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4화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아니, 사실 폭풍이 지나갔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힘없는 짐승 떼가 폭풍이라는 자연재해에 휩쓸려 쫓겨난 꼴이라고 해야 할까? 폭풍은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순식간에 큰 사건 하나를 꿀꺽 집어삼킨 폭풍, 황준우가 멍한 표정의 경호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이 혈판장 책임지고 황산까지 배달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그, 글쎄요…….”
“대표두님쯤 되는 분 아니면 안심하고 맡기기 힘든데……. 직접 가기는 귀찮고.”
턱을 쓰다듬는 황준우의 얼굴은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못해도 세 사람의 명운, 아니지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가문을 크게 휘두를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을 한 손에 쥔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거 진짜 받아 내실 생각이십니까?”
경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경호. 당연히 받아야지.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상인은 신뢰로 살아간다고 했단 말이야. 받기로 한 걸 받지 않으면 그만큼 신뢰가 깎이겠지? 상인답게 하잔 말이야, 상인답게.”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은 아닐 텐데요…….”
“뭐 어때, 그래서 우리에게 피해되는 게 있나?”
“물론…… 없지요.”
따지자면 이득이다.
남궁세가는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했으며, 괜히 만금장에까지 들러 큰 손해만 보았다. 반면 만금장은 금자 십만 문을 순식간에 쓴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빨리 같은 금액을 벌어들였다.
그 모든 일이 황준우 한 사람의 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경호가 걱정하는 것은 이 일의 파급이었다.
‘장주님과 도련님을 믿고야 있지만…… 휴우, 모르겠구나.’
애초부터 액수 자체가 그가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걱정된 마음에 몇 마디 말을 건넸지만 언제 황준우가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아마 손가락에 꼽을 터였다.
그리고 대다수, 황준우의 뜻대로 한 일 중 잘못된 경우는 없었다.
“잘해 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날 뭐로 보고. 아버지한테 가 봐야겠다. 아무래도 이런 건 나보다 아버지가 잘하실 테니까.”
혈판장을 한 손에 든 채 휘적휘적 연무장 바깥을 향하는 황준우의 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일주야가 더 흐른 뒤, 눈을 뜬 남궁장언은 주변을 둘러본 후 낯빛을 어둡게 물들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알고 있으면서도 제 옆에 대기한 남궁호와 남궁혁을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억이 차라리 꿈이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로 그의 심정은 만신창이였다.
“기억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혈판장은?”
“……죄송합니다.”
남궁호와 남궁혁의 고개가 깊숙이 꺾였다.
그런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남궁장언의 입에서 이내 흘러나온 것은 차가운 웃음이었다.
“흐흐, 탓한들 무엇 하겠느냐. 어차피 네놈들이나 나나 같은 처지인 것을…….”
“단주님.”
“돌아가자.”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남궁장언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궁호와 남궁혁의 시선이 공중에서 엇갈렸다.
“헛생각하지 마라. 내 목을 가져간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생각을 공유하던 두 사람의 몸이 짧게 떨렸다.
“모두 끝이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흐흐, 흐흐흐. 엉망이로구나! 흐하하하!”
긴 탄식을 토한 남궁장언이 광소(狂笑)를 터트린다. 얕보았던 애송이에게 손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잃었다. 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몰래 숨어들어 혹은 도적질로 혈판장을 빼앗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만금장이다. 금자가 십만 문이나 걸린 혈판장을 어찌 다룰지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남궁세가 제일고수라는 검귀(劍鬼)라도 나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돌려 말해, 어차피 그가 나설 정도면 세 사람의 목숨은 이미 없다고 봐야 했다.
이름 석 자나 제대로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웃고 있는 남궁장언의 등을 향해 차가운 눈을 한 남궁호가 말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지친 남궁장언의 목을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는 분명한 도박. 고민 끝에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다른 쪽이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동시에 남궁호와 남궁혁의 신영이 객점에서 사라졌다.
도주한 두 사람을 남궁장언은 쫓지 않았다.
“만수무강? 흐하하!”
웃음이 더욱 커졌다.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 나가는 사람을 보고 무탈하라고 하는 말만큼 우스운 소리가 또 어디 있으랴? 하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남궁장언이 향하는 길이 사지라면 남궁호와 남궁혁이 달려간 방향은 지옥(地獄)이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 가문에 몸을 담고 있었음에도 남궁세가를 모른다. 도망간다는 간단한 선택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흐하하하하!”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남궁장언은 걸음을 황산(黃山)으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그의 무덤이었다.
4. 무기를 얻다
시간이 흐르고 소주를 찾았던 창천단원 모두가 떠났다. 남궁호와 남궁혁, 남궁장언보다 한발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 소식을 앉은자리에서 모두 전해 들은 황준우가 상쾌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 좀 깔끔한 느낌이네. 집안 마당에 대놓고 적을 들이고 있자니 신경 쓰여서 원.”
“……그 세 사람은 어찌 됐을까요?”
“갑자기 그건 왜?”
“문득 신경 쓰여서요. 아무래도 세가에 큰 손해를 입혔으니 벌을 받았겠지요?”
“그 정도면 다행이겠지.”
피식 웃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무림이란 곳은 억지로 들여다봐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경호처럼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고.”
“도련님은…… 마치 겪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경호는 스스로가 말해 놓고도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옆을 지켜 온 본인이다.
황준우가 무림은커녕, 세상에조차 제대로 나가 본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다는 게 몇 배는 더 이상했다.
“꼭 겪어 봐야 아는 건 아니니까. 나 같은 천재는 그냥 척 봐도 알거든?”
허리춤에 손을 얹은 황준우가 웃음을 보인다.
그 말에 헛웃음을 보인 경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가끔 보면 진짜 도련님이 천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천재 맞아.”
“지나친 오만은 병입니다. 장주님께서도 늘 상인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고요. 도련님은…….”
“으아, 또 시작이다. 잔소리!”
“언젠가 만금장을 물려받을지도 모르시는 몸 아닙니까.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도련님께서도…….”
“경호오!”
“아셔야 합니다. 일단 끝까지 들어 보세요.”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경호. 다신 잘난 체 안 할게.”
“다시는 안 한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애초에 도련님은 너무 겁이 없어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주제에 세상물정을 얼마나 아신다고……!”
“어버버, 어버버. 안 들린다. 안 들려. 연이는 뭘 하고 있나. 내 예쁜 동생이나 보러 가야지.”
양 귀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내저은 황준우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방 바깥을 향한다. 그 뒤를 재빠르게 따르며 계속해서 잔소리를 쏟아 내는 경호와 그를 듣고 있는 황준우의 얼굴에는 어째선지 점점 웃음이 떠오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같았다.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태양이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때였다.
“나 이제 다른 무공 배우고 싶어.”
문득 내뱉어진 황서연의 말에 황준우가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 황서연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간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황준우는 멀었다며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돌아올 것이다.
알면서도 때로는 투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까?”
한데 돌아온 대답이 예상외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황준우의 말에 움츠러들었던 황서연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제자리에서 팔짝 뛴 그녀의 얼굴로는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진짜? 진짜 가르쳐 줄 거야?”
“삼재권법도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고, 기본은 잡힌 것 같으니까.”
실제로 황서연은 오랜 시간 꾸준히 무공을 갈고닦은 탓에 안정적인 내력 기반과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도 곧 지학을 바라보니 보다 상승 무공을 익힐 시기이기도 했다.
“뭘 배우고 싶은데?”
“역시 검법이지!”
황서연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무림에 대한 동경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소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검객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리는 낭만이었다. 특히 여인의 몸으로 검의 정점에 달하곤 하는 검후(劍后)의 등장은 그녀의 꿈을 더욱 부추겼다.
“기왕이면 검객이 되고 싶어.”
확고한 의지가 담긴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난감해하실까.’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그중 상계(商界)에 관심을 가진 쪽이 아무도 없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둘 모두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측을 훨씬 선호하는 탓이었다. 가업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난감한 일인 셈이다.
‘어떻게든 하시겠지.’
물론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 전 남궁세가의 일을 담당하며 좋아하지 않는 책상 노름을 꽤나 길게 한 탓에 한동안은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저토록 간절한 눈빛을 쏘아 내는 여동생을 이길 자신도 없었고 말이다.
“검법…… 검법이라…….”
고민하는 척했지만 실상 황준우는 황서연이 익힐 검법을 이미 준비해 둔 채였다.
선녀검공(仙女劍功).
선자기공의 내공 흐름에 가장 알맞게 만들어진 이 검술은 남성에게는 큰 효용이 없지만 여성에게 있어서만큼은 무당의 태극혜검이나 남궁세가의 제왕검형과 같은 수준의 신공절학(神功絶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법이었다.
‘예상하기로는 말이지.’
위력은 충분히 그렇게 만들었지만 황준우가 남성인 탓에 실제 검증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만 그 가능성은 충분했다. 애초부터 천조칠무도 그렇게 만들어진 무공인 만큼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황준우였다.
‘부족한 건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다듬으면 되고.’
무엇보다 선녀검공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실상 위력보다 안정성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불안정한 것을 어찌 가족에게 익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런 류의 무공이라면 차라리 마공(魔功)이라 불러야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