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9화
향시가 끝나고 보름간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향시 합격 결과도 받았으니 망설일 이유 또한 없었다. 황준우와 경호는 망설임 없이 남경을 벗어나기 위해 짐을 쌌다. 주변에는 그들과 비슷한 이유로 짐을 싸는 이들이 많았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방을 빠져나갔고, 황준우와 경호 역시 대수롭지 않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번에 시험 본 사람들이 정말 많았군요.”
경호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문사복을 걸친 이들이 유달리 많아 보였던 탓이다.
“이렇게 보니 진짜 많긴 하네. 대충 듣기로는 이천 명이 넘었다고는 하던데.”
“그러고 보니 그 이천 명도 넘는 사람 중에 장원을 하신 것 아닙니까? 다시 생각해도 뿌듯합니다. 하하.”
“내가 장원한 것이 그렇게 좋아?”
“그럼요. 누가 뭐래도 도련님은 우리 만금장의 자랑 아닙니까. 흐흐.”
“뭔가 조금 다른 마음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좋으면 됐지 뭐.”
“도련님은 안 좋으십니까?”
“말이라고…….”
이천 명 중에 제일.
대단한 일이다.
수십만이 넘을지도 모르는 무림인 중 제일이라 불리던 시절에 비하면 약소할지 모르나, 심장의 설렘은 못지않다. 거리의 수많은 문사들을 보고 난 이후에야 벅차오르기 시작한 감정이다. 전생과 현생의 스스로가 다름을 완벽히 이해한 덕일지도 몰랐다.
“당연히 기분 최고지.”
황준우의 솔직한 목소리에 웃음 지은 경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저도 비슷한 기분입니다. 하하.”
“그래도 너무 표 내지는 말자고. 여기 모두가 얼굴이 밝은 건 아니니까.”
아닌 게 아니라, 길거리의 문사들 중 절반 이상의 얼굴이 어두웠다. 향시는 시험이다. 결국 누군가가 합격하면 또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한 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이상의 세계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그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한 것.’
여기서 말하는 우리라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정한다. 이것을 백교가 말한 ‘삶’의 기준에 댈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는 황준우였다.
아직 그는 열여덟 살이고 시간은 많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금 나이 때에 고민해야 될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옳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황준우는 이미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답을 가지고 있는 채였다.
이 역시 학문의 도움이 컸다.
학문에서 말하는 성인들의 말씀이란 대다수가 군자의 도리와 협의를 바탕으로 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조차 오래도록 고민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역시 남은 게 많다.
백교에 대한 감정 역시 그 일부였다.
“보기 좋지 않군요.”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황준우를 향해 경호의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느낌과는 확연히 달랐다.
“뭐가?”
질문을 하며 경호를 따라 시선을 옮긴 황준우의 미간 역시 가볍게 찌푸려졌다.
척 보아도 흑도(黑道) 무리로 보이는 청년들이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인을 힘으로 끌고 가고 있다. 머리채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기게 하는 그들의 거친 행동에 많은 이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무림에서는 삼류로 취급되는 흑도 왈패라지만 그들 역시 허리춤에 검을 차곤 한다. 무공 하나 익히지 못한 일반적인 양민들이 그런 흑도패와 시비가 붙어서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그래, 이래서 이상적인 세계란 없지.’
남경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제법 치안을 탄탄하게 유지해도 이런 작은 시장 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막을 수가 없다. 불합리가 생겨난다. 그러니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못 참겠습니다.”
중년인이 눈물을 쏟아 내고 머리를 조아리지만 흑도패들의 거친 손길이 망설임 없이 이어지자, 결국 경호가 나섰다.
“그만두십시오.”
낮게 깐 경호의 목소리에 흑도패 청년들의 시선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그들이 경호의 말끔한 복색과 허리춤에 찬 검을 곁눈질한다. 이윽고 이마에 긴 십자 흉터가 남은 청년이 말문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시오. 다 사정이 있는 법이니.”
“사정이 있다 하여도 너무 과격하지 않소. 게다가 눈이 있어 그를 보았으니 어찌 모른 척한단 말이오? 그만하고 돌아가시오.”
“사정이 있다고 하지 않소. 무사께서 어디에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아이고, 무사님 살려 주십시오!”
흉터가 긴 청년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네 발로 기어 경호의 앞으로 달려간 중년인이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며 머리를 조아린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도 어린 딸과 노모가 있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으어엉.”
정말로 억울한 듯 소리치는 중년인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선 경호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만 돌아가시오.”
난처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십자 흉터의 청년이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자.”
“형님!”
그 뒤를 따르던 이들 중 몇몇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지만 결정에는 번복이 없었다. 오히려 대다수가 그의 결정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흔히 삼류라 불리는 흑도지만 눈치는 있다.
아니, 오히려 삼류이기에 눈치는 더욱 빠르다.
상대의 복색, 기세, 눈빛. 고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로 상대의 수준을 대충이라도 유추할 수 없다면 언제 목이 달아나도 변명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흑도 바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보인 경호는 이른 바 ‘진짜배기’였다.
어설프게 검을 차고 협의를 논하는 삼류 애송이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힌 명가(名家)의 무인이다. 혼자라 하여도 까다롭고, 속한 가문까지 나선다면 그들이 속한 남경의 흑도패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를 염라대왕 앞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는 야차로 돌변하는 것 역시 순식간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호의 다리 뒤로 숨은 중년인을 노려본 흑도의 청년들이 멀어져 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공!”
그들이 그렇게 사라지자마자 곧장 머리를 땅에 박은 중년인이 경호를 향해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감사를 표한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연쩍은 표정의 경호가 손을 들며 헛웃음을 흘린다.
보기 싫어 나선 일이지만 도움을 주고 누군가의 감사를 받는 일이 싫지만은 않다. 대다수의 협객들이란 이러한 연유 때문에 협행(俠行)에 나서고는 한다.
‘물론 그 대다수가 가짜에 불과하지만.’
일순간의 감정에 취해 협객 노릇을 하는 이들치고 끝마무리가 좋은 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황준우 본인이 그랬으니 말이다.
“그만 가자, 경호.”
“아? 예!”
뒷짐을 쥔 채 상황을 지켜보던 황준우의 짧은 말에 경호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대혀업!”
방금 전까지 빌빌대던 사람이 맞는지 날듯이 뛰어오른 중년인이 경호의 바지 자락을 힘차게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여전히 눈물을 왈칵 쏟아 내는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황준우가 잘 아는 눈빛이었다.
‘여기서 한 번 살아 봤자, 다음번에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대충 예상은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길어지기 전에 떠나려 했던 것이고 말이다.
“이 상태로 대협이 가면 전 죽습니다. 조금만 더 도와주십시오. 대협!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게, 저…….”
경호가 난처한 듯 목소리를 흘리며 황준우를 바라본다.
떨리는 두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명확했다.
‘도와주고 싶다 이거지?’
중년인의 말이 맞다.
이 상태로 두 사람이 돌아서면 결국 중년인은 말마따나 죽거나, 혹은 불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어리다는 딸과 노모 역시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짧은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경호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흑도 왈패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무림인의 개입은 소나기와 다름이 없다. 아니, 굳이 흑도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힘 있는 자의 작은 도움은 딱 그 정도에서 그치기 마련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
경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황준우의 말을 단번에 이해한 탓이었다.
어설픈 정의감으로 나선 작은 도움이 상대에게 있어 오히려 더 큰 피해로 돌아갈 수도 있다. 배웠고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또 잊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다면 끝까지 갈 생각을 해야 해. 그게 책임이야. 협객은 되지 못할지라도 어른이라면 최소한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한 뒷마무리 정도는 스스로 할 줄 알아야 된단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한참이나 어린 황준우의 말이 너무나도 옳다는 것을 알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 경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확실히 성급했다. 당장 보기 싫어 나선 일이 얼마나 번거로워질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과한 상상까지 간다면, 일이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에 우리 경호는 마음이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해는 하지만.”
피식 웃으며 경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황준우가 무릎을 쭈그리고는 여전히 눈물을 쏟아 내고 있는 중년인과 눈을 마주쳤다.
“아저씨.”
“예, 예. 공자.”
중년인은 곧장 경호의 바지 자락을 놓고 황준우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단숨에 힘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눈치가 빠르네. 아니, 약삭빠르다고 해야 하나?’
웃음이 나온다.
이런 사람들은 대다수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단숨에 은인을 져 버린다. 많이 겪어 봐서 잘 안다.
‘그렇다고 경호도 나선 마당에 여기서 그냥 물러나기에도 찝찝하고, 또 마냥 돕자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조금 있고.’
황준우는 문득 백교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삶의 방향 그리고 방식이라…….’
그중 방식.
전생에서 황준우가 잘못 택했던 것은 명확히 말해 방향이 아닌 방식이었다. 결국 방향만큼 방식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 있어 이번 삶에서의 방식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와주십시오, 공자. 제가 죽으면 노모와 어린 딸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간단 말입니까. 흐흑.”
정말로 간절히, 애타게 부탁하는 중년인을 보며 황준우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도와줄게요. 당신이 정말 억울한 사람이라면, 정말 끝을 보더라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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