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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60화 (60/373)

학사재생 60화

황준우의 말에 중년인이 자신의 사연을 사정하듯 풀어놓았다. 단순히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섰을 뿐이며, 그 탓에 흑도패에게 엄청난 이자 빚이 생겼다. 잘못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은 너무나 억울하다. 제 한 목숨 버리는 거야 어찌 될지 모른다지만 노모와 어린 딸은 이후 어찌한단 말인가? 그들이 자신을 대신해 빚을 갚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면 함부로 눈을 감을 수조차 없다고 한다. 듣던 경호가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가슴을 칠 만큼 구구절절한 사연이다. 또 어느 도시에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흔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삼창파(三窓派)라고 합니다. 듣자하니 보호비 명목으로 시장 상인들을 제법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관아에도 연줄이 있는지 쉽게 소탕되지도 않고,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남경을 곧장 떠나려던 행보를 바꿔, 또다시 인근 숙소에 자리를 잡은 황준우를 향해 인근을 둘러보고 온 경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 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한다.

황준우의 그 말이 제법 마음에 와 닿았던 탓인 것 같았다.

“좋은 자세야. 다만 너무 우직해서 문제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선 조금만 기다려 봐.”

하품을 하며, 침상에 몸을 누인 황준우가 여유롭게 발을 까딱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답답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경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번거로우시다면 저 혼자라도 다녀오겠습니다. 인근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작 흑도패 하나 아니겠습니까? 저도…….”

“거, 참. 성격 급하기는. 조금 기다려 보라니까 그러네.”

“그러다 또 놈들이 힘없는 양민들을 괴롭히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왔다.”

따지는 경호의 언성이 높아질 쯤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짧게 말한다. 동시에 방 안에는 백색 탈을 쓴 기괴한 분위기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상대의 기척을 뒤늦게 눈치챈 경호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황준우가 뒷짐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제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가 말문을 떼었다.

“백노가 주군을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요 인근에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는 게 백노였구나.”

“진짜 죽을 맛입니다. 성격상 몰래몰래 다니는 것도 잘 맞지 않고,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까?”

서왕을 도와 천하 전체에 정보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백노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황준우를 따르면 실컷 활개 칠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반쪽 같던 흑노와도 떨어져서 심심하게 다녀야 하고 해야 할 일도 점점 많아진다. 조금씩 정신이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참아. 원래 제일 중요한 게 이런 사전 작업이야. 그리고 약속했잖아? 이번 일만 끝나면 괜찮은 무공 하나를 덤으로 얹어 준다니까? 가면 뒤의 얼굴도 바꿔 주고 말이지. 게다가 듣자하니 잘하고 있던 것 같던데? 우리 백노, 훌륭해.”

“백노, 열심히 하겠습니다!”

투덜거리던 백노의 목소리에 단숨에 힘이 담겼다.

칭찬은 어린아이에게 있어 보약과 같다.

거기에 더해 달콤한 당과 같은 보상이 더해진다면 없던 힘마저 쥐어짜내고는 한다. 백노의 의욕이 다시 충전되는 것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로 피식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백노가 이 정도면 흑노도 조만간 한 번 불러서 당과를 먹여 줘야겠네. 함부로 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잘 붙잡아 줘야 앞으로가 편하지.’

가볍게 생각을 정리한 황준우가 손을 내민다.

백노는 품에서부터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황준우에게 건넸다.

“흠, 보자.”

건네 든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살피는 황준우의 눈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흥미에 이어서 실망, 뒤를 이어서는 웃음이 따른다.

“이야, 이거 진짜 재밌네. 역시 사람은 겉만 보면 안 돼. 정보가 이래서 중요하다니까. 수고했어, 백노. 가서 열심히 일하고, 조만간 또 보자.”

“힘내겠습니다! 충!”

조만간이라는 말에 들떴는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뱉은 백노의 신영이 또다시 단숨에 사라졌다.

“저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긴장 대신 떠오른 놀라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경호가 황준우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키우는 수하.”

“언제……?”

곁에서 계속해서 황준우를 지켜봐 왔다고 자부하는 경호다. 한데 그런 그가 모르는 새로운 수하라니? 예상치 못했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얼마 안 됐어. 필요해서 만들었거든. 그나저나 이것 좀 봐.”

피식 웃은 황준우가 백노가 건넸던 두루마리를 경호에게 내던진다.

제법 빠른 속도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두루마리를 간신히 품에 안은 경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법이네. 놓칠 줄 알고 던진 건데. 신법이 늘고 있기는 한가 봐.”

“그래도 고작 두루마리 아니었습니까.”

“고작 두루마리라니. 우리가 흔히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고. 하여간 우리 경호, 세상 경험이 너무 없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가 도련님보다는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게. 가끔 잊어 먹는단 말이야.”

“도련님이 너무 조숙하신 것뿐이니까요.”

“흐흐…… 어쨌든 그거나 읽어 봐.”

황준우의 음흉한 웃음에 어쩌다 보니 대화의 흐름이 넘어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경호였지만, 그조차도 두루마리 속의 내용을 읽기 시작한 이후에는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운 탓이었다.

“이건…….”

“제법 재밌지?”

“이게 재미있습니까?”

떨리는 손과 눈을 감추지 못한 경호가 황준우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도 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말했잖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너무 우직하다고. 겉면만 봐서는 결코 속을 알 수 없는 법이지. 어때? 억울하다고만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은?”

“유쾌하진 않습니다.”

“그거면 됐어. 일단은. 그렇게 배워 가는 거니까.”

피식 웃은 황준우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자, 그러면 이제 사태 파악이 끝났으니 가 볼까나.”

“어딜 말씀이십니까?”

피식 웃은 황준우가 경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긴, 집으로 가야지?”

“…….”

황준우가 망설임 없이 방문을 나선다.

잠시 그 뒷모습을 보며 망설이던 경호가 힘없이 그 뒤를 따랐다.

“가, 가시는 겁니까?”

망설임 없이 남경의 성문 입구를 향해 가는 두 사람을 향해, 절뚝거리는 걸음의 중년인이 다가와 묻는다. 그를 바라보는 경호의 안색이 단숨에 굳어졌다.

“여, 마철. 당연히 집에 가야지.”

피식,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중년인, 마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황한 마철이 제자리에서 쓰러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간절히 부탁했고 도와준다고까지 하였다. 한데 아무런 조치조차 없이 갑자기 또 떠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와준다고 했지. 네가 정녕 억울한 사람이라면 말이야.”

“억울합니다! 너무 억울하다는 말입니다!”

간절하게 소리치는 마철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분명 진실되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난다. 맞는 말이다. 그는 지금 진짜로 억울할 것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묻고 싶었다.

“어이, 마철. 억울할 자격이나 있고?”

“네 사정이고, 네 심정이니까 당연히 억울하겠지. 너무 분하고. 세상이 왜 이렇게 나에게 야박한가 싶겠지.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 보면 너 같은 놈은 그런 걸 억울하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받았다고 하는 거지.”

“그,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제야 본성이 조금 나오네.”

재미있다는 듯 마철을 바라본 황준우가 볼을 살짝 긁은 후 시원한 웃음을 보였다.

“생각해 봐. 너도 지금 억울하겠지만, 네가 억울하게 만든 사람의 숫자는 몇이나 되는 거지? 그때 당시 울며불며 소리치던 사람들을 넌 어떻게 대했나? 전 마철파 두목 마철?”

“그, 그건…….”

“삼창파. 왜 삼창파일까. 처음엔 별생각 없었지. 두목 이름이 삼창인가 싶기도 했고. 보통 흑도 조직 이름은 그렇게 짓잖아? 네 마철파처럼 말이야. 하하. 근데 이것 알고 보니 남경을 비롯한 인근에서 힘 좀 있다던 세 조직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삼창파. 네 마철파도 본래는 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했어야 하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

“…….”

답 없는 마철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건장한 체격의 힘 있는 청년이었고 주먹패를 이끄는 위엄 있는 흑도 조직의 두목이었다. 잘나갔을 때에는 작은 마을 정도가 아니라 남경의 바로 위, 강 건너에 위치한 강포현(江浦縣)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절도 있었다. 덕분에 남경을 장악하기 위한 삼창파의 세력 규합 때에도 초대 받을 수 있었고 제법 어깨를 펴고 나올 수 있었다. 그때가 마철 인생의 최고이자 정점이던 때였다. 그날 이후 마철은 급속도로 몰락했으니 말이다.

조직의 배신 혹은 다른 암계를 비롯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철이 너무 과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감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오만한 사내였고,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시장 상인들을 쥐어짜듯 괴롭히는 것은 우습지 않게 해냈으며, 돈을 빌려 주고 빚을 불려 사람을 사고팔기까지 했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쏟아 내며 살려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숫자는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어차피 남의 인생, 그가 신경 쓸 이유가 없던 탓이다. 그야말로 안하무인. 마철은 법을 잊은 듯 염전에까지 손을 대었다. 그 소식이 남경의 성주를 벗어나 영왕에게까지 닿았다. 마철의 불법 행위를 벗어나 흉악한 행동들에 분노를 느낀 영왕은 직접 무인들을 이끌고 마철파의 토벌에 나섰다.

따지자면 토벌이라 할 것도 없었다.

제법 잘나간다고 해 봤자 고작 삼류 왈패가 마음먹고 나선 관군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마철파는 단숨에 몰락했고, 두목이었던 마철은 수하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도중 산길을 잘못 타 한쪽 발목을 잃었다.

어찌어찌 목숨은 구제했지만 이후 그의 삶은 나락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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