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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41화 (41/373)

학사재생 41화

단지 마차에 가까이 다가갔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향긋한 내음이 심장을 두드린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두 개의 기척 모두 남성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작고 가녀렸다.

‘공주란 거군. 예쁠까?’

관심을 크게 두지는 않지만 황준우 역시 열일곱의 청년인 만큼 그러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조금은 기대 섞인 눈으로 마차 입구를 바라보는 황준우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마찬가지로 옆에서 고개를 꺾은 황석후가 입을 열었다.

“공주 마마, 이번 보표의 책임을 맡은 만금장의 장주 황석후입니다.”

황석후의 인사에 짧은 기척이 느껴지더니 굳게 닫혀 있던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려 그 속내를 드러냈다. 생각보다 소소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내부에는 비교적 가벼운 차림을 한 여인 둘이 타고 있었다.

‘잘 안 보이는군.’

시녀로 보이는 주름진 여인의 뒤편, 가려진 탓에 잘 보이지 않는 방향을 흘낏 바라본 황준우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본 적 있는 느낌인데.’

낯익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익숙했다.

그렇다고 누구라고 곧장 떠올릴 정도로 친근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역시 익숙한 느낌이다.

‘짧지만 강렬한 기억의 잔상?’

스스로의 소감을 읊은 황준우가 웃음을 흘릴 때였다.

문을 연 시녀가 옆으로 비켜서며 호기심을 자아내던 여인의 모습이 황준우의 두 시선에 강하게 박혔다.

“반갑습니다, 소주 대인. 이리 직접 나와 마중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작은 웃음을 보이는 그녀의 인사에 황석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기 이 녀석은 제 자식인 황준우입니다. 올해로 열일곱이 되었지요.”

“황준우입니다.”

낯이 익다.

직접 보고 있으니 확신이 섰다.

또한 그와 동시에 그녀가 누군지도 깨달았다.

백옥보다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에 짙은 흑단 머리카락, 무엇보다 별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은 눈동자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주연하!’

열한 살 생일 때 우연히 마주쳤던 당돌한 공주!

하룻밤 동안은 그 때문에 꽤나 머리를 싸매기까지 했었으니 잊힐 리가 없었다.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오랜만이로구나.”

그녀의 짧은 인사에 조금은 떨떠름한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동시에 그 앞에 서 있던 시녀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네 이놈! 누구 안전이라고!”

“괜찮다, 소하.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이 반문은 시녀인 소하가 아닌 황준우에게서 나왔다.

“어린 시절 만나 나이가 비슷하다고 하여 서로 말도 놓고 지냈으니 그것이 친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혹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없는 게냐?”

“…….”

얼떨떨한 표정의 황준우가 재빨리 황석후를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애초에 예의란 것하고는 담을 쌓고 지낸 황준우가 아니었던가? 하나 황석후는 그런 황준우의 기대를 간단하게 부숴 버렸다.

“두 분이 그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시니 저는 큰 걱정 없이 물러날 수 있겠습니다. 부디 여정하시는 동안 무탈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천하의 만금표국 보표가 저와 함께하는데 무슨 탈이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지요, 대인.”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날 터이니 제 모자란 자식과 즐거운 해후(邂逅)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또 보겠습니다.”

“아버지?”

황준우가 재빨리 붙잡으려 했지만 황석후는 주연하의 인사가 끝난 순간 쏜살같이 뒤로 물러나 멀어졌다.

두 눈과 입에는 호선을 잔뜩 그린 채로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신 겁니까, 아버지?’

직접 입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킨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주연하에게로 향했다.

‘많이 컸네.’

당연한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어렸고 한창 성장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열일곱과 열아홉.

육체의 성장은 끝을 맺은 지 오래다.

이제는 완숙(完熟)을 향해 나아갈 때.

그런 점에 있어서 이제 방년(芳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주연하는 완숙과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상큼하다. 얌전한 척 앉아 있지만 어딘지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소녀 같은, 노란빛 발랄함이다. 때문에 한참 눈을 마주하고 있던 황준우는 저도 모르게 또 웃음 짓고 말았다.

“내 얼굴이 어디 우스운 게냐?”

“네 이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리 웃는 게냐!”

주연하의 물음에 소하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나섰다.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준우는 당당했다.

동시에 소하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네 이노옴! 소주 대인의 기세를 등에 업었다고 하여……!”

“그만하여라, 소하!”

주연하가 또 한 번 소하를 가로막았다.

황준우도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는 주연하를 보고는 하던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어찌, 이제는 공자와 제법 친해지셨습니까?”

“말한 바 있듯 이미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제가 건방을 떨었군요.”

“친구로서 조언이었겠지.”

“그리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준우는 굳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자존심 탓은 아니었다. 주연하가 그를 친구라고 칭하였다. 또한 반짝이는 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시험도, 장난도 없었다. 친구면 친구답게. 사실 높임말을 써 주고 있는 것이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너는 나를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구나.”

“친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묻고 싶구나. 네가 방금 전에 했던 말, 진심인 게냐?”

“……?”

황준우가 답변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엽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예. 귀엽습니다. 상당히.”

황준우가 당당히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소하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점점 더 붉어졌다. 신비한 것은 새하얀 주연하의 양 볼 위로도 붉은 홍조가 옅게 떠올랐다는 점이었다.

“처음 듣는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여쁘다고 하셨거늘…….”

“예쁘고 귀엽습니다. 제가 이런 말 잘 안 하는 편인데, 진심입니다. 사실 전 태어나서 우리 어머니보다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후후, 어찌 됐든 기분 좋은 말이로다. 여정 동안 네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것 같구나. 친구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여행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

“공주 마마!”

놀란 소하가 재빨리 주연하를 향해 소리쳤다.

주연하의 나이가 방년.

황준우 역시 곧 약관을 눈앞에 둔 청년이다.

두 사람이 친구라고는 하나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녀의 정적(政敵)들은 기회를 물어 고결하기까지 한 명성을 땅 밑까지 끌어내리려 할 게 분명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싶은데 아시다시피 보표인지라. 만금표국의 대열은 제일 앞에 있지 않습니까? 공주님이 계신 곳은…….”

검지를 세워 정면에서부터 쭉 이끌어 가로로 그은 황준우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고는 주연하를 바라보았다.

“여기 한참 뒤쪽. 무리입니다, 무리. 그래도 이번 일에 책임자라고요. 심심하면 그 시녀 분과 노시지요.”

“그것 참 안타깝구나. 함께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뭐, 중간중간 가끔 이렇게 찾아와 가끔 말 상대는 해 드리겠습니다. 공주님이 저를 계속 친구라 생각해 주신다면요.”

실상 그 말이 황준우를 움직였다.

전생을 비롯하여, 현생에까지 실상 황준우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굳이 표현한다면 경호가 그에 가깝겠지만 조금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슷한 또래인 주연하의 친구라는 말은 황준우의 마음을 크게 설레게 했다.

실상 현생에서는 딱히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누군가 그리 불러 주니 마음이 또 달라졌다. 왜 그런 것 있지 않던가? 전혀 없을 땐 모르지만 막상 곁에 생기면 그 존재가 확연히 느껴진다. 지금 딱 황준우의 상태가 그랬다.

“물론이다. 나는 언제나 늘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저도 그러면 공주 마마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다음번에 뵐 때는 더 편안하게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원하는 바이니라.”

“아, 참. 그리고 아무리 친구라고 하여도 사내를 너무 가까이 두시려 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주연하의 시선이 그 뒷모습을 좇듯이 따라가기도 전.

활짝 열려 있던 마차 문을 닫은 소하가 눈에 쌍심지를 세우며 말했다.

“맞습니다. 건방진 자이기는 하나 마지막에라도 옳은 말을 하는군요. 남녀칠세부동석.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알고 있다. 늘 하는 말 아니더냐.”

“그러니까 더 주의하셔야지요.”

“그래, 그래.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후후…….”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서로 마음이 없다면 남자와 여자가 몇 세가 되었든 함께 있다고 하여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아이코, 큰일 날 소리를. 공주 마마, 저 숨넘어가는 것 보기 싫으시면 그런 말씀 바깥에서 하시면 안 됩니다. 제발요.”

“후후, 알겠다. 알겠느니라.”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또 한 번 크게 웃는 주연하를 보는 소하의 입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각지 못한 일에 많이 놀라고, 소리쳤지만 그래도 행동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소하였다.

‘정말 많이도 웃으시는구나.’

주연하는 웃음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적다.

특히 지금처럼 계속해서 웃을 때는 정말로 흔치 않았다.

한데 고작 몇 마디 대화로 이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소하의 입가로도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주연하와의 만남은 예상외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생각이었다.

“친구라…….”

소리 내어 읊어 보니 혀 안에 감기는 감촉이 나쁘지 않다.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기껏해야 두 번 본 사이. 단지 그녀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랄 뿐이다.

‘적어도 대화할 때까지는 분명한 진심이었고.’

반짝이는 소녀의 눈동자 속에 거짓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확신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속임수와 거짓에 대해서만큼은 제법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황준우인 만큼 확신하고 있었다.

“기분이 많이 좋은가 봅니다.”

선두로 합류하자 말 위에 올라탄 경호가 황준우를 향해 말했다. 반대편 손에는 황준우의 것으로 준비된 고삐를 쥐고 있는 채였다.

“제법 즐거운 인연을 만났다 싶어서 말이야.”

“지금부터는 별로 즐겁지 않으실 겁니다.”

말고삐를 내미는 경호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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