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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54화 (54/373)

학사재생 54화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예쁘기는 하지.”

“아이 참. 호호. 솔직히 내 엄마, 아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두 분도 너무한 편이면서.”

“음, 그건 무슨 말이냐?”

“밖에 나가서 물어봐요. 두 분 모두 애 둘 있는 부모라고 생각하기 힘들걸요. 아니, 조금 솔직히 말해서 아빠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엄마는 진짜로…….”

나이가 제법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숙미(成熟美)로 무장하여 더욱 아름답게 변한 서시를 바라보는 황서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엄마지만 같은 여자로서 부럽다.

“기왕이면 나도 엄마처럼 늙고 싶어.”

“우리 예쁜 딸.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참지 못하고 황서연을 품으로 당긴 서시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살을 마구 부비기 시작한다.

“어, 엄마?”

“응. 우리 예쁜 딸.”

“조, 좋은데 조금 답답해.”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데…….”

“사춘기라 그런 거니?”

“아니라고 해도!”

나른한 표정을 닮은 미소를 흘린 서시가 황서연의 발악에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애정을 표현한다. 그 와중에 어째서인지 들떴다가 상처를 입은 황석후의 곁으로 다가온 황준우가 빈 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아버지. 사춘기라서 그래.”

“그렇겠지? 그럴 거야. 안 그러면 이 아비가 진짜로 슬퍼질 것 같구나.”

“아니라니까아!”

그 와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이는 황서연이었다.

가족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면, 밤은 휴식 시간이다.

이른 오전부터 바쁜 하루를 보낸 만금장의 식솔들과 가족들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황준우의 경우는 요즘 그 휴식 시간마저 학문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향시 합격에 대한 열의도 있었지만 또 하나, 요즘 들어 새삼스럽게 더욱 깊이 다가오는 학문과 무공의 연관성이 제법 흥미로웠던 탓이다.

“만물은 함께 병육(?育)되어 서로에게 해를 끼치거나 방해되지 아니하고, 도 역시 병행하여 서로 어긋나거나 위배되지 않는다라……. 어떻게 생각해, 경호?”

백교가 학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 중용(中庸)의 한 구절을 읊은 황준우가 묻는다.

“글쎄요. 그냥 말만 듣자면 세상 모든 게 순리(順理)대로 흘러간다는 뜻 같은데.”

“정답이야. 결국 중요한 건 순리라는 거지. 그것이 큰 흐름을 만들고 중용을 세우고 정의를 채운다. 이걸 무공에 빗대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학문 아닙니까?”

경호의 답은 간단했다.

학문과 무공은 엄연히 다르다.

문(文)과 무(武)의 경계를 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니까. 그래서는 이 중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언젠가 맞닥뜨릴 조화의 벽도 무너트리지 못할걸.”

“설마 지금 조화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거셨습니까?”

“그래. 나는 조금 다른 식으로 깨우쳤지만 말이야. 만약 진즉 학문을 공부했다면 훨씬 더 쉽게 조화경에 오르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잘 고민해 봐. 네 말대로 벽을 나누어 순리를 말하고자 했다면 애초부터 만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겠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경호의 얼굴에 아연실색함이 떠올랐다.

“진짜 이미 조화의 경지에 오르셨던 겁니까?”

“아주 오래전에.”

“그러면 지금은?”

“어떨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던 표정의 경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안 들으렵니다.”

“어, 왜?”

“왠지 조금쯤 자괴감이 들 것도 같거든요. 지금도 조금 그런 느낌이고.”

“그렇게 말하니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하지 마세요. 화낼 겁니다.”

“으흐흐…….”

“도련님!”

“알겠어, 알겠어.”

경호가 눈을 치켜뜨자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황준우의 뇌리에는 곧장 다른 생각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직도 천조칠무의 다음 단계는 요원한 상태지만, 언젠가 학문의 깊이가 거기까지 닿는다면 새로운 길을 보여 줄지도 몰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마냥 기피하던 학문이 가깝게 다가온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무공과 학문, 경계를 나누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하나 즉, 만물로 보고 길을 향한다면 지금으로서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 다음 경지의 영역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황준우를 고양시켰다.

따지자면 이미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천하에 적수가 없을 황준우였지만 오를 나무가 있는 이상 그의 성장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재미있단 말이야. 학문도 무공도. 여기쯤이면 끝이 날까 싶은데, 또 그 뒤가 있어. 신비해.’

물론 그 생각을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무공은 모를까 학문을 재미있다고 말하는 순간 경호가 놀랄 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석후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그러면 황석후가 어느 정도 양보한 욕심을 또 한 번 피울지도 몰랐다. 황준우에게 엄연한 학사의 길을 요구한다든지의 경우 말이다.

‘아니 될 말이지. 아니 될 말이야.’

학문이 재미있다고 하여 학사가 될 생각은 없다.

현재 황준우가 허락하고 있는 경계는 엄연히 양생(兩生)이었다. 느긋이 산책을 하며 해가 완전히 저문 밤하늘을 바라보던 황준우는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아차!”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오늘 밤에는 연이랑 약속이 있었어!”

“아, 분명 시장에 나들이 가신다고. 그러고 보니 저녁 먹고 곧장 아니었습니까?”

“알고 있었으면 말해 줬어야지.”

“저도 방금 생각났습니다.”

“경호 멍청이!”

“제 잘못을 남 탓 하지 마시죠.”

“나도 멍청이!”

“동급으로도 만들지 마세요! 정확하게 말하면 도련님만 멍청이입니다.”

“너무 냉정한 것 아니야?”

“그럴 때는 공정이라는 단어를 써야 옳은 겁니다. 대체 누가 원시에서 도련님한테 장원을 준 겁니까?”

수다를 떨면서도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황준우였다.

“조금 더 늦었으면 진짜로 삐지려고 준비 중이었어.”

향긋한 분을 바르고, 어여쁜 옷으로 치장한 채 반 시진이나 황준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황서연이 웃는 얼굴로 말한다. 굳이 삐지는 데 준비까지 필요할까 싶지만 어쨌든 동생을 크게 속상하게 하는 일은 피했다고 생각한 황준우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일이었다.

“미안. 내가 진짜 정신이 없네.”

새침하게 혀를 차면서도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사한 미소를 보인 황서연은 황준우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어린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 곧 숙녀가 될 완연한 소녀는 사소한 것에도 기분이 나빠지고, 반대로 작은 일에도 크게 밝아지고는 했다.

“이것 봐, 오빠. 예쁘지 않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문득 눈에 뜨인 좌판에 놓인 장신구를 손에 든 황서연이 물었다. 작은 나비 모형이 달린 머리 장식이었는데 발랄한 느낌의 황서연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줄까?”

“진짜?”

“동으로 십오 문입니다.”

봄의 말미 무렵.

슬슬 더위가 올라오는 탓에 땀을 흘리며 손 부채질을 하고 있던 상인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싸다. 소주에 널리고 널린 장인들의 고급 머리 장식이 금자를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가격이라 할 수 있었다. 황준우는 곧장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상인에게 주고 머리 장식을 건네받았다.

“이리 와 봐.”

“달아 주게?”

“어렵지도 않지.”

제법 다정한 모습으로 머리 위에 얹어 주고 나니 황서연의 얼굴에서 토라졌던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기뻐하며 팔짱까지 끼어 온다.

“고마워, 오빠. 매일 잊지 않고 차고 다닐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만.”

“내가 그러고 싶어.”

황서연의 당당한 말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그 손길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들어 올린 황서연의 얼굴로는 행복한 웃음이 흘렀다.

그 상태로 조금 더 길거리를 방황하다 보니 이곳저곳 늘어져 있던 좌판들도 사라지고 건물들 사이에서도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유시(酉時)가 넘은 시각.

“슬슬 들어갈까?”

“벌써?”

“늦었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황서연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칠 주야에 한 번씩쯤 행사처럼 있는 둘만의 나들이다. 이 시간 동안만큼은 경호도 뒤를 따르지 않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된 두 사람이다. 심지어 황준우의 무공은 황석후가 말하기도 측정 불가다. 쓸데없는 시선을 두기보다는 마음껏 놀게 하는 것이 옳았다.

“일찍 들어가야 키 큰다.”

“이미 다 컸어.”

“모르지. 아직 더 클지도.”

“그건 안 돼. 징그러울 거란 말이야.”

실상 육척(27cm = 일척)이 조금 되지 않는 황서연의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잘 자란 편이랄까?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컸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쉽다.”

“다음 주도 있잖아.”

“그땐 그때고.”

“나이가 들수록 투정이 느는 것 같은데.”

“안 받아 줄 거야?”

“적어도 지금은 여기까지.”

웃음 지은 황준우가 황서연의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두들길 때였다.

“도저히 못 참겠다. 개자식!”

골목길 사이에서 튀어나온 청년 한 명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갑작스럽게 황준우를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따라오던 시선이 있었으며, 그를 향해 살기까지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혹할 부분은 따로 있었다.

‘뭐야, 이 주먹은?’

형편없다.

그냥 비웃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허리춤에 찬 검이 무색할 정도로 허접한 주먹이다. 이래서야 동네 왈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이랄까? 몸에서 느껴지는 내력까지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쯧쯧, 취기(醉氣)를 감당하지 못했군.’

갑작스럽게 폐부 깊숙이 와 닿는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황준우는 고개를 돌려 가볍게 피하려 했다.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위협적인 편도 아니고 하니 사유 정도는 들어주고 어찌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보다 더 빠른 손과 발이 있었다.

“어딜 감히!”

목소리를 크게 높인 황서연이 동그란 눈을 치켜뜨며 나서더니 볼썽사나운 주먹을 날린 취객의 발을 걸어 버린다.

“악-!”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내지른 사내는 육체적 고통보다, 또 다른 감정으로 인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 어찌.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황 소저!”

“뭘 어쨌다고 이럴 수 있고야. 그리고 난 그쪽을 모르는데 아는 체하는 건 또 뭐고?”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확 찌푸린 황서연이 주먹을 한 번 들어 올린다. 그 기세가 사뭇 위협적이었던지라 사내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들어 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겁먹기는. 흥.”

콧방귀를 뀌는 황서연을 보며 황준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게 누굴 닮아 성격이 저런 걸까? 어휴. 진짜 장차 시집갈 때가 걱정이네.’

만약 만금장의 식솔들 중 누군가에게 물었다면 말없이 그의 얼굴을 뻔히 보았을 생각이다.

“저, 정녕. 정녕 나를 모른단 말이시오?”

“몰라. 처음 봐.”

“불과 보름 전이었소!”

“보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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