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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43화 (43/373)

학사재생 43화

생각해 보니 전생의 황준우는 방랑벽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그랬으니 고려에서부터 먼 타향인 중원까지 열심히 달려오지 않았겠는가? 나름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역시 제법 즐겼다.

한데 어느 순간 바뀌었다.

굳이 기점을 억지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구해 주면 등에 칼 꼽고, 믿어 주면 웃으면서 뒤통수 때리고……, 내가 아는 중원이 너무 삭막했었던 건가?”

전생과 현생.

황준우는 자신의 삶이 확실히 철저하게 갈라져 있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그는 고독했고, 외로웠으며, 가진 바가 없었다. 부모의 얼굴도 기억 못 하니 형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증오와 원한은 모두 그에게 쏟아졌다. 어둠 속에 홀로 동떨어져 있었으니 비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잘 살아 보려 했지만…….’

결과는 천살을 넘어 만살을 달성하였고 끝내 만인의 적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 덕분에 천하 어디를 가서 묻는다 한들 칠야무신이라는 이름을 즐겁게 떠드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나 경호한테나 한 번도 안 물어봤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태어났다 하여도 황준우는 황준우다.

전생과 현생 모두 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어볼 수 없었다.

비겁한 외면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떠볼 자신조차 없었다. 그들의 입에서 쏟아질 혹평이 두렵다고 묻는다면, 분명 사실이었다.

‘지금 난 양지(陽地)에 서 있으니까.’

어둠 속, 음지(陰地)가 황준우의 전생이었다면 지금 그는 양지에 서 있다. 그 밝음에 굳이 어둠을 들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외롭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믿음직한 선생과 든든한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좋은 호위무사도 함께다. 주변에 이토록 가지지 못했던 것이 가득하거늘 굳이 바깥을 돌아다닐 이유를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새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한데 억지로 떠밀린 보표행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으로 친구를 만났고, 표사들과 웃고 떠들며 여행의 즐거움도 느꼈다.

그래, 그가 꿈꾸던 삶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요령이 없고 방법을 몰라 실패했지만 드넓은 중원을 처음 찾았던 당시 황준우의 가슴 한편에 피었던 청운의 꿈은 바로 이런 그림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게냐?”

황준우의 뒤편에서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이 비치는 잔잔한 밤 호수를 닮은 것 같은 목소리와 특이한 말투.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몰래 다가오고 있을 때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놀랄 필요도 없었다.

“공주가 밤 고양이처럼 그렇게 몰래 돌아다녀도 되나?”

피식 웃음을 지은 황준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주연하가 그를 바라본다.

“왜?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조금 이른가?”

황준우의 물음에 웃음 지은 주연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오히려 그리 쉽게 대해 줘서 더 고맙구나.”

“친구라고 했잖아. 그리고 다음에 볼 땐 예의 덜 차리겠다고 했고.”

“후후, 약속을 참으로 철저히 지키는 친구로구나.”

“고마운 줄 알아. 이만큼이나 듬직한 친구 얻기 힘들다. 너는 운이 좋은 경우라고.”

“그대야말로 운이 좋은 편 아니더냐? 공주 친구를 이리 쉽게 얻다니, 하늘이 놀랄 일이로다.”

“공주가 대수인가. 결국 같은 사람인걸.”

“모욕이로다.”

“아, 혹시 기분 나빴어?”

“모르겠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보이는 주연하다.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들뜬 감정도 가득 담겨 있는 채였다.

“소녀로구먼.”

“너 말이다. 소녀라고. 장난치고 싶고, 마음껏 웃고 싶고, 막 그러고 싶은 여자아이 있잖냐.”

“…….”

“그러니까 뒤로 몰래 다가와서 놀래려 했겠지.”

“하지만 안 놀랐지 않느냐.”

“일반인이라면 놀란다고. 은신술이 제법이던걸?”

“후후, 이래 보여도 어린 시절부터 무공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느니라. 올바른 군자라면 스스로가 익힌 도리를 지키기 위한 힘 역시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호오……?”

황준우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백교로부터 들어 안 것이지만 본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문(文)만큼이나 무(武)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주연하가 말한 것과 비슷한 이치 탓인데, 이 시대에 와서는 실상 그들의 그러한 의지가 깊게 전파되지 않은 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문사들이 과거 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일이 많다 보니 저절로 체력이 떨어지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여 관직에 든 문관들은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구르는 무관들을 보며 천박하다고 혀를 찬다. 구조가 그러하고 인식이 저따위여서야 옛 의지가 아무리 고결하고 올발랐다 한들 먹힐 리가 없었다.

“말했지 않느냐? 공자님과 그 제자들의 뜻은 높고 훌륭하기 비할 데 없어 감히 내가 척을 질 수가 없노라고.”

“그런 뜻인 줄은 몰랐지.”

무엇이 되었든, 주연하가 문과 무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은 데에 대해서는 확실히 박수를 쳐 주고 싶은 황준우였다.

“나는 단 하나의 말도 허투루 내뱉지 않는다. 마음 깊숙이 담아 두도록 하여라.”

살짝 웃음을 보인 주연하의 검지가 황준우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들긴다. 그 격의 없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오히려 군자의 방법이니 도리니 하는 걸 모르는 건 나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힘이 없으면 어떠한 말도 의미가 없다는 것만은 동의해.”

“옳은 말이다. 힘없는 도리와 협의를 앞세우는 자는 언제 줄이 끊어질지 모르는 연에 매달려 있는 것과 다름없지.”

“너는 다르겠군?”

황준우가 연신 웃는 눈으로 주연하를 바라보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영특하다. 제법 재주도 많고 배경도 좋다. 그런 능력을 가진 주연하가 마음속에 협의와 도리를 세웠다면 어찌 됐든 명이라는 제국에서 태어난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다.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공주이기 때문인가?”

주연하는 작게 웃으며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 않았다.

황녀도 아니고 공주.

아니, 그런 모든 것을 벗어나 단순히 태어난 성별이 여자라는 것만으로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과 배경은 빛을 잃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성이라 하여도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투쟁하고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너무 기죽지 마. 너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 보이지만, 사는 게 다 그렇잖아? 우리 모두가 당장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날 일도 잘 모르고 산다고. 그래도 막상 그 시간이 지나고 보면 또 잘 흘러가고 있지. 인생이 그래. 너무 걱정 마라.”

“푸하핫!”

황준우의 말에 함께 옮기던 걸음마저 멈춘 주연하가 배를 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이냐?”

어이가 없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황준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아니, 그럼 웃기지 안 웃기겠느냐? 내가 알기로 네 나이가 고작 약관도 되지 않았을진대 이순(耳順)은 다 된 노인처럼 말하고 있지 않느냐? 아하하하!”

“이순 다 된 노인이라니…….”

전생의 나이가 이립하고도 다섯.

현생을 살아온 지 십팔 년이니 합쳐도 이순이 되지 않는다.

“그건 너무하잖아.”

“나보고 애늙은이 같다느니 하면서 놀리더니 너 역시 못지않다. 아니, 더한 것 같구나. 아하하!”

“그래도 이순은 너무 갔다고.”

불만을 토하며 양 눈에 힘을 주던 황준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동시에 당장에라도 배를 잡고 바닥을 나뒹굴 것만 같던 주연하의 웃음도 멈추었다.

‘어라?’

황준우는 또 한 번 놀랐다.

그가 느낀 것은 꽤나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혈향(血香) 탓이었다. 짙은 피 냄새 속에 섞인 살의가 몸을 찌르듯이 공격하고 있다. 선명한 감각이지만 이제 막 황준우가 느낄 정도로 먼 거리이기도 하다. 한데 그가 그것을 눈치챈 동시에 주연하도 웃음을 멈추었다.

‘우연?’

주연하는 지금 황준우보다 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느껴지나 보지?”

“공기가 바뀌었다.”

“딱히…… 뭔가 느껴지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공기가 바뀌었구나.”

“육감(六感)이란 건가?”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이라면 좋은 능력이다.

이쯤 되면 어디 가서 쉽게 객사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돌아가야겠다.”

주연하의 급한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밤 산책이다.

친구가 함께 있고, 달빛이 참 좋다.

이런 산책을 방해 받은 것도 좋지 않고, 벌써 끝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신감은 좋지만 목숨을 쓸데없이 버려선 안 되는 법이다. 어서…….”

말을 내뱉던 주연하의 온몸이 굳었다.

동시에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던 황준우로부터 재빨리 거리를 벌린 그녀는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던 연검을 펼쳤다.

검을 뽑아 든 주연하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를 조금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황준우가 또 한 번 웃었다.

“제공(制空)도 쓸 줄 아는구나. 그건 진짜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너…….”

황준우를 보며 몸을 파르르 떤 주연하가 고개를 내젓는다. 이후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녀가 힘겹게 다시금 자신의 연검을 허리에 둘렀다. 아주 잠깐이지만, 황준우의 옆이 너무 위험하다고 느꼈다. 죽을 수도 있다 정도의 감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는다. 확신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살았다. 거리를 벌린 채로도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기였는데도 살아남았다. 그 소름 끼치는 위협의 주인공이 정작 정말 그럴 마음이 없던 덕이다.

“저기서 열심히 뛰어오는 녀석들보다, 내가 더 위험하니까 걱정하지 마.”

자신이 내뱉고도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한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느껴지던 기척이 어느덧 인근.

정확하게 황준우와 주연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몇 명이나 되는지 알려 줄 수 있느냐?”

주연하 역시 이제는 은연중에 기척을 느꼈지만 그 감각이 확실하지 않은지 황준우를 향했다.

파사사삿-!

수풀 사이를 바람처럼 가르며 둘러싼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훑은 황준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섯. 아니, 방금 전 이후로 넷.”

언제 뽑혔는지도 모를 수왕검의 끝자락에 흐르는 붉은 핏물이 유난히 요사스럽다.

주변으로 다가온 위기보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주연하가 시선을 돌린 순간에는 나머지 네 개의 신형이 잘린 벼와 같이 힘없이 무너졌다.

비명도 없었다.

움직임과 소란조차 없었다.

단지 뽑힌 수왕검의 끝자락에 흐르는 핏물만이 모든 정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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