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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58화 (58/373)

학사재생 58화

일행들의 걸음은 느긋하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여정은 이내 목적지인 남경까지 이른다. 애초에 먼 거리도 아니었고 관도도 잘 닦여 있던 만큼 큰 험난함 없이 남경에 도착한 세 사람은 빈 방을 잡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시험을 한참이나 두고 제법 일찍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자리가 차기 시작해 오히려 적당한 방을 찾는 데서 애를 먹었다.

하기야, 시험 삼 주야 전쯤 되면 방이 없어 노숙을 하는 학사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부터 시험 당일까지, 제 모든 열과 성을 쏟을 생각입니다.”

좁은 방 안, 작은 책상 하나를 놓아 둔 채 마주한 백교가 엄숙한 얼굴로 말한다.

“이미 충분히 열과 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만…….”

황준우의 얼굴이 절로 질렸다.

스승과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감회도 잠시, 쉴 틈 없이 공부를 강요하는 백교 탓에 꽤나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 아직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는 얼마만큼 심하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쯤 좋아지려던 공부에서 마음이 달아나려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후후,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열과 성을 다한다 하여 소장주님을 억지로 공부에 매달리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봐야 좋아하지도 않으실 테고, 효율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처음에는 분명 그리 시키셨죠.”

“처음이었으니까요. 뭐든지 시작이 중요하답니다. 습관도 그때 배죠. 덕분에 지금은 제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소장주님 혼자서도 공부를 하시곤 하지 않습니까?”

“음…….”

황준우가 살짝 볼을 긁적였다.

무공에 도움이 되는 것도 같다는 악의(?)가 조금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황준우는 어느 순간부터 굳이 시험이 아니더라도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뽑을 것도 없고 거창한 선의를 더할 이유도 없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재미있었다. 옛 고인(古人), 특히 성현(聖賢)들의 말 중에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도 두루 있다. 그것들을 알고, 익히고, 깨달아서 실천한다. 쉽지도 않고 마음대로 되지도 않지만 그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애초부터 황준우는 그런 인간이었다.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면 어린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 나이 때까지 억지로라도 끈기 있게 잡고 있지 않았을 터였다.

“역시 그렇죠?”

“그러네요. 동의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건.”

“후후. 어쨌든, 제 열과 성을 다한다는 말은 그런 소장주님을 최대한 돕고 응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아니지. 진짜 마지막이니만큼 정말 끝까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공자가 공부하는 모습을 일거수일투족 말이지요. 주무시지 않는다면 저 역시 자지 않습니다.”

“…….”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아날 것 같은 감정을 느낀 황준우가 주춤거렸다.

제법 돌려 말했지만 어찌 됐든 언제 어디서든 그가 공부하는지를 감시하겠다는 뜻 아닌가? 직접적 압박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라도 분명 간섭이 들어온다.

“절대 그런 것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혹시 제가 무슨 말 했나요?”

갑작스러운 백교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황준우가 물었다.

“아니요. 그냥 표정에 드러난답니다.”

“…….”

“감시나 그런 목적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정말 말 그대로 선의의 응. 원. 입니다. 힘내 주세요, 소장주님. 우후후.”

부채를 펼친 백교는 그 말을 끝으로 황준우의 건너편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작은 숨소리조차 의식되지 않게 낮춘 그와 황준우의 두 시선이 마주한다.

직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웃음을 보인 백교가 물었다.

“공부 안 하십니까?”

“……할 겁니다.”

책장을 펼치는 황준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가 정말 이번 향시만 합격하면……!’

물론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공부는 지루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은 빨리 흐르곤 한다.

어느덧 향시 시험 당일.

말끔히 차려 입고 조금은 긴장한 표정을 한 황준우가 시험장 내부로 들어섰다.

향시는 넓은 마당에서 펼쳐지던 원시까지와 달리 시험장 내부에서 몸 하나 앉을 수 있는 작은 각방을 배정하여 치른다. 그만큼이나 집중력을 높일 수도 있지만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그런 시험이 자그마치 칠 주야 동안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심한 강압감에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수험생들도 간간히 있었다.

물론 경호와 백교 모두 황준우가 그렇게 뛰쳐나올 걱정은 하지 않았다. 딱히 믿고 있는 바가 달리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냥, 어째서인지 큰일을 치르러 갈 때면 듬직해 보이는 황준우의 뒷모습이 그런 믿음을 심어 주었다.

그렇게 시험의 나날이 순식간에 흘렀다.

그동안 황준우는 정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 공부에 집중했고, 또다시 보름이 흐른 뒤 결과가 공개 되었다.

장원(壯元) 황준우.

칠 주야간의 시험이 확실히 만만치는 않았는지, 보름의 대부분을 휴식을 취하는 데에 사용한 황준우는 결과가 적힌 게시문을 보며 입가로 미소를 지었다.

“원시에 이어서 향시까지 장원인가요. 어쩌면 우리 소장주님은 제 생각 이상으로 학문에 재능이 있으실지도 모르겠군요.”

백교가 조금은 놀란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보며 말한다.

경호 역시 원시는 모를까, 인재들이 가득 모인 향시에서까지 장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에헴, 내가 이 정도라고.”

그래도 노력한 보람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심정을 느낀 황준우가 콧대를 높인다. 백교와 경호 모두 이럴 때만큼은 황준우에게 달리 반박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실상 이럴 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은 오히려 딱 하나밖에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아주 훌륭히 해내셨어요. 이제 소장주님도 거인(擧人)이 되셨군요.”

“저 역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장주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군요.”

“그렇지? 흐흐. 어쨌든 이걸로 공부로부터는 해방이다!”

저도 모르게 기뻐 소리친 황준우가 은근슬쩍 백교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그라면 이럴 때에도 절대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하라며 잔소리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일 뿐.

백교는 별다른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질문을 하나 던졌을 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공부는 한동안은 안 쳐다볼 거예요.”

“그거야 소장주님의 마음이시지요, 후후. 제가 묻는 건 공부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말 그대로, 앞으로 소장주님이 어떻게 하시고 싶은지를 질문한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요?”

“예.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학문에 모두 담겨 있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삶에 대해서 조금쯤 고민을 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 질문을 드린 겁니다.”

“삶…… 인생이군요.”

황준우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삶, 인생.

어찌 보자면 참으로 쉽게 논할 수 있는 단어다.

그저 숨만 쉬어도 이어지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니 말이다.

하지만 돌려 말해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백교의 질문이 그중 어느 측에 기울어 있을지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인 황준우가 말했다.

나름대로 가문을 위해 일하고 있고, 황석후로부터 해야 할 일도 배웠다.

무공은 이미 천하제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며, 학문 역시 거인이라는 칭호를 얻어 낼 정도로 열심히 연마했다.

그래, 여태껏은 그렇게 살아왔다.

하나 앞으로는 또 어찌 살까?

아직 황준우의 나이 열여덟.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너무 단순히 무공과 상업, 학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도 좋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정말 딱히 그 외에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 역시 황준우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이대로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이상하시지 않을 환경이지요.”

백교의 말이 딱 맞았다.

이대로도 좋다.

이대로만 가자.

황준우가 자주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실상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고 말이다.

하나 백교는 그 뒤를 말하려 한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 영원이란 없는 법.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나아가야만 되는 법도 있습니다. 그러니 소장주께서는 앞으로도 자주, 더 많이 고민하세요. 적어도 앞으로의 명확한 목표 하나쯤은 있어도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새겨듣겠습니다.”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확실히 이대로가 좋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러기 위해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고 나쁘지 않은 답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나 그것이 황준우라는 개인의 완전한 목표라고는 할 수 없을 터다.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는 백교의 말은, 결국 따지자면 그 뜻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계속 고민해 보고 올바르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준우의 대답에 밝은 웃음을 보인 백교가 고개를 주억인다.

“올바르게. 좋은 말입니다. 후후. 제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어요. 그럼,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 말로 끝이었다.

황준우가 무슨 질문을 더 하기도 전,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사라졌다.

당황한 경호가 시선을 이곳저곳 돌려 보았지만 백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먼 어딘가를 바라보던 황준우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참 바람 같은 분이야.”

“진짜 가신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 돌아올 생각은 없어 보이셔.”

“허…….”

예고했던 이별이고 그 시기가 다가왔을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 이별이란 짧을수록 좋다는 이야기도 했다. 경호 역시 그에 꽤 동감하는 편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당황스럽다. 비교적 관계가 얕은 본인도 그럴진대 황준우는 어떨까? 자연스레 황준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걱정이 담겼다.

“뭘 또 그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봐?”

“괜찮으신 겁니까?”

“안 괜찮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피식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찌 됐든 장원이다.

아쉬운 이별이 있지만 그만큼 기쁜 소식도 남았다.

가족들 모두가 좋아해 줄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조금 아쉬운 감정쯤은 어떻게든 떨쳐 낼 수 있었다.

“도련님, 어른이 되어 가고 계시는군요.”

뒤에 선 경호의 말에 피식 웃은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전생을 다해 현생.

모든 삶의 세월을 포함하면 그는 이미 경호보다 어른이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그럴까? 전생과 현생을 하나로 볼 수 있을까? 다르지만 같다. 또한 그렇기에 같지만 다르다. 열여덟 살의 황준우가 가진 감성은 마흔이 넘어가는 중장년의 낭만과는 엄연히 달랐다. 때문에 황준우는 내저으려던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일지도.”

입가로는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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