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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48화 (48/373)

학사재생 48화

“더 하고 싶은데?”

“화, 화낼 게다!”

“정말? 화내면 나 큰일 나는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더 놀려도 되겠군.”

“못된 심보로다.”

“딱히 착한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었어야지.”

“끄응…….”

주연하가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쿵쿵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온 노파가 만두 한 접시를 둘 사이에 내던지듯 올려놓는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고 처먹어. 이것들아!”

그 말과 함께 다시 쿵쿵.

일 층으로 내려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보통이 아닌 분인 건 확실하군. 그래서 이곳까지 나를 부른 이유는?”

황준우가 본론을 꺼내자 붉게 물들었던 주연하의 얼굴이 단숨에 본래의 빛을 찾았다. 흔들리던 눈빛마저 침착하게 가라앉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주연하의 모습이다.

‘이 여자도 대단하긴 대단하군.’

사람이 분위기에 따라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만큼 주연하가 자신을 감추는 일에 능숙해야 되는 환경에서 자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역시 대학사 탓이겠지?’

북경까지 오면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

그 중심에 문상이라 불리는 한림원 대학사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황준우였다. 주연하가 굳이 몰래 자리를 만들어 얼굴을 저렇게 바꾸면서까지 할 말은 그것밖에 없다.

“그냥 보고 싶어서 불렀느니라.”

“……?”

“그때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나누지 않았더냐? 산책도 너무 뜬금없이 끝이 났고.”

“그게 전부?”

“달리 이유가 필요한 게냐?”

턱 끝에 검지를 올린 주연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혹시 자신이 생각 못 할 다른 이유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다.

그 모습에 황준우는 또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너 진짜…….”

“아, 네 무공에 놀란 건 사실이다.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도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 죽이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니까. 모두 이해하고 있느니라, 후후.”

주연하가 웃는다.

그를 따라 황준우도 웃는다.

“시끄럽다고, 이것들아!”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으니 다시 이 층으로 올라온 노파가 잘 익힌 장육을 내던지며 성을 낸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일 층에서 처먹어! 힘들어 뒤지겠네!”

마지막까지 목소리를 높인 노파가 일 층으로 사라지고, 그때가 되어서야 웃음을 간신히 멈춘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지 그뿐이라니까 더 좋다. 너 의외로 대담하구나?”

“자주 듣는 말이다.”

“황제도 네 그런 면모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반역죄가 될 수도 있다.”

중원인 그 누구도 황제를 저리 쉽게 부르지는 않는다.

폐하라는 존칭은 기본.

사실 말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주연하가 조금만 고지식한 왕족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열을 토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친구 사이에 격식 차리는 거 아니라고 했다. 없는 자리에서 나라님 좀 부르는 게 어때서?”

“그,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이미 공자랑 척지려 했던 분이 할 말은 아니지.”

“그건 말한 바 있듯 네 착각일 뿐이다.”

“큭큭. 그래, 그래. 어쨌든, 그래.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친구로서 묻고 싶은데. 정말 이걸로 괜찮아?”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구나.”

“상황이 좋지 않잖아. 힘들 텐데. 힘 좀 있는 친구 도움 받고 싶지 않아?”

황준우의 말에 주연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모를 수가 없잖아. 그저 가벼운 보표행인데 암살 시도만 몇 번이야. 내가 설마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해 보여?”

“그것으로 끝이다.”

“오호, 이렇게 발뺌하시겠다.”

앞에 놓인 장육을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은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우물우물.

“그럼 이렇게 말하자.”

“무얼 말이냐?”

“문상. 한림원 대학사라고 해야 할까?”

“…….”

눈이 흔들렸다.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큰 파동이다.

잔잔한 호수에 무거운 바위가 하나 던져진 것 같은 느낌. 결국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 주연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알았느냐?”

“내가 이래 보여도 귀가 밝아.”

“궁에서도 몇밖에 모르는 중요한 비밀이다.”

“그 몇밖에 중 하나로 나도 뽑혀 버렸네.”

“중요한 일이다. 자칫하면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그리 말하던 주연하의 눈이 문득 웃고 있는 황준우의 얼굴에 멈추었다. 말할 리가 없다. 주연하가 아닌 황제가 찾아와 협박하고 회유한대도 입을 다물 것이 분명하다. 결국 주연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전생의 황준우는 오지랖이 넓었다.

원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도와주려 하였고, 덕분에 똥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이번 생에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 작은 선심을 쓸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이미 밥상은 차려 줬잖아. 솔직하게 부탁만 해. 들어줄 테니까.”

“괜찮다.”

“정말?”

“조금은 괜찮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느니라.”

“…….”

짧은 침묵이 흘렀다.

흔들리는 주연하의 눈동자와 황준우의 시선이 공중에서 오간다. 하나 그 시간도 잠시. 주연하의 눈동자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떨림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비추는 것은 싸우고자 하는 이의 용기뿐이다. 그를 마주한 황준우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미안하다. 내가 너무 나서려 했네.”

인정했다.

주연하는 그가 오지랖을 펼쳐서 도와야만 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녀는 강하고, 용기 있으며, 단단한 바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황준우가 먼저 나서 그런 주연하를 돕는 것은 오지랖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오만이고 만용일 뿐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사과를 건넸다. 자신이 주연하의 그릇을 너무 얕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마음은 참으로 고맙구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걱정을 받아 보았다.”

“그러냐.”

“고맙고, 또 고맙구나. 그러니까 실망시키지 않을 게다. 나는 싸워서 이길 것이고, 언제나 당당히 네 옆에서 동등한 존재로 서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친구란, 바로 그런 존재다.”

“…….”

“술은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구미가 당기는구나.”

“마실까?”

“아니. 내일은 일이 많다. 그리고 너, 이제 막 성년이 된 주제 아니더냐?”

“이제 막 성년이면 술을 마실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건방지도다.”

“흐흐.”

황준우가 음흉하게 웃고 주연하도 웃는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어려움이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잡담을 나누고 서로를 놀리고 웃고 떠들었다.

두 친구의 수다로 북경의 밤이 깊어 갔다.

“강한 여자야.”

아침 일찍, 북경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한 황준우의 머릿속으로 주연하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감성은 소녀이지만 마음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때문에 도움을 주려고 나섰는데 오히려 차였다.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또한 이 위기에서 그녀가 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혹시 만약, 그렇게 살다가 죽게 되면 그때는 꼭 내가 복수해 주마.’

스스로의 복수조차 거둔 황준우가 친구를 위해 첫 복수의 맹세를 했다.

그것만으로 더 이상 주연하의 일에 대한 신경을 끊은 황준우의 얼굴 위로 고민이 떠올랐다.

‘오늘은 뭘 하고 보내지?’

북경에서의 삼 주야.

하루는 정말 발에 땀이 날 정도로 돌아다녔다.

이튿날 오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주연하를 만나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따지자면 할 일은 많았다.

공부라든가, 공부 또는 공부 말이다.

“하지만 굳이 모두 쉬고 있을 때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남들이 쉴 때 공부해야 앞서 나갈 수 있다.

매일같이 백교가 하던 말도 잠시 떠올랐지만 단숨에 지운 황준우의 눈 속에는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라는 고민만이 가득했다.

“아, 그냥 억지로라도 도와준다고 할걸 그랬나.”

하도 심심하니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쯤 돼서야 정말 할 일이 공부밖에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공부를 하기는 싫다.

“으음……”

황준우는 침상 위에 누워, 떠오르는 해가 하늘 중심에 걸릴 때까지 시간을 죽였다. 별다른 행동도, 생각도 안 한 채로 말이다.

‘이것도 생각 외로 괜찮은걸?’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해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 느낀 황준우의 눈이 천천히 감기려 할 때였다.

“주인, 주인. 백아한테 연락 왔습니다.”

“서왕이 흑아를 찾습니다.”

황준우의 방 안으로 두 명의 인영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백흑쌍흉.

꼽추에서 완전히 허리를 펴게 된 둘은 황준우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다. 무력에서도, 능력에서도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란 것을 인정한 탓이었다. 물론 덕분에 강시를 만든다든가, 제멋대로 날뛴다든가 하는 일은 모두 금제 당했지만 아무렴 어떻던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굽었던 허리가 펴진 것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조금 과장삼아 개과천선이라고 이제는 착한 일도 대가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가끔 들었다.

“서왕이라고?”

나른한 오후에 잠에 빠져들려던 황준우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맞습니다. 서왕입니다.”

“놈이 북경에 있었습니다.”

“오호라.”

지루한 시기에 찾아온 꼭 필요한 일.

‘서왕.’

오랜만에 떠올린 그 이름이 마침 딱 알맞은 시기에 찾아왔다.

황준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서, 어디 있다고 하는데?”

“유시(酉時) 전에 연락을 준다고 했습니다.”

“백아한테 연락한다고 했습니다.”

백흉은 스스로를, 흑흉은 검지로 백흉을 가리켰다.

“거참, 정신 사납네. 너희들 말투 어떻게 못 하냐?”

“말투가 정신 사납습니까?”

“어떻게 바꾸면 됩니까?”

“거 일단 백아니 흑아니 하는 이름부터 바꾸자. 네놈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건 전 중원이 알고 있잖아.”

“다 잊어 먹었을 겁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전부 다는 아니지. 나 같은 경우도 있고, 그때 금의위 백호장 양반도 알고 있었고.”

“…….”

동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본 황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지금부터 말할 때 한 가지 제약을 건다. 스스로를 자칭하지 말 것.”

“백아를 백아라고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백흉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부터는 하지 마. 정신 사나우니까.”

황준우의 단호한 말에 백흉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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