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화
“아버지가?”
“나도, 나도 갈래!”
황준우의 물음에 황서연이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혼자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 돌아온 시녀의 대답은 냉정하기만 했다.
신이 났던 황서연의 풀이 죽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여간에…….”
상처 받은 척 장난을 치던 황준우가 결국 표정을 풀고 웃으며 황서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슥- 슥-!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섭섭하던 황서연의 얼굴이 점점 풀어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밝은 미소가 얼굴 전체에 매달렸다.
“헤에…….”
“금방 다녀올게. 갔다와서부터는 진짜 검술에 대해 알려 줄 테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고 있어.”
“진짜!?”
“만총 영감이 검을 완성했으니까, 기본적인 부분 정도야 괜찮겠지.”
“꺄악-! 사랑해 오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황준우를 안은 황서연이 세차게 볼을 비빈다.
“그럼 다녀올 때까지 좀 부탁할게, 경호.”
“혼자 가십니까?”
“혼자 오라고 하셨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경호는 늘 그의 뒤로 따라붙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애초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면 집무실 내부로도 들어가지 않을 테고, 황석후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단지 섭섭할 수 있는 황서연을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경호는 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경호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다시 한 번 황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방 바깥을 향했다.
시녀의 안내에 따라 황석후의 집무실에 도착한 황준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피 냄새.’
옅긴 하지만 감출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황준우는 불쾌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문 앞에 섰다.
“왔느냐? 그냥 들어오거라.”
기척을 내기도 전 황석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짧게 답한 황준우가 내부로 들어섰고, 곧장 피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상자?’
붓은 든 채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황석후의 바로 옆으로 제법 커다란 나무 상자가 보였다. 단단하게 자물쇠를 건 것이 꽤나 귀중한 물건을 보관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동시에 황준우는 그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해 버리고 말았다.
“눈치챈 게냐?”
아버지 앞이라 최대한 감추려 했지만 두 눈매가 구겨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집무실의 한편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피 냄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섞여 있어요. 덕분에 예상은 가네요.”
“눈치가 빠른 건지, 지혜로운 건지…….”
“어느 쪽도 나쁘진 않죠.”
황준우의 너스레에 붓을 내려놓은 황석후가 웃음을 보였다.
“네 말대로 둘 모두 좋다. 하면 이게 어디서 왔는지도 알겠구나?”
“남궁세가.”
망설임 없는 황준우의 대답에 황석후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맞췄다.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
“죽은 사람 머리통을 어찌 쓰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는 또 찜찜하고…… 하여간에 마음에 안 드는 일만 골라서 하네요.”
“창천단주의 실수라고 그의 목을 줄 테니 빚은 없던 걸로 하자더구나.”
“어디서 헛소리를. 받아들이시려고요?”
“상황에 따라 못 받아 줄 것도 없지.”
“흐음…… 어차피 아버지 돈이니까요.”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을 쓰고 벌었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 것이기도 하단다.”
“…….”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이런 괴이한 협박을 받기도 하지. 괴로운 일이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할 짓이 없어 삼류 왈패들이나 할 짓을 하네요.”
“결국 흑도의 왈패들이나 무림 문파나 다를 것도 없지. 힘과 명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하는 일은 같으니 말이다.”
“그렇게 치자면 국가도 다를 것이 없죠.”
황준우의 새침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황석후가 또 한 번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버지……?”
“아니, 아니다. 정말 내 아들이지만 대단하기는 대단하지. 누가 제국을 향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앞이 아니면 하지도 않아요. 저도 반란죄로 잡혀 가고 싶고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 말에 황석후가 씩 하고 웃자 황준우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어 올린다.
“본론으로 돌아가자꾸나. 상황에 따라라고 말을 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 금자 십만 문보다 더 중한 가치를 가진 것은 남궁세가에 없다.”
“제왕검형쯤 준다고 하면 모를까 말이죠?”
“차라리 검을 입에 물고 죽을 놈들이지.”
“흐흐. 솔직히 십만 문에 제왕검형이면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거니까요.”
“원래 상인은 날로 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안 되는 걸 하겠다는 건 아니실 테고…….”
“받아 내야지. 다만 조금 일이 귀찮기는 하겠지. 번거롭다는 말이다.”
“금자가 십만 문쯤 걸리면 그래도 되지 않나요?”
질문을 던진 황준우와 웃음을 그리고 있는 황석후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단 황준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안 되는군요. 고작 금자 십만 문으로는 말이죠?”
“…….”
황석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 사실이라는 무언의 긍정이다.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네?”
“그 번거로운 일은 내가 모두 맡아 줄 테니, 네가 다른 일을 조금 해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
“열일곱이면 다 컸지. 게다가 너는 영특하니 가문의 일을 더 알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이제야 조금 자유로워진 느낌인데…….”
“큰 권리에는 책임이 함께 따르기 마련이란다. 늘 말했지 않느냐?”
“…….”
“할 수 있지, 아들?”
“못 하면요?”
“내일부터 혼자 저녁을 굶어야겠지.”
“제 돈이기도 하다면서요?”
“책임을 지지 않으면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란다.”
“진짜 너무하시네.”
“열 살 먹은 아이도 아니지 않느냐, 하하.”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결국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황준우가 항복을 선언했다.
“대신 그 일까지 끝내면 한동안은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약속해 주세요.”
“물론이다.”
황석후의 호언장담에 고개를 숙인 황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출발하면 되는데요?”
“가을이 시작될 쯤.”
한참 여름의 끝자락을 향하고 있으니 앞으로 길어야 일 개월 정도의 시간이라고 보면 될 터였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여유가 제법 있었다.
“힘내 보겠습니다.”
“응원하고 있단다.”
“네, 아버지.”
두 부자가 눈을 마주친 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약 일 개월.
그 뒤에 무슨 일을 맡길지 황준우는 아무것도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시키진 않을 테니, 그때 돼서 알아도 늦지 않다고 여긴 탓이었다. 어쩌면 당장은 정말 무슨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단지 가문의 일에 엮으려고 하시는 것뿐일지도…….’
일종의 후계자 수업이다.
황준우가 학문을 익히기를 원했고, 가업을 굳이 물려받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쪽으로든 견식은 넓혀 준다. 확실히 애초에 선택조차 못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편이 훨씬 더 마음이 내키긴 할 터였다. 결국 오늘 황준우를 홀로 찾은 본론은 업무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남궁세가…….’
만금장주에게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자른 시체의 목을 상자에 담아 보내는 이들.
그런 놈들이 정파의 수장 중 하나라고 불리며 추앙을 받고 있다. 황석후는 황준우가 그러한 무림의 어두운 일면조차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다. 언제까지나 밝고 좋은 것만 알고 지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감히 아버지께?’
말마따나 협박이다.
이쯤에서 물러나라는 강력한 경고다.
자그마치 만금장, 황석후를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다. 물론 남궁세가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만한 배짱을 부려도 되는 세력이니까. 일반적인 시선이라면 그렇다. 그 오만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꼭 기억해 두지.’
굳이 먼저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남궁세가가 또다시 눈에 밟혔다. 황준우에게 기회가 된다면 먼저 손을 쓸 용의까지 생겨 버린 것이다. 물론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결코 길지 않은 일 개월이라는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역시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공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학문 공부였다.
‘선생님이 요즘은 자율 학습을 자주 시키긴 하시지만…….’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적당히 했다가 내년 향시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아마 그 백교라면 평생을 쫓아다닌다고 협박할지도 몰랐다.
“선생님을 피곤하겐 할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일을 맡아 바깥에 나가면 상황에 따라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쓸 수 없을 터다. 결국 남은 일 개월 동안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해 놔야 된단 뜻이었다.
“우선 만총 영감이 눈을 떠야 되는데…….”
그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였으니 금방은 힘들 것이다. 그리 생각했는데…….
“오셨습니까?”
황서연과 경호를 찾아간 방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만총을 확인한 황준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기절한 지 몇 시진이나 됐다고?”
“젊을 때는 다반사로 있었던 일입니다. 거뜬하지요.”
만총이 비쩍 마른 팔을 들어 올리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젊을 때 이야기지. 나이가 몇인데 보름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렇게 망치만 휘둘러서야…… 쯧쯧.”
황준우가 혀를 차자 웃음을 흘린 만총이 고개를 저었다.
“보름이나 됐습니까? 그건 몰랐습니다.”
“조심하라고. 이 녀석도 많이 걱정했으니까.”
황준우가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하자 황서연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걱정했어요! 우리 무기를 만들다가 그렇게 되셨다고 했으니까!”
“하하,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보다 그것 때문인데, 제가 만든 녀석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 해 놨고.”
황준우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사실은 분명한 배려였다.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은 욕심이 들 법한 무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만총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두 자루 검의 상태를 점검하고 싶었다. 그 전까지는 누구의 손에도 들리고 싶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더욱 빨리 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보인 만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짝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분명한 힘이 보인다.
의지마저 가득해 보이니 세 사람은 더 이상 만총을 말릴 수도 없었다.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할아버지.”
그 옆으로 후다닥 뛰어간 황서연이 재빨리 만총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
놀란 만총이 황서연을 바라보고는 기이한 표정을 짓는다.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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