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2화
“후후, 과연. 무공은 제가 가르친 것이 하나도 없거늘 이미 청출어람. 학문 실력은 아직 부족한 편이며, 제자들 사이에서도 수위(秀偉)라고 할 수준도 아닙니다만…… 그래도 가히 제일이라 칭해 주고 싶군요.”
“다행히 칭찬이었네요.”
“그러니까 조금 아쉬운 마음에, 멀리서나마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돌아왔었지요. 후후.”
“……거참, 부끄럽네요.”
얼굴을 붉힌 황준우가 볼을 긁적이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는 듯,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백교가 말을 한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사실 학문이란 것이 지금에 와서야 과거의 합격을 위해 배운다고 하지만 실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공자께서도 그렇고 제자 분들께서도 마찬가지셨겠지만 그분들 모두 자신들의 뜻을 이해하고 쓰이기를 바라신 것뿐입니다. 결국 학문의 근본이란 천하에 윤리와 도리, 협이 올바로 세워지는 것.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현들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학사(學士). 그런 의미에 있어, 거듭 말해 제자들 중 공자가 제일입니다.”
“앞으로도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은 못 해요.”
“누구나 그렇지요. 저라고 해서 모두 가능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후후. 단지 노력이라도 해 보십시오.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걸로 마지막 수업도 끝.”
부채를 펼쳐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린 백교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가장 오래 가르쳤고, 가장 많은 것을 일러 드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네요.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 주셔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도 본인이 결정한 길을 막힘없이 나아가길 바랍니다.”
“스승님도요. 어디 계시든 건강하셔야 하고요.”
“후후, 제가 이래봬도 몸 하나는 제법 튼튼합니다.”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저 역시 너무나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진다.
백교의 눈웃음도 멀어진다.
진짜 이별이다.
새삼스레 다가오는 현실적인 감각에 저도 모르게 내뻗은 손에 백교의 주먹이 닿는다.
그 기분 좋은 감각을 따라 웃음 지으며 마주 주먹을 맞댄 두 사제(師弟)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건승(健勝)을 기원합니다.”
“저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백교가 크게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백교가 떠났다.
“정말…… 언제나 뜬금없으신 분이시군요.”
“그게 나름 매력이시잖아?”
“때로는 너무 놀라 심장이 덜컹합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음흉하게 웃기는. 경호답지 않아.”
“제가 음흉하게 웃었습니까?”
“방금 ‘흐흐.’ 하고 웃었잖아.”
“제가 언제 그렇게 웃었습니까? 사람 순식간에 바보 만들려 그러시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음흉경호.”
“……말을 안 할 겁니다.”
“진짜로?”
“대답했는데?”
경호의 양미간이 깊게 패였다.
늘 생각하지만 말을 오래 섞으면 말린다.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화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입을 꼭 다문다.
“큭큭. 역시 경호는 재미있다니까.”
“…….”
“가자, 경호.”
“푸후후.”
“…….”
불과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깨질 다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남경을 벗어난 두 사람은 따로 말을 구하지 않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두 발로 걸어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급하게 경신술을 펼친 것 또한 아니었다. 어차피 시험도 끝났고, 당장 해야 할 일도 없다.
황준우와 경호는 느긋하게 유람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인근에 마을이 보이면 들어가 음식을 먹고 잠을 청하고는 했다.
“이렇게 움직여도 한 달 내에는 집에 도착하겠네.”
길을 걷던 도중 보인 작은 마을에 들러, 양해를 구하고 얻은 판잣집에 몸을 누인 황준우가 말했다.
“아쉬우십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참 가깝구나 싶어서. 갈 때는 몰랐는데 말이지.”
“보통 그런 걸 아쉽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피식하는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곧 눈을 감는다.
불편한 나무 바닥에 거친 모포를 덮고 있음에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모습이다.
‘도련님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고아였던 경호는 만금장에 들어오기 전까지 거지 생활을 했다. 때문에 이런 판잣집 생활에도 익숙하고, 거칠게나마 덮을 수 있는 모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황준우는 다르다. 태생 자체가 귀한 편이라 할 수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물투성이인 거지 소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고 노숙도 어렵지 않게 해 내며 판잣집의 불편함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몇 번이고 놀라게 되는 부분이었다.
드르렁-!
“벌써 잠드신 겁니까?”
심지어 일찍도 잠든다.
황준우의 코고는 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경호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황준우의 호위무사라서 좋다. 그 사실만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다.
“좋은 꿈꾸십시오.”
작은 말을 남기고 경호 역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하던 차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채채챙-!
하지만 이어지는 소리는 분명했다.
‘싸움이다.’
심지어 근방이다.
이곳이 객점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쉽게 볼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누구지?’
평소였으면 눈을 떠서 누구보다 먼저 반응했을 황준우는 여전히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든 채였다.
본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 탓이 클 터였다. 어쩌면 밤이라서 생각보다 소리가 멀리 퍼졌을 뿐, 거리가 제법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한담?’
고민하던 경호는 결국 제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의 임무는 황준우의 호위다.
바깥 상황이 그리 다급할 정도가 아니라면 이 상태로 있는 것이 옳았다.
채채채챙-!
싸움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연속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어느 한쪽도 밀리는 기색이 없다.
‘아무래도 혼자서 여럿과 싸우는 것 같은데.’
이쯤 되니 혼자가 누군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채채챙-!
또 한 번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갑작스럽게 골던 코를 멈춘 황준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더럽게 시끄럽네. 경호, 가서 조용히 시켜 봐.”
“저 혼자 갑니까?”
“굳이 같이 갈 필요 있나?”
“너무하십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충권(蟲拳)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지는 사람이 나가서 말리는 걸로.”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멋있다, 경호.”
나름대로 제안을 하고, 경호가 거절하자마자 곧장 받아들인 황준우가 다시금 제자리에 드러눕는다.
잠시 동안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호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소리가 멈췄네?’
끈임 없이 이어지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멈추며 주변에 적막이 가득했다.
‘누가 당했나?’
어느 한쪽이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고 하여도 싸움이란 것은 본래 부지불식간에 끝맺음되기도 하는 법이다.
누군가가 당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혼자인 쪽?’
의문을 가진 경호가 호기심에 살짝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타다닷-!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검은 신형 하나가 판잣집의 지붕을 넘어선다.
“결국 도망가는 게냐!”
“놓치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르며 그 뒤를 바싹 쫓는 것은 다섯 명이다. 그들이 아무 탈 없이, 이전 신형과 마찬가지로 판잣집을 뛰어넘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터였다.
문제는 그들이 경호를 인식했고, 갑작스럽게 검을 휘둘러 왔다는 부분이었다.
“동료냐!”
“건방진 놈들!”
얼떨결이었지만 날아오는 검을 막으며 뒤로 한 바퀴 구른 경호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잘 자는 듯 코를 골던 황준우가 또 한 번 몸을 일으킨 것도 동시였다.
“빌어먹을 남궁 놈들!”
“남궁세가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먼저 앞서 나간 신형을 쫓던 이들 모두가 동시에 황준우를 돌아보았다.
“감히 건방지게 대 남궁세가를 능욕하다니!”
“네놈들 모두가 동료인 게 분명하렸다! 이 악적 놈들!”
경호는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쫓기던 자가 정확히 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쫓던 이들은 남궁세가다.
그리고 그들 바로 앞에서 황준우가 당당히 남궁세가를 향해 욕을 내뱉었다.
“…….”
저도 모르게 지끈해지는 머리를 부여잡은 경호가 몸을 일으켰다.
대화가 곧장 통한다면 좋겠지만 이미 흥분한 남궁세가 무인들의 눈을 보니 쉽게 먹힐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봐야지.’
만금장의 입장을 생각하자면 마냥 남궁세가와 싸워서 좋을 것도 없으니 말이다.
“잠시, 우리는 만금…….”
“죽어라, 악적 놈!”
채채챙-!
순식간에 날아온 세 자루의 검에 말을 끝맺지 못한 경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들어 먹으려고조차 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다.
일단 제압하고 나서 이야기한다.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황준우는 딱히 나설 생각도 없어 보였다. 더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자신들을 욕한 황준우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남궁세가 무인들이겠지만 말이다. 하나 생각해 보면 또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도련님이 무슨 수를 쓰신 거겠지.’
나이에 비해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젊은 남궁세가 무인만 다섯. 경험도 부족하고 가진 바 무공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는 편이다.
그런 무인들이 마음먹고 기척을 지운 황준우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만 억울한 게 있다면 단 하나였다.
“기왕이면 저도 같이 숨겨 주시지!”
그 말과 함께 날아오는 검 하나를 쳐낸 경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는 다섯.
순수하게 내력만 치자면 하나, 하나가 경호 본인과 비슷한 수준이다.
“간악한 악적 놈들. 결국 동료를 버리고 제 몸만 빼내는구나.”
“대 남궁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했으니 죽음을 각오한 것이렷다?”
“아니, 그러니까 대화할 생각은 없…….”
채채챙-!
또 한 번 검이 날아들었고 경호는 다급히 방어해 낸다.
아슬아슬하게 모든 검을 쳐낸 경호의 이마로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딱히 합격진 같은 건 아닌가?’
남궁세가 역시 하나의 집단인 만큼 여럿이서 모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검진(劍陣)을 몇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 눈앞의 다섯 무인 모두 그러한 검진을 익히지 않은 건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각각이 제 검술을 펼치기에 바쁘다.
기본적으로 남궁세가의 검법인 만큼 훌륭하다 칭할 수 있을 정도지만…….
‘내가 앞선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날아오는 검 하나, 하나를 쳐내는 경호의 두 눈가에 옅은 희열이 떠올랐다.
황준우가 건네준 무공을 수련하고 익힌 효과가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느낀 탓이다.
만금장에 든 이후로 제법 열심히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일류 수준. 그리고 드디어 얼마 전 절정의 벽을 넘었다.
분명히 강해졌다는 사실을 느꼈지만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는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황준우와의 실력 탓일 터였다.
한데 남궁세가의 젊은 무인 다섯과 검을 맞대고 있으니 확연히 느껴졌다.
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하나도 버거웠을 남궁세가의 무인 다섯의 합공을 어렵지 않게 맞받아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여유가 생기며 반격까지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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