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7화
“저는 괜찮습니다.”
“이대로 가자, 영감.”
어느덧 반대편으로 다가온 황준우마저 만총을 부축했다.
“몸도 좋지 않으면서 무리하지 말고.”
“그렇게 해요, 할아버지. 네?”
두 남매의 시선이 만총을 향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웃는 표정을 한 만총이 고개를 또 한 번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어깨동무를 두른 세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간다.
“차라리 나보고 업으라고 하시지…….”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경호가 재빨리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세 사람의 걸음은 느릿하게 만금철방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만총이 벌써 돌아올지 예상하지 못했던 대장장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본다. 특히 양옆에 황준우와 황서연이 부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더욱 시선을 끌었다.
“저, 여기서부터는 제가…….”
“됐어, 얼마나 남았다고. 시선은 이미 충분히 받았고. 뭐라 할 사람도 없어.”
“…….”
결국 황준우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만총이 계속해서 부축을 받으며 불과 몇 시진 전까지 자신이 망치를 휘두르던 모루 앞에 다시 섰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두 자루 검이 아직까지 제자리에서 조금도 꿈쩍하지 않은 채였다. 그를 바라보는 만총의 눈에서는 난감하던 기색이 사라졌다. 대신하여 떠오른 것은 차가운 명인의 눈빛이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온 힘을 쏟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물이 무조건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무아지경이 기적을 만들곤 하듯, 일을 망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이 만든 검을 바라보고 직접 쥐어 보기도 하고 튕겨 보던 만총의 입이 조금씩 씰룩이기 시작했다.
두 눈은 호선을 그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뒤에서 지켜보던 황준우가 물었다.
사실 답변이야 알고 있었다.
만총의 뒤에서 천조신공을 통해 선천지기를 일으켜 주며 그가 만드는 검을 가장 오랜 시간 쳐다보고 있던 본인 아니던가? 그간 황준우는 긴 시간을 잊을 정도로 감탄하고 또 놀랐다. 전생에서 무림을 돌아다니는 동안 적지 않은 무기를 보았었다. 따질 것도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향해 쏟아진 무기만 만 개였다. 개중에는 대단하다고 감탄할 법한 녀석들도 몇 있었지만, 눈앞의 두 자루 검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런 와중에 더 놀라운 사실은 한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도 두 자루 검의 성향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분명히 만총이 의도하였고, 그러기를 바란 부분이었다. 아마 이 부분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훌륭한 검이었어도 만총은 이를 실패작이라 여겼을 터다.
하지만 황준우처럼 무기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특징이 완벽히 갈렸다.
“완벽합니다.”
만총의 입에서 최고의 찬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했다기보다는 완성된 두 자루의 검에게 보내는 환호였다.
“이 두 아이는 정말…….”
“그래서, 내 검의 이름은?”
계속해서 심정을 토로하려는 만총을 향해 황준우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이는 처음 그가 검을 완성한 이후부터 매 순간을 궁금해하던 문제였다.
“아…… 그렇군요. 이름.”
만총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들고 있던 두 자루 검을 내려놓은 후 황준우와 황서연을 번갈아 본다. 별것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도 그렇듯 검에 있어 이름은 중요하다. 제작자의 의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 검에 의미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이 중 이쪽은 아가씨 것으로 매영검…….”
“그건 알고 있다고!”
“난 몰랐는데?”
황준우의 외침에 황서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매영검…….”
어지간히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읊조리던 황서연이 이내 활짝 웃었다.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할아버지!”
“매영검은 화산의 매화를 떠올리며 만든 검입니다. 겉모습은 제법 무난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내 검 이름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시간은 장인에게 있어 꽤나 즐거운 시간이랍니다.”
혀를 찬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도구 따위에는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한 주제에 막상 눈앞에 제 검이 놓여 있자 조급함이 인다. 이는 그만큼이나 만총이 만든 그의 검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녀석의 본모습은 조금 다르지요. 아가씨께서 직접 검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황서연이 만총의 앞으로 다가가 매영검을 건네받았다. 만총의 말마따나 겉으로만 보자면 조금 잘 만들어진 평범한 검처럼만 보였다. 그저 검병의 문양 장식이 조금 예쁘게 꾸며져 있다는 것? 소녀의 취향을 제법 반영한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들어요!”
황서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평범해 보이지만 손에 딱 달라붙는 감촉에 활짝 핀 매화 문양까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큼큼, 벌써 그리 좋아하시니 기쁩니다그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본모습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묻건대…… 내공을 익히셨습니까?”
“조금요?”
“검을 잡아 보신 적은?”
“오늘 처음이에요.”
“당장 모습을 보이는 건 힘들겠군요.”
“음…… 한낮 대장장이가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흔히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고들 하지요. 매영검의 본모습을 확인하려면 그 아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습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검의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설명을 이어 가던 만총의 동공이 조금씩 크기를 불려 갔다. 이야기의 중간부터 눈을 감고 무언가에 집중하던 황서연이 들고 있던 매영검에서부터 진동이 일어나더니 연분홍빛의 기운이 검날을 감싸기 시작한 탓이었다.
아주 옅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검기상인(劍氣霜刃)이었다.
방금 전 만총이 설명한 신검합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입구에 방금 전 황서연이 도달한 것이다.
“오호…….”
그 모습에는 황준우마저 감탄을 토했다.
아무리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고는 해도 그녀는 검에 있어 문외한이었다.
좋은 검이 알려 준 길일까?
아니면 황서연의 재능이 그토록 뛰어난 덕일지도 모른다. 그런 놀라움과 감탄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 황서연이 큰 눈을 껌뻑거리며 자신의 검에 솟아난 연분홍빛 기운을 바라본다.
“어? 이건……?”
“검기상인입니다. 분명 처음 검을 잡아 보셨다고 했는데…….”
검기상인.
흔히 짧게 줄여 검기라고 말하는 경지는 단순히 내공만 많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검을 알고, 이해하고, 스스로의 신체와 같이 다루어야지만 펼칠 수 있는 경지다.
때문에 검기상인을 다룰 수 있는 무인만이 진정한 무림인, 일류고수로 평을 받는 것이다.
“검기상인?”
물론 방금 검을 처음 잡은 황서연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네가 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뜻이지. 뭐 달라진 것 없어?”
결국 황준우가 나서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달라진 거라고 해도…… 처음 잡는 순간부터 들렸는걸. 매영검이 나한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고. 명확한 언어는 아니지만…… 어쩐지 알 수 있어. 매영검은 처음부터 내게 제 모습을 알려 주고 싶어 했어.”
“허…… 재능인 걸까요?”
“만총 영감이 만든 검이 그만큼 대단하단 걸 수도 있지.”
어찌 됐든 결과는 좋다.
최상(最上)이라는 단어조차 부족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좀 위험하군.”
황준우가 가는눈을 뜬 채 황서연의 매영검 앞으로 다가갔다.
“그게 매영검의 본모습입니다.”
“흠…….”
만총의 말에 턱에 엄지와 검지를 얹은 채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저 조금 뛰어나 보이던 매영검이 검기상인을 두른 순간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저 곁에 다가가기만 하여도 베일 것 같은 예기로 주변을 가득 메운 것이다.
“과언을 보태, 이 정도면 검기상인 만으로 강기(?氣)랑도 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는걸?”
“허허, 과찬이십니다!”
절정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강기는 알려지기를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는 엄청난 힘이다. 엄연하게 말하여 검기상인보다 몇 수 위의 힘. 만년한철을 사용한 매영검의 강도와 특수한 힘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강기에 비견할 바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만총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과언을 보탠다고 했잖아. 그래도 진짜 이 정도면 잘 다듬어진 검기상인이라면 강기도 막을 수 있어. 절삭력도 못지않을 테고. 처음 봤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이거, 그냥 강철은 아니지?”
검기상인의 예기가 가득 흐르는 매영검의 검날을 맨손으로 잡아챈 황준우가 물었다. 순간 비명을 내지를 뻔했던 만총이 이번에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거, 검기가 사라졌지 않습니까?”
“답답해, 오빠.”
만총과 황서연의 말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손을 뗀다. 동시에 매영검으로부터 다시 연분홍빛 검기가 피어올랐다.
“그냥 잠시 억눌러 놓은 것뿐이야. 어쨌든, 이건 너무 위험하니까 한동안은 봉인. 내력을 안 쓰면 답답할 것도 없으니까 그만해.”
“하지만 매영검이 원하고 있는데…….”
“검법 안 가르쳐 준다?”
“…….”
결국 황서연이 신난 마음에 흘려 넣던 내력을 완전히 갈무리했다. 어찌 됐든 검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 좋은 매영검을 영영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철 뭐야? 색을 보니 묵철은 아니고…….”
“만년한철입니다.”
“만년한철?”
이번에는 황준우도 놀랐다.
검의 강도나 흐르는 한기가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현존하는 철 중에 제일(第一)이라 불리는 만년한철이 쓰였을지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니지, 정말 이 검에 만년한철이 들어갔다면 더 이상 만년한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이름처럼 냉기가 몰아치는 동공 속에서 만년 동안이나 견뎌 내야지만 만들어지는 만년한철은 얻고 싶다고 하여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근 백 년 안에 남은 만년한철은 황궁에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폐하께 사사 받았습니다.”
“과연 용장. 폐하의 사랑을 받은 장인인가요…….”
경호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감탄을 흘렸다.
현존한다고는 하지만 전설로까지 취급되는 만년한철을 실제로 보게 되었으니 그 감동이야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과연 이 한기의 정체가 만년한철이었구나. 평소에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것도 만년한철의 한기를 내부에 가둔 탓이었어.”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매영검을 한 번 더 훑어본 후 만총을 직시했다.
“이것 참, 생각보다 너무 과한 선물을 받은 느낌인데……. 그래서 더 궁금하네. 저 녀석은 어떤 물건이지?”
“눈썰미가 좋은 편이시니…… 직접 잡아 보시겠습니까?”
“그럼 마다하지 않고.”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모루 위에 놓여 있던 검을 들어 올린 직후 황준우의 눈이 부릅뜨였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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