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45화
그런 적들 사이로 허리가 반쯤 굽은 꼽추 노인 둘이 동시에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멀쩡히 펼쳐진 호위진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를 한 채였다.
“백아, 실수한 것 아닙니까? 이게 어떤 일인데…….”
“실수라니. 주술(呪術)은 완벽하게 들어갔습니다. 흑아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경 쓴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백아?”
“끄응…… 그것이…….”
“설명할 수 없지만 영문을 알지 못하는 일을 우리는 실수라고 하는 겁니다, 백아.”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꼽추 노인 둘 중, 새하얀 백발에 주름이 깊은 측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반면에 조금은 더 젊어 보이는 얼굴에 흑발이지만 피부 곳곳에 검버섯이 가득 핀 노인은 혀를 찰 뿐이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직접 손을 써서 죽이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흑아.”
혼돈에 빠져 있던 노인 중, 백아라 불린 백발의 노인의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아쉽지만 아직 전력(全力)은 백중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확률도 있다는 뜻. 어차피 실패하면 죽어야만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야 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백흑쌍흉.”
그런 그들의 기이한 행태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목소리에 두 노인이 반색을 하며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압니까?”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금의위를 비롯한 표사들 사이에서도 큰 웅성거림이 일었다.
실상 백흑쌍흉은 작금의 무림에서는 없어진 이름이었다. 하나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무림오흉(武林五凶) 중 하나라 불렸던 만큼 그들의 악행은 유명했으니 말이다.
“진짜 백흑쌍흉란 말인가…….”
이번 호위의 책임을 맡은 금의위 백호장(百戶長) 철학수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백흑쌍흉은 활동할 당시 이미 양측 모두 절정의 고수로서 실력을 뽐내던 인물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까다로운 상대일진대 백흉 쪽은 사술에, 흑흉 쪽은 강시 제조에 능해 당시의 중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은 경력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칠야의 난 이후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으나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사망 가설에 대해서는 의미가 없어졌다.
백흑쌍흉이 살아 있다.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나 더 강해졌을지, 약해졌을지는 모르지만 까다로운 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하나?’
철학수는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둘러싼 기척들이 모두 강시라는 가정하에 백흑쌍흉과 만금표국 금의위를 합친 무력은 백중세에 가깝다. 이럴 때에는 제 목숨을 비롯한 금의위 전체의 목숨을 잃더라도 공주를 살리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 않습니까, 흑아?”
“어리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백아. 가끔 보면 정말 멍청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저보고 멍청하다고 했습니까?”
“그럼 백아 말고 여기 누가 있습니까?”
“없긴 왜 없습니까. 이렇게 산 놈들이 눈앞에 많은데!”
두 사람의 투덕거림과 별개로 주변을 감싼 긴장은 더더욱 고조되어 갔다. 주변을 둘러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과 고수로 보이는 노인 둘. 심지어 습격자는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상자가 제법 발생한다. 두 사람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다.
“공주 마마…….”
마차 내부.
바깥 상황을 좁은 틈새로 살펴보고 있던 소하가 몸을 떨며 말한다.
반면 주연하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했다.
‘백흑쌍흉.’
솔직히 지금 그녀가 나선다면 둘 중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 고수다. 거기에 더해 수백 구의 강시까지. 주하가 몸을 떠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일까…….”
혼잣말을 읊은 주연하의 눈에 짧은 떨림이 번졌다.
하지만 곧 가라앉는다.
평소와 다름없는 맑은 호수와 같은 잔잔한 기운을 띤 그녀의 눈빛이 황준우의 뒷모습을 좇았다.
“괜찮다, 소하.”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그 말이 먼저 나온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안심하고 있거라.”
“하지만 공주 마마!”
“나를 아니, 그를 믿어 보자꾸나.”
주연하의 눈이 어느새 그녀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커져 버린 사내의 등을 주목했다.
“진짜 백흑쌍흉이네, 하하.”
갑작스러운 황준우의 웃음소리에 긴장한 채 검을 꽉 쥐고 있던 경호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감정을 느꼈다.
“하아…….”
경호는 실상 백흑쌍흉이 누군지 잘 몰랐다.
그저 이름과 악명 정도만 안다.
단지 그것만으로 처음에는 긴장했다. 목숨을 걸고 황준우를 지키겠다는 결심도 들었다. 하지만 웃는 황준우를 보니 그런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위기일 리가 없지.’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황준우다.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나, 재단할 수 없는 수준의 만금장 소장주.
“직접 나서실 건가요?”
“나서야지. 그게 안전하기도 하고, 놈들과는 할 이야기도 많고.”
기다란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신영이 사라졌다.
“사라졌습니다!?”
“없어졌습니다!?”
싸우는 척하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황준우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던 백흑쌍흉 둘이 동시에 외쳤다. 그런 두 사람의 양 얼굴 사이로 황준우의 웃는 낯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둘 다.”
차가운 음색에 두 사람이 놀라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보다 황준우의 손이 더 빨랐다.
이마와 이마.
평생을 서로 맞붙어 살던 두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부딪치며 큰 충격이 전해졌다.
하늘이 뱅글뱅글 도는 기이한 감각에 백흑쌍흉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경험 분명 어디선가 있습니다.’
‘두 번째인데…… 첫 번째가…….’
동시에 두 사람이 외쳤다.
“칠야무신!”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그 이름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긴장감이 더욱 커졌다.
칠야무신!
칠야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엄청난 살행을 일삼은 괴물!
그가 있던 강호에서는 피가 멈춘 날이 없었다.
불성 원공 대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전 중원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 꿇었으리라.
작금의 무림에 있어 그 이름은 마치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직 입을 놀릴 힘이 남아 있나 보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주변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바꾸었다. 본래 자신을 지칭하던 그 이름이 가져온 무게를 직접 확인한 황준우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황준우의 발차기에 머리를 맞은 백흉이 크게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백흉!”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흑흉이 빠르게 황준우를 향해 달려든다.
“실력이 늘었네.”
이십 년 전, 황준우가 기억하는 흑흉의 무공은 알려진 바대로 절정고수였지만 그 수준만 치자면 밑바닥에 속했다. 강기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쩔쩔매던 상태. 한데 이제는 그 강기를 정말 제 수족처럼 부리며 그를 공격해 온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황준우가 주먹을 휘두르자 천둥이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크아악-!”
비명을 내지른 흑흉은 자랑하던 강기마저 잃은 채 이마에 핏줄기를 뿜어내며 뒤로 넘어갔다.
“흐, 흑아……!”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백흉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천둥이 울려 퍼졌고 백흉의 의식이 날아갔다.
백흑쌍흉.
이십여 년 전 강호를 공포에 들끓게 했던 악마들이 너무나 허망하게 패배한 것이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금의위와 표사들은 제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만금장의 어린 소장주가 비범하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범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범 새끼는 되겠지.
모두가 생각했던 바였다.
표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황준우는 범의 아들로 태어나 범조차 뛰어넘을지 모르는 인재다. 그래서 주변의 시야로부터 그를 지키려 했다. 그가 제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때까지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려 했다. 한데 모두 무의미했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거칠게 휘둘렀던 주먹을 가볍게 털고 있는 황준우를 향해 양 눈에 더욱 큰 감격을 담은 표사들이 소리쳤다.
“소장주님, 최고!”
“천하제일 소장주!”
“멋있습니다!”
“짜식들이, 그걸 이제 알았나.”
시원하게 웃어 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는 황준우였다.
“뭐, 뭐죠? 백흑쌍흉이란 자들이 저렇게 약했나요?”
흉흉한 기세로 나타나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백흑쌍흉이 제대로 된 발악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바닥을 기고 있다. 무공이란 것을 제대로 모르는 소하의 눈에는 그들이 약해 보였나 보다.
하나 정식으로 무공을 익혀 얼마 전 절정의 벽을 부순 주연하의 시선에는 다르게 보였다.
“아니, 그가 강한 것이다.”
“저 건방진 소장주가요?”
“건방질 자격이 있는 소장주지.”
음낭오랑과는 다르다.
그들의 명성은 뛰어났지만, 그것은 암수에 한한 이야기였다. 수풀 속에 가려졌다지만 위치를 들킨 순간 황준우에게 유리했던 싸움. 하나 백흑쌍흉은 다르다. 그들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노괴(老怪)들이다. 같은 절정의 고수인 백호장 철학수마저 동귀어진을 떠올려야만 했던 강적!
한데 황준우는 정말 식후 운동하듯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소주 대인이 소장주를 붙여 준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주연하의 현재 상황을 만금장주인 황석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보표에 많은 신경을 써 경험 많고 실력 좋은 표두와 표사들이 대거 포진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여겼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표국의 주요 전력을 내놓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황준우를 포함시켰을 때에는 걱정 반, 기대 반이 함께였다. 과연 소문난 그 비범함이 어디까지일까? 어린 시절의 당돌함은 얼마나 남았을까? 결과는 양측 다 실망이 없었다.
“내가 정말 든든한 우군(友軍)을 얻은 것 같구나.”
한동안 이어진 가시밭길 같던 나날.
주연하는 드디어 쉴 볕을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흑흉이 쓰러진 순간 주변을 둘러싼 강시들은 무력화되었다.
애초부터 흑흉의 지시가 없다면 인형과 같은 자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들 모두가 본래는 산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들에게 안식을 선물하라는 명을 내린 철학수는 곧장 황준우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동격의 상대에게 하는 포권이 아닌 경외하는 대상에게 보이는 진심 담긴 인사다.
“소장주의 은혜와 무위에 금의위 백호장으로서 경의를 표합니다.”
“딱히 은혜라고 할 게 있나.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깨를 으쓱하며 편안하게 말하는 황준우를 보며 철학수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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