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7화
“하나, 하나 차근히 배워야 될 게다. 자만하지 말고 천천히.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면 충분히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 힘내 보거라.”
“예, 아버지.”
아들의 깨달음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황석후의 말에, 황준우가 힘차게 소리친다.
“부자(父子)지간 보기에 좋아 부러울 정도네요. 근데 어떻게 하죠. 저 지금 무지 배고픈데.”
서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작은 박수를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시장할 때가 되었구려.”
황석후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 깨서 일이 생긴 탓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서 준비하자꾸나.”
“네, 아버지.”
두 부자가 조식(朝食)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서시의 재촉 탓도 있지만 본인들의 기대도 큰 탓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은 즐겁다.
누구나 같은 심경일 것이다.
향시를 치르러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조식 시간이었다. 황준우는 한동안은 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온힘을 다해 배가 가득 차다 못해 넘칠 때까지 먹은 이후에야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난번 회시 때는 별생각 없이 남경까지 갔는데, 조식 때 먹다 남긴 음식이 그렇게 아까웠었다.
식사 시간을 보내고 숙수를 대신하여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한 서시가 직접 싸준 도시락까지 챙겨 든 황준우는 드디어 향시를 위한 남경행(行)에 나섰다.
일행은 많지 않았다.
호위무사 경호와, 글 스승인 백교. 단 두 사람을 비롯한 황준우까지 총 세 명이 일행이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어째서……?”
부채를 살랑거리며 바로 옆에서 웃고 있는 백교를 향해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는눈을 살짝 떠 황준우를 바라 본 백교가 말한다.
“이번 향시만 합격하시면 작별 아닙니까. 마지막 졸업 시험인데 그래도 끝을 지켜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후후.”
“가시려고요?”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백교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글 선생이라는 명분으로 찾아와 십 년을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던 황준우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진정으로 스승이라 부르고, 그리 여겼다. 그래서일까? 백교가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존재하는 듯 아닌 듯 잘 보이지 않지만 만금장에 머물기도 했고, 엄연히 한 식구라고 생각하고만 있었다. 한데 작별을 말한다. 딱히 표를 내지도 않고,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장주님께는 말씀드렸으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그, 그게 아니라…… 저는 지금 방금 들었고…… 게다가 어디로 가시려고요?”
당황하는 황준우가 재밌다는 듯 부채로 입가를 가린 백교가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산 따라, 물 따라. 그렇게 살아왔듯 그렇게 떠나가야지요. 또 어딘가에 제 인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
“후훗, 혹시 섭섭하신 겁니까?”
“솔직히…… 그렇네요.”
“그래서 이렇게 이번 여정에 따라 나선 것 아니겠습니까. 사제(師弟)간의 함께하는 시험 여정이라. 운치 있지 않습니까?”
“운치까지 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냉정하시군요.”
“제가 자주 쓰는 말인데, 듣기도 하네요.”
“후후후.”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솔직히 듣는 순간 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섭섭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교의 의지가 길을 찾아 나서니 누구도 막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으니, 또 이별 뒤에 만남 있으라.”
“좋은 말이네요.”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노력하고 있어요.”
황준우의 입가로 조금은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백교는 그를 웃는 낯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채를 접은 백교가 황준우의 봇짐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스승님?”
꺼내 든 책은 그 유명한 대학(大學)이다. 사서오경 중 하나로 향시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출마하는 책인데, 이걸 갑자기 왜 꺼낼까? 아니 사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뻔한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서운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서운할 시간도 없게 공부하는 게 좋겠지요.”
“갑자기 서운함이 싹 가시는데요.”
“이미 늦었습니다. 게다가 합격하지 못하시면 제가 계속 만금장에 있어야 된다고요.”
“어, 그건…….”
“그때가 되면 이 주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다섯 시진씩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향시에 합격할 때까지 괴롭혀 드릴 거랍니다. 기대하는 건 아니시겠죠? 후후.”
“전혀요.”
정색하며 손을 내뻗은 황준우가 백교로부터 건네받은 책자를 펼쳤다.
‘어쨌든 이번 여정이 마지막이란 건가.’
소주에서 남경까지는 관도도 잘 나 있고 거리도 멀지 않아 느긋이 걸어도 길어야 보름이다. 도착한 이후로는 마지막 향시 준비를 위해 열을 올려야 하니 정신이 없을 터다. 새삼스레 이제야 웬일로 말을 건네주지 않은 황석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즐기라는 뜻이시겠지.’
책장을 넘기던 손길이 멈추고 두 눈이 잠시 백교의 옆모습을 훑는다.
기이할 정도로 늙지 않는 외모에, 비밀이 많은 남자.
‘무공도 생각보다 더 뛰어나고.’
엄연히 말해 황준우의 평가로도 현재 만금장 내에 있는 인물 중 제일.
대표두 여선위라는 괴물까지 생각한다면 백교가 일개 학사가 아니란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쯤에 와서는 궁금해진다.
“혹시 진짜 정체가 어떻게 되세요?”
황준우의 뜬금없는 질문에 정면을 바라보고 걷던 백교가 부채를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린다.
“천하제일 글 스승 백교입니다.”
“그 외는요?”
“현재 만금장에 취직되어 있군요. 얼마 가지 않아 실직자가 될 예정입니다.”
“더 말해 줄 건 없으신 거죠?”
“공자께서도 숨기고 계신 게 많은 것 같은데 서로 교환은 어떻습니까?”
“…….”
솔직히 숨기고 있는 것만 따지자면 황준우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서로 나누어 봐야 손해일 뿐이다. 때문에 여태껏 한 번도 백교의 비밀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이고 말이다.
“후후, 잡념은 거두시고 공부에 집중하세요.”
백교의 부채가 황준우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백교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내인 것 같았다.
서운할 틈이 없게 만들어 준다고 했던가?
“죽어라!”
“어딜 감히!”
“저, 저 어린놈을 잡아!”
“이놈들, 도련님이 공부하시는 데 방해된다!”
거친 박도를 든 도적들 사이에 뛰어든 경호가 맹수처럼 날뛰며 공격을 펼친다. 절정 고수에 이른 그의 손속에 도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하고 있었지만 머릿수 하나만을 믿고 끝까지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소주와 남경 사이의 관도가 잘 닦여 있다고는 하지만 도적 무리가 단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 준다고 하여도 뜬금없이 자리를 잡고 영업(?)하는 강도들이 생겨나니 행인들도 아주 가끔씩이지만 불운(不運)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준우 일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불운이 황준우 일행이 아닌 도적 떼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으아악-!”
“괴물이다!”
“누굴 보고 괴물이라는 거야!”
비명을 내지르는 도적 떼를 향해 경호가 소리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과 무관한 귀신을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짓이고, 정의로운 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용기 없는 비굴한 행위라 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 틈새로 파고드는 백교의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강물과 같았다.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온 내용입니다. 진정으로 모셔야 될 상대에게 아첨하고 정의로운 일 앞에서 용기 내지 못하는 것을 귀(鬼)와 의(義)로 대비시켜 알기 쉽게 풀어 주셨지요.”
답을 하는 황준우의 목소리는 살짝 떨림이 느껴졌다.
차분하게 말하고 싶지만 주변의 풍경과 소리 어느 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 없다.
“맞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백교의 강물과 같은 음성이 또 한 번 울려 퍼지고.
“으악-!”
“그, 그만!”
그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황준우는 계속해서 중간중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향시란 극한(極限)의 상황에서 치르는 시험의 장(場)이니, 오죽했으면 과거 시험을 치른 문인들 중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사람이 일곱 번이나 변화한다고 하였겠습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뜻과 의지를 말하고 적을 수 있어야 비로소 향시에서 결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거야 시험에 대한 긴장이나 걱정 탓에 그런 것 아닙니까? 저는…….”
“긴장이 하나도 안 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요.”
무(武)가 아닌 문(文)을 시험하는 장.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긴장이 조금도 안 될 수는 없었다.
“거듭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셔야 하고…….”
“살려 줘-!”
“죽일 생각은 없거든!? 으하하! 네놈은 죽어라!”
고개를 주억이며 백교의 말에 동의하려던 황준우가 결국 몸을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경호 너 좀 이상해!”
죽어라고 소리치고, 죽을 듯이 비명을 내지른 도적들이지만 정작 누구도 죽지 않은 채 관(官)으로 넘겨졌다. 애초부터 그런 과한 손속이 필요한 상대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처사다.
“그러니까 전 그런 건 잘 못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미친 듯이 도적들을 제압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경호는 조심스럽게 백교의 옆으로 다가가 작게 목소리를 속삭였다.
“아닙니다. 훌륭하셨습니다. 덕분에 소장주님의 평정심을 크게 시험해 볼 수 있었으니, 아주 잘하신 거지요.”
백교는 칭찬해 주었지만, 자신의 행동이 가히 해괴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두 번 다시는 안 할 겁니다. 제 스스로도 어디 정신이 나간 놈처럼 느껴지는데,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본성이 없으면 힘듭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새로운 자신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실지도…….”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십시오!”
“둘 다 시끄러워요!”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도 모른 척하던 황준우는 결국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높였다.
부채를 활짝 피며 얼굴을 반 이상 가린 백교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들리셨습니까?”
“애초에 들으라고 한 말 아닌가요?”
“맞습니다.”
“…….”
“이런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계속 말해 온 평정심의 유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이번 시험도 불합격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흔들리실 생각인 겁니까?”
“스승님, 조금 뻔뻔하신 것 같습니다.”
황준우의 말에 펼친 부채로 눈마저 가린 백교가 계속해서 말을 흘렸다.
“이게 바로 평정심입니다. 큭큭.”
부채가 웃음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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