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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44화 (44/373)

학사재생 44화

“것 참, 검까지 쓰기에는 아까운 녀석들이었나 싶기도 하네.”

그렇게 말하며 흐르는 핏물을 털어 내고 다시금 허리춤에 수왕검을 꽂은 황준우가 몸을 날렸다.

“정리 끝. 그래도 여기는 좀 그러니, 옮겨서 산책 계속하는 건 어때?”

황준우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주연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체를 알아야 한다.”

“뭐, 그래야 된다면. 나 혼자 산책하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느린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연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 사람을 죽여 본 게 아니야.’

황준우가 검을 쓰는 방식은 냉정했고, 간단했다.

처음 사람을 죽일 때면 저렇게 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주연하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미 사람을 죽였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만약 여기서 이들을 죽이지 못했다면 시체가 되는 것은 그들이었을 테니까. 마음을 다잡은 주연하의 눈빛 속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대신하여 습격자들이 사라진 수풀을 향해 몸을 날린 그녀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랗게 떠졌다.

“이자는…….”

호교아랑(虎咬牙狼) 만태후.

그 이름처럼 음험한 일에 자주 쓰이는 사나운 늑대 이빨 중 하나가 부러졌다. 아니지, 본래 늑대는 혼자 다니지 않는 법이다.

그 얼굴을 확인한 주연하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다섯이나 되는 시신을 모두 확인한 주연하는 이미 사라진 황준우의 뒷모습을 빠르게 좇았다.

“고작 두 번 검을 휘둘러서 음낭오랑(陰浪五狼)을 모두 죽였다…….”

음낭오랑.

현재 낭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을 묶어 칭하는 이름이다. 그들은 이름처럼 음흉하고, 집요하다. 또한 여태껏 사냥에 나서 실패한 적이 없는 훌륭한 이빨이기도 했다. 그 사냥감 중에는 낭인 수준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절정고수도 여럿 끼어 있었다. 때문에 무림의 호사가들은 음낭오랑을 무인이라기보다 살수에 분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암수(暗手)에 능한 사냥꾼들.

그런 음낭오랑이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지도 못한 채 압살(壓殺) 당했다. 주연하가 언뜻 생각하기로 그런 일이 가능한 무인은 황궁 전체를 따져도 열이 넘지 않았다.

“내 친구는 정말 나를 많이 놀라게 하는구나.”

어린 시절 첫 만남에서부터 재회, 지금의 충격적인 무위까지 생각했던 바보다 더욱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 주연하의 입가로 실소가 흘렀다.

“어쩌면 정말 내가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시원한 밤바람이 흐르는 식은땀을 말려 주었다.

간밤의 습격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황준우와 주연하뿐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보표행은 전날과 다름없이 밝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황준우는 그 속에서 점점 승마에 능숙해져 갔다.

그렇게 사 일 차가 흘렀을 무렵에는 말 위에서도 책을 읽으며 불평을 토로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엄청난 발전에 경호를 비롯한 주변 표사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인간이 아니야.”

“우리 소장주님이지만 솔직히 말도 안 되기는 하지. 다음 대 만금장도 든든하겠어.”

표사들은 그런 황준우의 모습을 긍정적인 면모로 받아들였다. 얼마 전 남궁세가를 크게 뒤집은 사건에서부터 출중한 능력까지, 만금장에 몸을 담은 그들의 입장에서 황준우의 뛰어난 모습은 오히려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던 와중 여정이 이어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그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잴 것 없이 노숙이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경호의 말에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음식도 해먹고 좋지. 한동안 객점 음식만 먹었더니 제법 질렸다고.”

“노숙은 처음 아니십니까?”

경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황준우는 아주 가끔씩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주제에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저렇게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아아, 그렇지. 나 노숙이 처음이구나. 어쨌든 괜찮아.”

“도련님, 머리가 많이 아프시면 의원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경호, 요즘 내가 공부에 집중한다고 덜 놀렸더니 심심하지?”

“그럴 리가요.”

씩 웃은 경호가 고개를 내젓는다.

“어휴, 하여간에. 그럼 다들 적당히 노숙할 만한 곳을 찾아보자고.”

황준우의 외침에 표사 중 몇몇이 대열을 이탈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대규모 인원에 공주까지 있는 만큼 꽤나 긴 탐색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 금방 발견되었다. 마침 방향도 가는 곳이었던 만큼 행렬의 걸음은 가볍게 공터까지 이어졌다.

노숙을 싫어하지만 익숙할 수밖에 없는 표사들이 곧장 구역을 나누어 잠자리와 음식을 하는 곳을 마련했다. 경계에 용이한 위치를 찾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이거 뭐 말이 내가 지휘지, 다들 알아서 잘하잖아?”

황준우가 몇 번 손을 거들다가 여유롭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 표사들의 움직임과 행동 순서 등을 눈여겨보았다. 이럴 때 익혀 두어야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음식을 마련하던 표사들 중 한 명이 철제 냄비를 두드리며 외치기 시작했다.

“자자, 음식 준비 다 됐습니다. 순서대로 오셔서 챙겨 먹으세요! 늦으면 없습니다!”

“저거 진짜야, 경호?”

아무리 그래도 늦으면 없다니, 그 정도까지 될까 싶어 물은 황준우의 시선이 경호를 향하기도 전이었다. 답도 하지 않은 경호가 재빨리 자신의 그릇을 챙겨 앞으로 뛰어나갔다. 다른 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네…….”

굳이 연기로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황준우도 그릇을 들고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 바압!”

황준우의 처절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표사들 목소리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결론적으로 말해 음식의 양은 많았다.

단지 그만큼 표사들이 먹는 양도 많았을 뿐이다.

이유는 이번 보표행에서 요리를 담당한 표사의 실력이 어지간한 숙수를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한 탓이었다.

“이런 뛰어난 숙수가 표사로 일하고 있다니. 낭비 아냐?”

황준우가 빈 그릇을 몇 번이고 아쉽다는 듯이 핥다가 말했다.

“척 표두는 일류 무인이기도 합니다. 숙수로 썩기가 더 아까운 게 사실이지요.”

경호 역시 비슷한 행동을 하며 말을 받았다.

배는 만족했지만 맛있는 요리를 더 먹고 싶다는 욕심이 두 사람의 입을 계속해서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끙…… 우리 쪽에 비해 저쪽은 아주 여유롭구먼.”

황준우의 시선이 잘 익은 훈제 고기를 나누어 먹고 있는 금의위의 행렬에게로 향했다. 노숙이 시작되고 그들 역시 음식이 준비되었는데, 표사들과 달리 제법 정숙한 분위기로 침착하게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황궁의 정예병다운 느낌이랄까?

“부럽습니까?”

“전혀.”

경호의 물음에 황준우의 고개가 단호히 내저어졌다.

“저렇게 우중충하게 있으면 노숙의 재미가 더 떨어지는 법이지. 자고로 뭘 하든 즐거워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이번 내 삶의 목적은 이걸로 정했다고, 흐흐.”

“누가 들으면 두 번 사시는 줄 알겠습니다, 정말.”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빨리 의원에 가 보시는 게…….”

“그보다 우리 경호가 빨리 장가를 가시는 게…….”

“무슨 일입니까? 또 경 무사님 놀리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도 끼워 주십시오!”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식사를 마친 표사들이 황준우를 둘러싸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다들 조금 진정하고 매일 경호만 놀리면 재미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도 좀 해 보자고. 마침 밤이기도 하고, 혹시 재밌는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 없나?”

황준우의 물음에 몰려든 표사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 정 표사! 무슨 이야기야?”

“여자 이야기 어떻습니까!?”

“여자?”

“좋다!”

“소장주님은 아직 여자 경험이 없습니까!?”

“예끼, 이놈아. 소장주님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한 번도 없겠냐. 경 무사라면 몰라도.”

“으하하!”

“저, 저도 여자 경험쯤은 있단 말입니다!”

경호의 외침에 따라 또다시 웃음소리가 커진다.

그렇게 시작된 여자 이야기 속에는 적지 않은 음담패설도 끼어 있었다. 덕분에 경호는 걱정된 시선을 비추기도 했지만 황준우는 별문제 없이 그 대화도 귀 기울여 즐겼다.

‘하긴, 이제는 진짜 애가 아니시지.’

열일곱이면 실상 중원에 있어 성인의 나이.

모를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애 같지 않은 평소의 행실을 생각하자면 더욱 그랬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달이 차오른 지 한참 되어 기울기까지 시작했다. 더 이상 늦으면 다음 날 보표행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표사들은 하나둘씩 하품을 하며 자신의 침낭을 찾아갔다. 물론 불침번을 담당한 표사들은 그 자리에서 곧장 붉은 눈을 부릅뜬 채로 경계에 나서야만 했다.

유난히 나른해지는 밤.

서서히 기우는 달을 보며 몸에 힘이 풀리는 감각을 만끽하던 경호의 눈이 무겁게 떨어질 때였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옆에서 잠든 줄만 알았던 황준우가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경호는 무슨 영문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눈은 추라도 달은 것처럼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도련……님.’

그런 경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가벼운 박수 소리였다.

황준우가 양손을 부딪친 그 순간 무언가에 취한 듯 잠에 빠져들던 경호의 눈이 부릅뜨였다.

“도련님?”

“아무래도 이번 보표행에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직접 물어보면 답해 주려나?”

한숨을 쉰 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곳저곳에서 깊숙이 잠들어 가던 만금표국의 표사들도 몸을 일으켰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몸에 찾아왔던 기이한 변화를 감지한 탓이었다.

“사술(邪術)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대답한 황준우가 신영을 날려 금의위 사이에 들어가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이던 금의위들의 눈도 부릅떠졌다.

“자자, 곧 적습입니다. 준비하지요.”

황준우의 말에 놀란 금의위 무사들이 곧장 무기를 빼어 들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 역시 방금 전 상황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파라락-!

검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수풀 사이로 엄청난 수의 기척이 동시에 달려왔다.

“적이다! 다들 마차를 보호해라!”

“공주님을 지켜라!”

만금표국의 표사들과 금의위들이 서로 엉키지 않은 채 각자의 대열에 맞춰 호위진을 짰다.

인근까지 다가와 당장에 습격을 가할 것 같던 적들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야, 이놈들 안 잠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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