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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61화 (61/373)

학사재생 61화

달리 똑똑하지도 않은 그가 흑도 무리들 사이에서 위엄을 갖출 수 있던 것은 단련된 몸과 악독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독심(毒心) 덕이었다.

그것이 마철이 가진 무기였다.

그 두 개의 무기 중 하나, 몸을 잃었다.

아주 뛰어나면서도 허허로운 정도 무림의 고수였다면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까짓 발목 하나가 뭐가 대수라고.

하지만 마철은 달랐다.

그는 주먹쯤 쓰는 평범한 흑도 왈패일 뿐이다.

발목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싸움은커녕 제멋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 의식은 남아 있었다.

위엄을 잃은 육신에 잔류한 지독한 오만함.

때문에 그는 방도를 만들어야만 했다.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돈, 혹은 권력을 쥐어야 한다.

흑도 왈패에 불과했던 마철이 권력과 가까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돈은 다르다. 불법적이지만 많은 돈을 모았고, 몰래 숨겨 둔 것도 적지 않았다.

어떻게 살까? 잃었지만 부끄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마철이니까. 한때 인근 흑도 왈패 두목 중 제일(第一)이라고 자신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원했다. 오만한 권위 욕심을 불리기 위해 도박판이라는 위험한 세계에 몸을 던졌다. 알고 있었다.

도박판이라는 건 잘 짜인 사기극이다.

속고 속이고 물리고 물린다.

그가 그렇게 속였으니까, 많은 사람을 나락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으니까 걱정하지 않았다.

너무 잘 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당했고, 모두 잃었으며, 빚까지 졌다.

나락 끝자락에나마 버티고 있던 그는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인과응보. 네가 했던 짓을 되돌려 받을 뿐이야.”

황준우는 코웃음 치며 마철을 밀쳤다.

멍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엎어진 그의 마음에 분노가 피어올랐다. 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래도! 그래도 회개하고 있소! 내가 잘못한 것도 알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 중이란 말입니다. 한데 어찌 협객이란 자가 힘없는 이를 버리고 간단 말입니까!”

그 외침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황준우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킨다.

“내가? 협객?”

“그, 그렇소. 대협아니시오! 대협!”

“푸하하!”

황준우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생을 비롯해 현생에 이르기까지 처음 듣는 말이다.

대협이라니.

“미안하지만 사람 잘못 봤어.”

황준우는 그런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소중히 하는 가치를 지키기도 바쁜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신(神)은 무슨.’

한때 무신이라 불렸던 시절을 떠올리며 코웃음 친 황준우가 앞서 걸어 나간다.

“가자, 경호.”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 뒤를 경호가 빠르게 쫓았다.

“나, 나는! 나는 죽는다 해도 노모는! 내 딸은! 이 파렴치한 놈아! 어찌 그들조차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이냐!”

마지막까지 너무나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그를 황준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하여 걸음을 멈춘 경호가 떨리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려 말한다.

“딸 같은 것 없지 않나? 아내라고 두었던 여인은 방치한 채 버려두었다가 병에 걸려 죽었고. 노모는…… 네가 이미 죽였잖아?”

“…….”

마철의 두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두 주먹을 쥔 경호의 눈에서는 뜨거운 불을 닮은 기운이 치솟는다.

“주,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 네 손으로 죽이지는 않았지. 내다 버렸을 뿐이니까.”

“그, 그야!”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여도, 잔소리가 심하다고 해도 낳아 주신 부모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을 산속에 내다 버린다고? 그 추운 밤에 어두운 산속에 혼자 웅크리고 있었을 노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 인과응보. 도련님의 말대로다. 너 같은 놈은 죽어도 싸.”

마지막 말을 차갑게 남긴 경호가 시선을 거둔 채 큰 걸음으로 나아간다.

주변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엿듣거나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가볍게 혀를 찼다.

관심이 없기에 몰랐지만, 듣고 보니 황준우나 경호의 말이 딱 옳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인과응보지.”

“쯧쯧, 어찌 제 부모를…….”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과 말들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경호와 황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철이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가락질을 한다.

“망할 새끼들! 이것저것 이유 붙여서 제 잘난 척이나 하는 네놈들과 내가 뭐가 다르단 말이냐!? 네놈들도 똑같다. 똑같이 약한 자를 외면하고, 짓밟고, 무시할 것이며 부모마저 버리겠지. 가식 떨지 마라. 이 빌어먹을 위선자들아!”

거친 목소리가 경호와 황준우의 등 뒤로 쏟아졌다.

“그냥 가자.”

마철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돌아서려던 경호의 발걸음이 멎었다.

정면만을 바라본 채 유유히 걸어 나가는 황준우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경호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말하는 것이 도를 넘었는데…….”

그런 경호를 곁눈질로 슥 바라본 황준우가 눈웃음을 그렸다.

“내가 아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똥 덩어리가 하는 말을 굳이 다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아?”

“하지만…….”

“그리고 되레 내가 묻고 싶은걸. 경호야말로 괜찮아?”

“저 말입니까?”

“많이 당황했잖아.”

“…….”

아닌 게 아니라, 황준우를 따라 객점을 벗어나던 순간부터 마철을 만난 순간까지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힘없고 나약하면서도 억울한 그의 모습에 협의를 보여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것이 정녕 옳은 길이라 믿었던 탓이다.

하지만 황준우가 보여 준 두루마리를 읽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짧게나마 황준우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혹시 도와주기 싫어 지어 낸 이야기는 아닐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기도 했다.

황준우가 굳이 타인의 인생을 억지로 지어내며 거짓을 만들 이유가 없다. 직접 마철을 만난 이후 나눈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머릿속도 복잡했다.

“정의(正義)의 기준이 뭘까?”

“경호 네가 마음이 불편하고 복잡한 이유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고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뜬금없는 황준우의 말에 잠시 고심에 빠진 표정을 지었던 경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맞는 것 같습니다. 장주님께서도 그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와 협, 도리를 지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니까요. 정의란 그런 것이라고 배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하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 경호는 화를 제대로 내는 법조차 모를 정도라서 고민이 많겠지만, 쉽게 생각하면 간단하다고. 깊고 넓게 보면 돼.”

“깊고 넓게 말씀이십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지 말란 거야. 세상에 흔히 알려진 이야기들 중 반 이상은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흔히들 음모란 것도 그렇게 꾸며지는 거고.”

“제 좋을 대로라……. 학문이 그런 것도 알려 줍니까?”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긴 하셨지만, 정말 가끔은 도를 넘습니다. 도련님이란 분은.”

“어, 아…….”

겪어 봐서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흘리는 황준우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 경호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아주 어쩌면, 칠야무신의 난도 소문과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또 한 번 당황하고 만다.

칠야무신의 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근대 무림 역사의 가장 큰 사건.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감히 그 이름을 꺼내기조차 꺼려한다.

한데 경호는 그 말을 어렵지 않게 꺼냈다. 심지어 본인 앞에서 말이다.

“역시 그건 아닐까요?”

“그, 글쎄다. 하하.”

“제 생각이 조금 과하긴 한 것 같군요. 단지 예전에 장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칠야무신이 소문과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아버지가?”

“예. 그래서 장주님은 당시 사건이 커지기 전에 세외로 나가셨었습니다. 괜한 불의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었지요.”

“정말 그랬단 말이야?”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때 당시 싸운 사람 중 하나가 황석후라면, 제 손으로 죽인 이들 중 만금장의 식구가 있었다고 한다면 견디지 못할 괴리감에 미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면했고, 모른 척했다.

그런 만큼 지금 경호에게 들은 이야기는 놀랍고도 충격적이었다.

“예. 대표두님을 비롯한 장내 정예 병력을 이끌고 세외 상행에 나서셨습니다. 돌아오셨을 때는 이미 칠야무신이 불성께 패한 이후였고…….”

“허…….”

짧은 한숨을 토해 내는 황준우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번졌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썩 나쁘지 않은 결과다. 여태껏 외면했던 사실 자체가 다 후회될 정도였다.

“아버지가 그랬다면…….”

“진짜로 그럴 수도 있다고. 칠야무신. 마냥 나쁜 놈만은 아닐 수도 있지.”

“도련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마냥 나쁜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아니라잖아.”

“더 의심됩니다그려.”

“나 못 믿는 거야?”

“믿습니다. 단지 가끔 얄미우실 뿐이죠.”

“와, 경호. 너 진짜. 그래도 호위무사인데 너무 심한 것 아니냐? 내가 이래봬도 도련님 아냐, 도련님.”

“도련님다운 품위를 지켜 주신다면 정말 충실히 믿고 따를 자신이 있습니다만.”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지.”

손을 휘휘 저은 황준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경호를 달래기 위해 시작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 사람이란 것이 그런 듯했다. 황준우는 한때 무신이라 불렸지만 결국 한 명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이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당시 제법 억울한 입장에 속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 행동 자체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살기 위해 죽였지만,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형제였다. 또한 모두가 악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원공 대사가 나서게 된 이유 역시 그런 탓 아니겠는가?

결국 당시 황준우 역시 오만했다는 말이 옳다.

조금이라도 귀를 열고, 목소리를 높였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

변명을 하자면 요령도 없던 탓이라 하겠지만,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를 잘 살아가자는 거지. 제 나름이라도 정의의 기준 하나쯤은 세운 채 말이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도 최대한 더 고민해 볼 거야. 기왕이면 없는 요령이라도 생기도록 말이지. 그러길 바라실 테니까. 그렇죠?”

“지금 누구한테……?”

허공을 향한 황준우의 질문에 경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생성된 뿌연 안개와 함께 긴 꽁지머리가 나풀거린다.

“후후, 훌륭하십니다. 합격. 완전히 합격입니다.”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놀란 경호의 물음에 황준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제법 멀리서 지켜봤는데, 눈치채고 계셨던 겁니까?”

“운이 좋았지요, 뭐.”

말은 그리했지만, 갑작스럽게 백교가 돌아온 직후 곧장 눈치를 챘다. 아무리 은신을 잘했다고 하여도 완전히 뒤바뀐 기의 흐름마저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가볍게 대답한 것은 스승을 향한 나름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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