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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53화 (53/373)

학사재생 53화

“우연은 아니야.”

애초부터 인근에 느껴지는 경호의 기(氣)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 찾아왔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생각한 황준우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휴가는 잘 보내고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북경이란 곳이 넓고 신기한 게 많다 보니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말이죠. 음식도 객점 따라 타 지방의 것들도 다양하게 하니 맛보는 재미도 보통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것 같더니 제법 잘 즐겼나 보네.”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경호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래서 내일 아침까지 달리 할 일은 있어?”

“목표는 없습니다. 괜찮으면 같이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젯밤에 발견한 괜찮은 사천 요리 객점이 있습니다. 입 안을 따갑게 만드는 매콤한 맛이 일품인데 꼭 도련님께 맛보여 주고 싶었어요.”

“오호, 세상의 매운맛을 한 번 보라 이거지?”

“바로 그겁니다. 흐흐.”

“약았어, 경호.”

“도련님만 하겠습니까.”

“뭐, 그래. 내가 좀 약았긴 하지.”

그렇게 말하며 뒷짐을 진 황준우가 경호를 바라보았다.

“경호, 우린 친구지?”

뜬금없는 말에 경호가 의문을 표한다.

황준우의 얼굴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붉어진 채였다.

‘와, 이게 뭐라고.’

내뱉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입 바깥으로 튀어 나가고 나니 엄청나게 부끄럽고 민망하다.

‘괜히 말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을 감춘 황준우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됐고. 그 세상의 매운맛이나 보게 안내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워낙 영특하신 탓에 때로는 도련님의 나이를 잊기도 하고는 했었죠. 감히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죽마고우(竹馬故友)가 있다면…….”

“그, 그만! 경호, 그만!”

붉어진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은 황준우가 재빨리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걸 그리 쉽게도 말한담.”

“도련님이 물어보셨지 않습니까. 그걸 왜 제 탓 합니까? 언제나 생각하지만 진짜 성격 이상한 편이세요.”

재빨리 그 뒤를 따라붙은 경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걸 이제 알았나. 거, 헛소리 말고 빨리 안내나 하라니까. 그 사천 요리 잘한다는 객점 말이야.”

“방향 그쪽 아닙니다.”

“그럼 돌리지, 뭐.”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반 바퀴 몸을 뱅글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하는 황준우를 향해 웃음을 흘린 경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쪽도 아닙니다, 도련님. 이쪽이에요. 이쪽!”

“진작 말하란 말이야!”

성을 내는 황준우가 또 한 번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붉어진 얼굴 아래 감춰진 입가로는 미소가 피어 오른 채였다.

2. 흘러간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휴일을 보낸 황준우와 경호를 비롯한 만금표국 표사들은 다음 날 아침 약속된 장소로 한 사람도 늦지 않고 모여 소주로 출발했다.

그렇게 잡음 없이 소주에 도착한 이후로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흘렀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과 밥을 먹고, 백교와 함께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다. 황서연 경호 등과 무공 수련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황준우도 열여덟이 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나날에 가장 눈에 뜨이는 사항을 몇 가지 정리하자면 역시 경호의 무공 성장을 가장 첫째로 꼽을 수 있을 터였다.

황준우에게 무공에 대한 조언을 받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정체해 있던 그의 무위가 단숨에 일류를 넘어 절정에 도달했다.

황준우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늦다고 생각했다.

경호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은 버릴 수 없다며 고집하는 탓에 익히고 있던 맞지 않는 옷과 같은 무공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대신,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있던 것을 개량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본래 황준우의 첫 계획대로 처음부터 새로 익혔으면 오히려 더 빠르고 편했을 텐데 억지로 맞지 않는 것을 맞추려 하다 보니 성장이 많이 더뎌졌다. 그래서 시간이 이만큼이나 걸린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기는 했다. 그 개량한 것에 또다시 자신을 맞추어 결국 하나의 벽을 넘은 셈이니 말이다.

황준우는 경호라면 노력에 따라 언젠가 절정도 넘어 초절정의 영역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황준우 본인에게도 중요한 향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시험만 무사히 합격하면 황석후와 백교 모두 더 이상 황준우에게 학문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공연히 약속한 상태였다. 황준우로서는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라 할 수 있을 터다.

덕분일까?

최근 들어서 황준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욱 학문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의지에 불을 붙인 탓도 있고, 이번에 떨어지면 다음 향시인 삼 년 뒤까지 잔뜩 괴롭혀 준다는 백교의 무서운 협박 역시 적지 않은 효력을 발휘했을 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서연이 많이 성장했다.

신체가 성장했다거나,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해졌다는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미모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뭐랄까. 꽃이 피기 시작했달까?

범상치 않은 핏줄 덕인지 방년(芳年)에 다가가고 있는 그녀는 노란빛 모란꽃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갖추고 마음껏 뽐내고 다니는 중이었다.

듣자하니 새해에 들어서부터 주변에서 들어오는 혼사(婚事) 이야기가 배로 늘었다고 하였다.

모두가 황서연의 미모에 반한 주변 총각들에 의한 일이었다.

“참, 서연아.”

늦은 저녁 식사시간.

다 함께 식사를 마친 후 나온 차를 들어 올린 황석후가 입을 열었다.

“생각 없어요.”

하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막혀 버리고 만다.

당황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황석후가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도독동지(都督同知)의 장남이라고 하는데 인물이 훤하고 평판도 굉장히 좋은 편이더구나. 아직 어린 나인데도 벌써 종 오품의 경력사(經歷司) 일을 맡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스스로에 대한…….”

“아빠.”

입김을 호호 불어 뜨거운 차를 식히고 있던 황서연이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황석후를 부른다.

“그렇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황석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그리 내키지는 않는구나.”

“그런데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요. 전 싫어요. 아직 남자를 만날 생각도 없고, 시집가고 싶은 생각은 더더 없다고요.”

“그래도 도독동지가 직접 서신까지 보내서 부탁했는데 말이라도 꺼내 보아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느냐.”

“저한테는 예의 아니거든요.”

“끙. 그럼 못해도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는 서신을 받아 왔는데 그쯤은 읽어 보거라. 혹시 아느냐. 그 진심이 네 마음에 와 닿을지. 그 정도 도리는 있어야 한다.”

황석후가 품에서부터 서신 봉투를 하나 꺼내 내민다. 그 엄숙한 표정에 마지못해 서신을 받은 황서연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생각은 해 볼게요.”

“그래, 그러도록 하렴. 한데…… 벌써 딸한테까지 예의를 지켜야 될 시기가 된 건가. 음…….”

침음성을 흘리는 황석후의 얼굴 위로 서운함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 딸도 나이가 있는데 내가 너무 주제넘었지. 아비라고 해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이, 참. 아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딸아이의 작은 말에도 막 가슴 한편이 아프고 상처가 남고 그러네. 허허. 나이 탓이야, 나이 탓. 그렇지 않소, 여보?”

뻔히 보이는 황석후의 짓궂은 장난에 내심 미소를 짓고 있던 서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그런가 봐요. 우리도 언제까지 젊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마당이니, 연이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지요.”

“두 분 다 이러기야!?”

당황한 황서연이 담담하던 태도를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제는 안 하던 반항까지 하는 걸 보니 사춘기일 수도 있어요. 어른들이 싫어질 나이죠.”

“음…… 사춘기로군.”

서시의 말을 황석후가 받는다.

“내가 언제 반항했다고, 오빠도 무슨 말이라도 거들어 봐!”

옆에서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던 황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주억였다.

“사춘기인 것 같긴 하지.”

“너무해, 오빠. 작년 일도 다 내가 용서해 주고 그랬는데!”

“괜찮아. 너무 상심하지 마. 나는 내 동생이 사춘기여도 누구보다도 예뻐 보이는걸.”

곧장 눈물이라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을 한 황서연을 본 황준우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울컥한 감정이 잔뜩 벅차올라 있던 황서연의 표정이 눈 녹듯 풀어졌다.

“저, 정말? 예뻐 보여?”

“그럼. 하나뿐인 여동생이잖아.”

얼굴을 붉힌 채 조신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린 황서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를 조금은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황석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허허…… 이것 참. 제 오빠한테는 끔뻑 죽는구먼.”

“어려서부터 그랬잖아요.”

“뭐어. 이상한 일인가?”

찻잔을 내려놓은 황서연이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모를 향해 되물었다.

“전혀.”

“오히려 의좋은 남매라 보기 좋단다.”

두 사람은 짧은 망설임도 없이 확답했다.

조금 과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남매 사이가 좋다는 것은 부모로서 기쁜 일이다. 둘이 매일 같이 치고받고 싸워서야 미래가 걱정돼서라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됐지 뭐. 그치 오빠?”

“좋지.”

“우히히.”

동의를 얻어 내며 즐겁게 웃는 황서연을 웃는 눈으로 바라보던 서시의 눈에 짧은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이가 좋은 건 문제가 아닌데, 그것 때문에 다른 남자는 거들떠도 안 보려고 하니.’

어느 순간부터 제 오빠가 최고라며 다른 남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된 것은 문제였다. 당장이야 아직 꽃다운 나이고 시집보내기 아쉬운 소녀라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는 또 다를 이야기 아닌가? 황준우만 하여도 여자에 관심이 없어 걱정인데 황서연까지 한술 더 보탠다 생각하면 아찔한 감정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비교 대상이 황준우여서야 더 막막한 일이다.

‘내 아들이기는 하지만 잘났지.’

인물 훤하고, 머리도 좋기로 소문났다.

성격 역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함이 걱정이기는 하나 인정(人情)이 없지는 않다. 특히 무공에 대해서는 가히 천부적인 수준을 벗어났다고 들었다. 황석후에게 듣기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벌써 만금장 최강의 전력(戰力)이라 할 수 있는 여선위를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분명 그 방면에 관해서는 다시없을 천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굳이 그런 오빠랑 비교해서 남자를 보려 하니…….”

“응? 무슨 말 했어요?”

속이 갑갑해서 뱉은 말을 들은 황서연이 싱긋 웃으며 물어 온다. 제 눈에 넣어 평생을 보고 다녀도 기분이 좋을 것 같은 모습이다.

“정말이지. 우리 딸까지 너무 잘난 것 같다고.”

“알고 있어.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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