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46화
실상 그는 처음 황준우의 시건방진 태도와 말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좋은 집안을 이고 태어나 천방지축으로 자란 온실 속 화초라 생각했던 탓이다. 하나 무인으로서 경외할 수밖에 없는 무위를 보여 준 순간 마음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눈앞의 황준우는 존경받아 마땅한 경지를 이룩한 한 명의 대무사(大武士)였다. 약관도 되지 않는 나이에 백흑쌍흉을 손쉽게 제압할 무위를 갖췄으니, 앞으로 무의 역사는 그의 손에 의해 새롭게 쓰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런 역사의 시작을 제 눈으로 목격했다. 가슴 한편에 차오르는 감동이 적지 않은 게 당연했다.
반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긴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 둘 백흑쌍흉은 죽은 겁니까?”
바닥에 쓰러진 채 조금도 꼼짝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은 평생 짝이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같은 자세, 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핏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분명 의식이 없어 보이나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은 상황. 살아 있다면 금의위로서 그들을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직접 확인해서 사실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으나, 어쨌든 황준우를 향해 양해를 구하는 쪽이 순서라고 생각한 철학수였다.
“아, 저 둘? 죽었어.”
“그렇습니까?”
돌아온 황준우의 명확한 답에 철학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 단칼에 답이 돌아온 탓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못 믿기면 직접 확인해 봐.”
그런 철학수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쓰러진 백흑쌍흉을 가리킨다.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더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요. 어찌 됐든,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철학수가 금의위 사이로 돌아갔다. 황준우는 그 모습을 웃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강시들을 모두 정리하고 묻어 준 뒤 보표행이 다시 이어졌다.
행렬이 지나가고 짧은 격전의 흔적이 남은 공터 위.
정말 죽은 시체처럼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던 백흑쌍흉의 눈이 동시에 뜨였다.
“갔습니까? 흑아?”
백흉의 물음에 가는눈을 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핀 흑흉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간 것 같습니다, 백아.”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흑아.”
“동감입니다. 그런 괴물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정말 심장이 놀라 떨어지…… 으헤엑!”
“그러다가 진짜 심장 떨어지겠다.”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고개를 드는 백흑쌍흉의 눈앞에 웃고 있는 황준우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네놈들 이제 보니 귀식대법(龜息大法)이 보통이 아니구나. 예전에도 이렇게 날 속인 거였고.”
“무, 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린 진짜 죽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백흉이 다시금 눈을 까뒤집으며 제자리에 쓰러졌다. 근처에 다가가 귀를 대 봐도 숨 쉬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완벽한 귀식대법이었다.
“그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뭘까?”
놀란 심장을 달래느라 한참 동안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던 흑흉이 다급히 외쳤다.
“헉, 헉. 그…… 유, 유령입니다!”
“요즘 유령은 참 생기가 넘치기도 하지. 셋 센다. 그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거야.”
허리춤에 대충 매달려 있던 수왕검을 뽑아 백흉의 목에 가져다 댄 황준우가 차갑게 음성을 흘렸다.
“하나.”
“유령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셋까지 갈 것도 없이 눈을 부릅뜬 백흉이 제자리에서 곧장 일이섰다.
“멀쩡히 살아 있지?”
“그, 그렇습니다.”
“진짜 죽고 싶지는 않나 보네.”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황준우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 흑흉에게로 향했다.
“너는 혹시 아직 유령이냐? 그러면 진짜 유령 만들어 주고.”
“사,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좋아. 그럼 둘 다 살아 있는 걸로?”
“그렇습니다!”
하나가 된 듯 외치는 두 사람의 우렁찬 목소리에 눈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좋아. 백흑쌍흉. 우선 다시 만나서 반갑다.”
“죄송한데…….”
“우리 언제 본 적 있습니까?”
두 사람은 황준우의 얼굴을 떠올리려 무던히도 애썼다. 무림 활동을 안 한 시간을 생각하자면 결코 마주칠 수 없어야 하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황준우의 나인데, 또 그렇게만 생각할 수가 없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했다.
“호, 혹시 반로환동이 아닙니까!? 흑아!”
“백아 말대로 반로환동의 노선배십니까!?”
동시에 황준우의 주먹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춤을 췄다.
“아악-!”
맞은 부위를 또 맞은 두 사람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몸에게 어디 노선배래. 확 씨. 이것들을 진짜 무덤으로 집어넣어 버릴까 보다. 안 일어서!?”
“백아는 일어났습니다!”
“흑아도 일어났습니다!”
“좋아, 영감들. 나도 나이 많은 양반들 잡고 그렇게 괴롭히고 싶지 않아. 일전에는 죽은 척한 것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했고.”
“…….”
“…….”
백흑쌍흉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가 한 대라도 더 맞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대답 안 해?”
“백아, 대답합니다!”
“흑아, 대답합니다!”
“좋아. 둘 다 우선 죽고 싶진 않지?”
두 사람은 대답 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기회를 준다. 너희 둘, 서왕(鼠王) 어디 있는지 알지?”
“……!!”
“……!!”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백흑쌍흉의 눈이 허공에 부딪쳤다.
“거짓말 치면 더 이상 대화는 없다.”
그 말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두 사람이었다.
“아,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모릅니다.”
백흉의 말을 흑흉이 받는다.
“당연히 모르겠지. 그놈 성격상 한 번 노출된 위치에 계속 있을 리는 없고. 어쨌든 연락은 계속 하고 있는 것 아니야?”
“가, 가끔 연락합니다.”
“아주 가끔입니다.”
“이번 일도 서왕이 시킨 건가?”
“아닙니다. 이번 일은 서왕과 관련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누가 시킨 일이야?”
“그, 그건…….”
백흉이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흑흉 역시 조심스럽게 황준우의 시선을 피했다.
“먼 칼하고 가까운 칼, 어느 쪽이 무섭지?”
황준우가 다시 찼던 허리춤 수왕검의 손잡이를 잡는다.
“무, 문상(文上)이 시켰습니다!”
“문상이 공주를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문상? 한림원 대학사?”
“네네, 맞습니다.”
“그 문상입니다!”
황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째서 한림원 대학사가 주연하를 잡아 오라 시켰는가? 심지어 무림오흉 중 하나로 이름 높은 백흑쌍흉까지 시켜서 한 일이다.
‘황궁 내에 일이 있긴 있군.’
짐작이 확신이 되었다.
가볍게 턱을 쓰다듬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북경까지 가는 김에 선심 한 번 쓸까?’
그래도 친구라고 조금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상대가 그 한림원의 대학사라고 하지 않는가? 나름대로 과거시를 준비하고 있는 황준우 입장에서 이 나라 모든 학사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가 음흉한 암계나 꾸미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았다.
“뭐, 그건 북경에 도착해서 생각하고. 우선 너희 둘한테 서왕이 계속 연락은 하고 있단 말이지?”
“말한 것처럼 아주 가끔입니다.”
“정말 가끔입니다!”
황준우의 가는 눈매에서 불안함을 느낀 백흑쌍흉이 하나가 되어 외쳤다.
물론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아무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연락이 또 온다는 말이니까. 어쨌든 한동안 함께 다녀야겠다.”
“…….”
“…….”
두 사람이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반항하자니 맞을 게 무섭고, 달아나도 결국 잡힐 것 같다. 그렇다고 정체 모를 무서운 황준우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 들린다. 이참에 헛생각 말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개과천선해서 잘 살아 보자, 백흑쌍흉. 상대가 한림원 대학사면 어차피 여기서 달아나도 금방 끝장나는 것 아니냐?”
“끙…….”
“고민하지 마. 애초부터 너희들한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앓는 소리를 내는 둘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은 황준우가 씩 웃었다.
동시에 놀라서 물러나려던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차가운 내력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끄으으-!”
“끄아악-!”
머리가 들끓는 것 같은 열기에 두 사람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놀라운 사실은 그 와중에도 황준우의 손이 그들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비명을 내지르는 두 사람의 신체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평생 동안 동산처럼 솟아 있던 허리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뿐만이 아니라 굽어졌던 모양마저 조금씩 일직선으로 자리 잡아 갔다.
“끄아악-!”
“아픕니다-!”
그 비명이 절정에 달할 쯤에는 젊은 청년처럼 똑똑히 정면을 바라보고 선 두 사람의 머리에서 황준우의 손이 떨어졌다.
“헉, 헉! 백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흑아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거칠게 외치는 두 사람의 핏발 선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엄청난 고통에 할 수만 있다면 황준우를 죽이고 싶은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어쭈, 눈 안 깔아?”
물론 그 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키는 대로 재빨리 눈을 깐 두 사람의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오른 것도 동시였다.
“흑아, 키가 좀 큰 것 같습니다?”
“백아야말로 키가 크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평생을 허리에 업고 살았던 짐이 사라졌다.
두 사람 모두 똑바로 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적입니까!?”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마구 더듬으며 놀라움의 비명을 연신 토했다. 아무리 봐도 눈이 잘못된 게 아니다. 환상은 더욱 아니었다. 주술에 나름대로 자신을 가지고 있는 백흉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흑아! 드, 등이 펴졌습니다!”
“백아도 똑바로 서 있습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황준우를 곧장 향했다.
“은인의 능력입니까?”
“은인은 신이십니까!?”
“내가 한 일은 맞고, 시끄러우니까 목소리 좀 죽여.”
황준우의 말에 두 사람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두 눈에 황준우를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들이 그간 꼽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받아 왔던 시선과 모욕을 생각하면 뒤늦게라도 허리를 편 것은 그야말로 축복과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공짜는 아니야.”
말 대신 행동.
황준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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