 권위 의식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황준우의 막말이 그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고 있을지도 충분히 짐작했다.

검을 뽑은 남궁장언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흘렀다.

더 이상 뜨거운 폭발은 없었다.

대신하여 차가운 분노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좋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꾸나. 네놈도 무공을 익힌 것 같으니 순수하게 무(武)로써 승부를 보자. 내가 이긴다면 만총을 내놓아라. 만약에라도 네가 이기면 금자 삼만 문을 내 이름을 걸고 모두 지급하도록 하지.”

기다리던 이야기가 왔다.

하지만 황준우는 덥석 먹이를 물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야.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댁은 무공을 익힌 무가의 사람이고 난 상가의 자식이라고? 거기다가 나이도 댁이 훨씬 많은데 그런 뻔한 승부를 하자고?”

“삼 초를 양보하마.”

“양보의 문제가 아니잖아. 내 입장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거지.”

“삼만 문이 아닌 오만 문을 배상하도록 하지.”

“단주님!?”

놀란 남궁호와 남궁혁이 동시에 소리쳤다.

말한 바 있듯, 금자 삼만 문은 남궁세가 전체의 반년 예산과 맞먹는다. 그렇다면 금자 오만 문은? 거의 일 년 예산이라는 뜻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창천단주에게 없다. 아니, 남궁세가의 그 누구라도 확언할 수 없는 일이다. 남궁세가주라고 하여도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었다.

“금자로 십만.”

“십만이라니!”

“무리입니다!”

남궁호와 남궁혁이 빠르게 남궁장언을 말렸다.

십만 문이면 남궁세가의 운영비 이 년 치에 가깝다. 실제로 그 돈을 불려서 사용한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클 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하나 이미 눈이 돌아간 남궁장언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를 간 남궁장언이 입을 열었다.

“좋다. 대신해서 이번 승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쪽에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을 추가하지.”

“당연한 거지. 그래야 공평한 승부 아니야?”

남궁장언의 말에 밝은 웃음을 그린 황준우가 다시 손을 내뻗었다.

“경호, 종이랑 붓.”

“뭐 하는 짓이냐?”

“책임질 일 없게 하자며. 약속은 확실히 해야지. 내가 상인의 자식이라서 그런지 이런 건 문서로 남기는 걸 더 좋아하거든.”

“마음대로 해라.”

남궁장언이 오히려 환영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곧 두 사람은 남궁호와 남궁혁, 그리고 경호를 비롯한 만금장의 식솔들이 보는 앞에서 승부에 대한 내용을 적고 혈판장(血判狀)을 찍었다.

직후 핏물이 흐르는 손바닥을 가볍게 감싼 남궁장언과 황준우가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괜찮을까?”

남궁혁의 걱정 어린 음색에, 남궁호가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당연히 괜찮아야지. 단주님이 저런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연무장 중앙에 선 두 사람. 핏물이 흐르는 손에 붕대를 감은 후 검을 쥔 남궁장언과 외상을 대충 치료하고 뒷짐을 진 황준우의 모습은 참으로 기이했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큰 금액이 왔다 갔다 한 탓에 걱정이 앞섰지만 실상, 이 승부는 재지 않아도 결과가 뻔했다.

아무리 만금장에 돈이 많다지만 무공이란 금력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거대한 무가의 근간이 되는 상승무공과 신공절학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종류의 보물이었다. 물론 만금장쯤 되면 감춰 둔 상승무공 하나쯤 있겠지만 남궁세가의 역사를 함께한 절학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한 사실이 바탕이 되는 것에 더해, 창천단주는 오랜 시간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갈고닦은 삼십 중반의 절정고수였다. 무인으로서의 기량이 가장 정점을 향할 때다. 반면 황준우는 이제 고작 약관도 되지 못한 열일곱 나이의 애송이다.

‘제가 어미젖을 먹을 때부터 무공을 배웠더라도 저딴 놈이 단주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수많은 황금으로 영약을 떡칠했다 하여도 고작 내공이 높을 뿐이다.

무공 승부는 단순한 내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호와 남궁혁을 비롯한 남궁장언까지, 황준우가 이러한 만용을 부린 데에는 그러한 방대한 내공이 밑바탕 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삼 초를 양보하마, 애송이.”

“그래도 되겠어? 금자가 십만 문이나 걸렸는데?”

남궁장언의 여유에 헛웃음 지은 황준우가 되물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사나이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오늘 이후의 미래에 대한 일이다.”

약조를 확실히 지키고,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혈판장에 손도장까지 찍은 상황. 남궁장언은 가릴 것이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목숨까지 앗아 가지는 않더라도 어디 하나쯤은 못쓰게 만들어 주는 일 정도는 간단했다.

‘오른팔로 할까?’

기왕이면 걷지도 못하게 다리가 낫겠다.

결심한 남궁장언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오거라.”

자신만만한 음성을 받은 황준우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사양 않고.”

동시에 황준우가 남궁장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황한 남궁장언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우선 일 초식.”

귓가에 들려온 낮은 목소리와 함께 남궁장언의 세상이 반 바퀴 크게 돌았다.

괴상한 것을 느꼈을 때에는 뒤집힌 그의 시선이 웃고 있는 황준우의 두 눈과 마주한 뒤였다.

“이 초식.”

“꺼어억-!”

망설임 없이 그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황준우의 몸이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마지막 삼 초식.”

짧은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 남궁장언의 의식이 날아갔다. 남궁세가의 대 창천단주라 자랑하던 그의 몸이 공중을 날아 연무장 구석에 위치한 벽에 처박힌 것도 순식간이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고 새하얗게 뒤집힌 눈으로 벽 사이에 박혀 꿈틀대고 있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끝나 버렸네?”

“…….”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상황에 좌중에는 침묵이 흘렀다.

지금 그들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아니지, 보긴 봤나?

그냥 황준우가 사라졌고, 불빛이 번뜩한다 싶은 순간 남궁장언의 육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실상 삼 초식도 아니었다. 그저 손과 발을 합쳐 도합 세 번 썼을 뿐. 대련이라고 보기도 민망한, 승부라고는 말할 수조차 없을 일방적인 능욕이었다.

“다, 단주님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궁호가 떨리는 시선으로 머리를 잡았다.

입으로는 창천단주를 찾았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보다 큰 위기감이 스쳐 지나갔다.

‘금자 십만 문!’

어떻게 할까?

‘혈판장!’

그가 고민하는 사이 남궁혁이 몸을 날렸다.

상황이 어떻게 된지도 모른 채 혈판장을 멍하니 들고 있던 시녀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손길이 이어졌다.

“어허!”

그 손길을 가볍게 쳐낸 이는 분명히 연무장 중앙에 서 있던 황준우였다.

“어딜 손장난을 치려고 하나.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인데 어딜 물러 보려고.”

“이, 이건 무효요!”

남궁혁이 다급히 외쳤다.

본인이 말하고도 말도 안 된다 생각했지만, 머릿속에는 통째로 금자 십만 문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속한 남궁장언이나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던 남궁호와 남궁혁이나 모두 끝이다. 그냥 목이 달아나는 측이면 차라리 낫다. 무섭긴 하지만 그 순간 끝이니까. 하지만 가문은 그들의 책임을 물어 곧장 죽이지 않을 것이다. 선의랍시고 목숨은 살려 두되 단전을 폐하고 근골을 자른 채 가문에서 쫓아낼 뿐이겠지. 그게 더 가혹하다. 남궁세가에서 쫓겨난 힘없는 무인. 이후 그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헛소리인 거 알지? 우린 혈판장에 적은 대로 공평하게 승부했고, 나는 이겼을 뿐이야. 언제부터 대 남궁세가가 말을 이렇게 앞뒤로 바꿔 댔나?”

“하지만 삼 초를 양보하셨지 않소!?”

“내가 해 달라고 했나? 본인이 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무효요. 무효란 말이오! 삼 초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승부가 달랐을 게요!”

남궁호가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의 의견도 황준우의 조소를 샀을 뿐이었다.

“거참, 막무가내도 수준이 있지. 너희가 보기에는 저 자존심만 강한 아저씨가 삼 초를 양보 안 했다고 해서 나한테 이겼을 것 같아?”

“무, 물론이오.”

“개가 짖네, 개가 짖어. 좋아 내가 기회를 주지. 저 아저씨 일어나면 또 한 번 도전해 봐. 그때 돼서는 삼 초 양보하지 말고. 아니지, 내가 양보할 테니까 다시 해 보자고. 알겠지?”

“그건…….”

끼어들었던 남궁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누가 보아도 실력 차이가 극명한 승부였다.

절정고수인 남궁장언이 제대로 반응조차 못 했으며, 일류의 극(極)에 달한 남궁호와 남궁혁은 상황조차 알지 못했다. 또 싸운다 한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본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결과에 승복하고 가든지. 아, 혹시 뭐 이 대 일로 한 번 더 붙고 혈판장 하나 더 쓸 생각 있으면 남아 있고. 이번에는 선심 써서 금자 오만 문쯤으로 할까? 내가 십 초쯤 양보하는 걸로 하고 말이야.”

“우리에겐 그런 권한이 없소.”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을 향해 가벼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럼 어서 저 벽에 박힌 아저씨 꺼내서 꺼져. 남의 집안 시끄럽게 하지 말고.”

“…….”

힘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는다.

우길 만한 명분도 더 이상 없다.

결국 고개를 꺾은 두 사람이 황준우의 말에 따라 의식을 잃은 남궁장언을 들쳐 업고 힘없는 걸음으로 연무장 바깥을 향했다. 그 안쓰럽기만 한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황준우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아, 금자 십만 문에 대한 청구서는 혈판장 동봉해서 남궁세가에 잘 전달해 줄게. 아주 안전하게 잘 모셔다 드릴 테니까 혹여나 있을 도적떼 같은 건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등 뒤가 서럽게 떨렸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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