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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9화 (39/373)

학사재생 39화

“경호, 괜찮은가?”

황준우의 안위를 확인한 이후 곧바로 경호를 쳐다본 황석후가 묻는다.

“네, 네! 괜찮습니다.”

“많이 놀랐나 보군.”

“……지금은 괜찮습니다.”

경호는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말했다.

가장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더 많이 놀랐다.

하나 황석후가 나타나고 그의 반응을 본 이후로는 오히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놀라워서 기절할 뻔한 경험이었지만 이곳은 만금장이었다. 그리고 인과를 벗어날 정도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 준 이 역시 여전히 황준우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황석후의 행동과 눈에서 보이는 믿음이, 신뢰가 순식간에 그의 마음에 자리 잡혔다.

바뀔 것은 무엇도 없었다.

황준우가 진짜 신선이라도 돼서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다행이군.”

황석후가 그런 경호의 눈빛을 알아보았는지 웃음을 보이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앞으로도 우리 준우를 잘 부탁하네.”

“평생을 목숨처럼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마지막으로 황석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직도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만총이었다.

그의 경우는 황서연, 경호와 많이 달랐다.

따지자면 엄연한 외부인.

그리고 황준우의 비범함을 잘 알지 못하던 사람이다.

‘알았더라도 이건 수준 외지만.’

경호처럼, 그리고 처음에는 당황했던 황석후 본인도 같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황석후의 물음에 얼떨떨한 시선을 한 만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거부.

만금장의 주인이라는 황석후는 분명한 거인이었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담력이 강한 만총이라도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을 터였다. 하나 방금 전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탓인지 그런 황석후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음이 좀 진정되는 차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총의 부탁에 웃음을 보인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입니다.”

기우(杞憂)가 현실이 되었다.

소주를 비롯한 인근 도시와 마을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언제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며 걱정을 했다. 며칠 전 있었던 구름이 흩어지고 하늘이 무너질 듯 울어 댔던 소란이 만든 괴사(怪事)였다. 누군가는 그 높은 하늘에서 사람 닮은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아마도 신선이겠지. 헛소리다.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오가는 와중에도 모두 하늘이 진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모두 소장주님 탓에 말이지요.”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다시 황준우를 찾은 만총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정말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영감도 걱정이 많구먼.”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가능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무너트리지는 않아.”

만총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은 황준우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지?”

사실 이 부분이 궁금했다.

만총이 황석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제법 안정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휴식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오히려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인 탓이다. 그를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사과를 하시더군요.”

“사과?”

“자식이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데, ‘아, 그렇구나.’ 싶더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소주 대인께서 보이셨던 모습들이 당시에는 쉽게 이해가 안 됐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알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와, 그 자식이란 것 말이지요.”

“흐음…….”

“좋은 아버지를 두셨습니다.”

“인정.”

황준우가 씩 웃으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보통은 아니시지?”

“누가 소주 대인을 보통이라고 할까요?”

“그럼 이름값을 한다고 해야 하나?”

“명성이 부족하신 분입니다.”

“거 아버지 칭찬이라 그런지 듣기 싫지는 않구먼.”

황준우의 솔직함에 멋쩍은 웃음을 보인 만총이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약조 드리건대 이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이 온다 한들 말이지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심드렁한 표정을 한 황준우의 말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만총이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조금 걱정한 건 사실인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잖아? 연이나 경호도 마찬가지고. 어머니도 아마 놀라긴 하시겠지만 그것으로 전부겠지. 그거면 충분해. 오히려 좋지, 뭐. 내 무공이 조금 알려지면 겁 없이 덤벼들 녀석들도 없어질 테니까.”

허리춤에 대충 걸친 수왕을 툭툭 두들긴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런 건가요.”

만총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만총에게는 조금 낯선 말이었다. 어머니는 기억도 없던 어린 시절에 일찍 병으로 여의었고 아버지는 그가 지학이 되기도 전 대장 기술만을 물려준 채 산행 중 사고로 죽었다. 물론 그때는 너무나 슬펐다. 가슴이 아프고 허전해 한동안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은 결국 그를 일으켰고, 슬픔마저 조금씩 무디게 만들었다.

한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무뚝뚝했지만 아버지가 있던 그 시절은 참 행복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대가 없이 사랑을 나누어 주는 누군가, 나만의 편이 가족이 아니면 또 누가 있을까?

황준우에게는 그런 가족이 있었다.

또한 가족 못지않은 훌륭한 호위무사도 하나 존재했다.

사랑 받고 있다.

처음 황서연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같았다.

사랑 받았고, 사랑을 줄 줄 안다.

때문에 두 사람은 밝게 빛난다.

만총이 무언가에 홀린 듯 두 사람을 쫓은 이유는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몰랐다.

‘단순히 과거의 잔상을 쫓은 게 아닐지도…….’

여러모로 즐겁기만 한 이유다.

“게다가 사실 말한다고 믿기나 할까 싶기도 하네. 오히려 아버지처럼 단박에 믿어 버리는 경우가 비정상 아냐?”

“허허허!”

황준우의 물음에 큰 웃음을 터트린 만총이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그럼요. 대인께서 특별하신 거지요. 사실 저도 굳이 말해 봐야 누구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별 상관 안 해. 이야기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어디 나가서 광인(狂人) 취급 받고 싶지는 않군요. 어쩌면 늙어서 망령 났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그것도 제법 신빙성 있네. 그럼 지금 찾아온 이유는 역시 이 녀석 때문인가?”

허리춤에 덜렁덜렁.

살아 있는 전설과 다름없는 용장이, 만년한철이라는 엄청난 재료로 만든 명검(名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제멋대로 달려 있는 수왕을 본 만총의 입가로 짧은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감당하기 힘든 녀석이라 검집이 하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스스로 만들고도 걱정한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얌전하다. 오히려 투박한 인상 탓인지 뽑혀져 나오기 전까지는 검이라기보다 몽둥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둔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에만 조금 거칠게 반항했지. 그 이후로는 말 잘 듣더라고.”

황준우가 수왕의 검병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들긴다.

장인의 입장에서는 조금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만총은 웃었다. 평소 검을 멋대로 다루는 무인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곤 했던 그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수왕이나 황준우나 지금의 행태가 썩 잘 어울렸다.

마치 서로의 죽이 맞듯 말이다.

‘이게 바로 영혼의 한 쌍이지.’

어쩌면 그가 보고 싶었던 모습이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형태로도 어울리는 한 쌍.

진정한 무인과 무기의 모습이 아닐까?

“하면 어찌, 검집은 필요 없으시겠습니까?”

“있으면 좋겠지만, 이놈을 감당할 만한 게 있겠어?”

“수왕과 매영을 만들고 남은 만년한철이 조금 있습니다. 검집을 통째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일부만 섞어 만든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검집이라…….”

황준우의 중얼거림에 수왕이 갑작스럽게 떨림을 토했다. 그를 잠시 바라 본 황준우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싫은 것 같네. 답답하다고 생각 하나 봐. 서연이 쪽만 잘 만들어 줘.”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수고가 많아. 선물도 너무 고맙고. 가능하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은데, 뭐 떠오르지가 않네. 혹시 원하는 것 없어?”

“별말씀을요. 그리고 원하는 것이라면 이미 받았습니다.”

“저 만금철방에 취직했습니다.”

“……?”

“장주님께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군요.”

당연한 말이다.

만총이 누군가?

황제의 인정을 받은 이 시대의 유일한 용장.

천하제일 명장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철방에 오겠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양팔을 벌리고 환영할 터였다.

“그게 보상이라고?”

황준우의 의문에 웃음을 보인 만총이 고개를 주억였다.

“예. 지금 제게는 이 만금장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곁에서 장주님과 소장주님, 그리고 아가씨를 오래 지켜볼 수 있는 게 가장 큰 소원입니다.”

“허…… 욕심이 없는 건가?”

“욕심이 과한 거지요. 어찌 됐든, 보답은 그것으로 충분하니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아가씨께 가 보겠습니다.”

만총이 손을 내젓고 황준우의 방을 떠났다.

“기인(奇人)이네, 기인이야.”

그렇게 만총이 떠난 자리 뒤를 돌아 경호를 바라본 황준우가 말했다.

“용장께서도 적어도 도련님께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5. 다시 만나다

황준우는 처음 수왕검을 잡은 날 천조신공의 육단공에 들어서며 천조칠무의 새로운 경지까지 이끌어 냈다. 놀라운 성장이었지만 대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리는 무리였나 봐.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겉으로야 전혀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하단전과 중단전에 적지 않은 손상이 왔는데 천조신공으로 인한 전체 혈도에 내력을 쌓는 안정성이 없었다면 최소 심각한 내상, 자칫하면 주화입마까지 겪을 수 있는 위기였었다.

그런 상황을 황준우는 정확하게 한 달 만에 모두 해결했다.

“만전(萬全)이란 거지.”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안정적으로 육체를 모두 회복한 황준우의 얼굴에 자신감이 엇비쳤다. 한동안 자중한다고 가볍게만 몸을 움직인 탓에 전력(全力)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새로이 얻은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황준우에게 황석후가 전한 말은 확실히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보표(保?)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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