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4화
“…….”
“뭐,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이건 넘어가고. 하나만 묻자고. 죽더라도 돈을 지키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
“이건 좀 대답해 주지.”
황준우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홍산이 딱딱한 목소리를 흘렸다.
“불의에 응하기 싫었을 뿐이다.”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을 흘린다.
“불의에 응하기 싫었다?”
“남기 내에서는 남궁세가에게 세금을 상납하듯 돈을 내는 것이 관례일지도 모르지. 하나 그는 국법도 아니고 꼭 지켜야 할 의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내야 하는 돈이라면, 자선(慈善)의 의미가 깊어야지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 역시 할 말은 하는 편이구먼. 그리고 제법 정의도 잘 살아 있고.”
황준우의 눈가로 만족의 감정이 떠올랐다.
고집 있고 뚝심 있다.
그리고 말을 무겁게 여길 줄도 알면서도 정의관은 확고하다.
‘탐나는데?’
지속적으로 생각해 왔던 일이다.
당장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완벽한 목표가 있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집안을 지키고 더 많은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 개인의 무력이 고금을 논할 정도로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손과 발은 두 개뿐. 더 늘릴 필요가 있다.
‘백흑쌍노에 서왕. 그리고 홍산…….’
거기에 경호까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림의 형태가 그려지는 느낌이다.
“낭인이라고 했나?”
“딱히 의탁할 곳이 없어 천하를 주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낭인이 된 지는 얼마 안 되었고?”
“…….”
홍산이 입을 닫았다.
짧은 시간 그런 홍산의 얼굴을 지긋이 보던 황준우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됐구나?”
“…….”
“천하를 주유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경험이 별로 없어. 그래서 겁 없이 남궁세가와 싸울 수도 있던 거지.”
“네 말이 옳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웠다 한들 불의를 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것 같아.”
눈웃음을 그리며 홍산의 바로 앞으로 훅 다가간 황준우가 손을 내민다.
“딱히 의탁할 곳이 없다고 했으니 마침 좋은 기회네. 내가 널 고용할게. 어때?”
“낭인으로서 말인가?”
“더 깊은 관계가 되면 좋고.”
홍산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황준우가 그를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탐나는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본래 나는 소주대인을 모시러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를?”
“강남으로 그보다 더 큰 그릇이 없다고 들었다. 네 말대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나름의 대의(大意)는 있다. 그 첫 번째가 모실 만한 주인을 찾는 것이지.”
“아하,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결심한 거였다?”
“결심한 것까지는 아니다. 소문만 믿고 평생을 따를 주인을 정할 수는 없는 법.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생각은 있었단 것 아니야. 그런데 어쩌나. 난 네가 아버지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데?”
“소주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나?”
날카로운 눈빛을 한 홍산의 질문에 황준우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나랑 아버지가? 그럴 리가. 난 아버지를 존경하고 공경해. 또 굉장히 좋아하지. 아마 아버지도 다르지는 않을걸? 거참, 이런 건 언제 말해도 부끄럽네.”
“한데 왜 굳이 아버지와 네 사람을 가리는 것이지? 만금장의 소장주라고 하지 않았나?”
홍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이야 황석후가 건재하다지만 그 역시 언제까지고 세월 앞에 장사일 리는 없었다.
시기가 흐르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금장 전체가 황준우의 것이 된다. 굳이 먼저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내 사람, 네 사람을 나누는 것이 가장 이해가 안 되었다.
“물론 네가 생각하는 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두 내 것이 될 수도 있지. 반대로 말하자면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딸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다. 설마…….”
“아아, 젠장. 왜 이렇게 이상하게만 생각하는 거야. 미리 말하지만 난 우리 연이 무지 아끼고 사랑하거든? 내 동생이 천하제일 여동생이라는 걸 일말의 고민 없이 말할 수 있단 말이다. 그냥 난 명확히 해야 한다는 걸 알 뿐이야. 네 눈엔 내가 언젠가 아버지 것을 물려받아 호의호식할 생각만 가득한 멍청이로 보이는 거야?”
“크게 다르진 않다.”
홍산의 담담한 인정에 황준우의 넋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내가 그렇게 보인다고?”
“새하얀 피부에, 굳은살 하나 없는 손. 궂은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겠지. 매일 뒤에서 앉아 누군가가 차려 주는 밥상만을 받아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네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겠지.”
“와, 이거 고집 있다는 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하네.”
피식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다 보니 간단한 해답이 떠오른 탓이었다.
“결국 지금 네가 나를 보는 못마땅한 시선의 근원이 딱 그 이유였다 이거지?”
“부정은 못 하겠군.”
“간단하구먼. 내가 네 생각과 다른 사람이란 걸 알려 주면 되는 일 아니야?”
“무공 실력을 자랑할 생각인가? 헛된 생각 마라. 네 호위무사가 나서기도 전에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읍!”
조소를 보이며 황준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던 홍산의 안색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척 보아도 고생 하나도 안 한 귀공자라고만 생각했던 황준우에게서부터 뻗어 나온 날카로운 기세가 그의 몸을 찢어발길 듯 가까이 다가온 탓이었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겉으로 들리는 소문만으로는 모든 걸 판단할 수 없다고. 보이는 대로만 믿고, 그대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리고, 나도 무인이고 사내인데 자존심이란 게 있어서 말이지?”
온몸의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홍산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실상 당장 의식을 잡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난폭한 기세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마모되어 가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죽지 않는다.
놀랐으나, 어떻게든 이겨 내기 위해 의지를 불태운다.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황준우를 향해 웃음을 보인 홍산의 새하얗게 변한 입술이 달싹였다.
“생각……보다…… 제법…….”
“어이구?”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쓰러지는 홍산을 재빨리 받아 든 황준우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 반항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드네. 어떻게든 데리고 다녀야겠다.”
생각조차 못 할 상황임에도 눈빛이 죽지 않았고, 마지막 자존심으로 말 한마디까지 내뱉으려 했다. 무인이고 사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서 나쁠 것 없다. 오히려 그 기개를 납득시켜 준다면 평생 등을 맡겨도 될 정도로 든든한 신뢰가 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홍산, 넌 내 거야. 흐흐.”
황준우가 음흉하게 웃는 사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경호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도련님?”
“……참고로 그런 의미 아니야.”
“오늘 밤 따로 자겠습니다.”
“경호!”
황준우의 목소리가 보름달이 뜬 밤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참새 우는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유난히 눈이 부시다고 느껴지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린 홍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황준우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발현된 방어 본능이다.
“…….”
겁을 먹었다.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홍산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대체 정체가 뭐냐.”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만금장 소장주.”
한데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 눈을 떴는지, 큰 눈을 두어 번 껌뻑거린 황준우가 헤픈 웃음을 흘리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잘 잤어?”
“…….”
그걸 잤다고 표현해야 할까?
“덕분에 제대로 의식을 잃었지.”
“하하, 말했잖아. 나도 사내인데. 자존심도 있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무시하면 마냥 참을 수도 없다고.”
“…….”
“어때, 이제 그렇게 우습게 보이지만은 않나?”
내심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 기에 억눌려서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말문을 열었던 홍산의 자존심이 그렇게 떠밀었으니 말이다.
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따지자면 고작 기세조차 감당하지 못한 신세인 것이다.
“무공은 제법인가 보군.”
“생각보다 인정이 빠르네.”
“…….”
대답 대신, 살짝 얼굴을 붉힌 홍산이 시선을 피한다.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걸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인복(人福)인가!”
“도련님께서 솔직하지 못하신 편이니까요. 유유상종(類類相從). 닮은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는 법이지요.”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에 힘겹게 무거운 눈을 뜬 경호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내가 솔직하지 못하다고? 무슨 헛소리야?”
“뭐 굳이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안주인님은 꽤나 감정에 솔직하신 편이지요.”
“그건 어머니가 특이한 거라고. 그나저나, 유유상종이라면 경호 역시 다를 것 없다는 거잖아?”
“적어도 도련님보다는…….”
“그거 은근히 열 받는 말인데.”
“수련하러 가겠습니다.”
황준우의 웃음에서 은근한 살기를 느낀 경호가 재빨리 검을 챙긴 후 몸을 일으켜 바깥을 향한다. 나가기 전, 우연히 홍산과 시선을 마주친 경호의 두 눈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반쯤은 넘어왔네.’
예측할 수 없지만 함께 있으면 제법 즐겁다.
또 본인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황준우는 부잣집의 도련님답지 않게 아니, 굳이 천하의 누구랑 비교할 바도 없이 사람 냄새가 그윽하다.
따르고 모실 사람을 찾고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뭐, 나머지 반은 또 모르는 일이지만.’
어깨를 으쓱한 경호는 재빨리 방 바깥을 빠져나갔다.
어제의 자극도 있고, 이럴 때는 눈치로라도 빨리 빠져 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탓이다.
“흐흐…….”
“…….”
그렇게 경호가 떠난 이후, 자리에 앉아 웃고만 있는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동자만을 굴리던 홍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위무사와 사이가 좋은가 보군.”
“경호는 내 호위무사이면서 친구이기도 하니까.”
“…….”
“나도 잘 몰랐는데, 그냥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신분이나 나이의 벽 같은 건 문제가 안 되는 그런 관계 있잖아? 무엇보다 뭐, 난 그냥 경호가 좋아.”
“솔직한 편이군.”
“그렇다니까. 경호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쯧쯧.”
혀를 차는 황준우를 보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린 홍산이 재빨리 표정을 지웠다.
“방금 웃었지? 그러니까 조금 더 보기 좋네.”
“잘못 본 거다.”
“큭큭,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아마 내 사람 중에 가장 솔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 같아, 홍산은.”
“아직 너를 따르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보낸 홍산의 두 눈에 경계심이 피어오른다. 그를 잠시 아쉽다는 듯 바라보던 황준우가 되물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을까? 하룻밤으로는 부족한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너나 경호나 어째서 그런 쪽 상상부터 하는 건데?”
“네 표정이…….”
반쯤은 음흉하게, 또 반은 헤프게 웃고 있는 황준우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쉰 홍산이 고개를 내저은 후 입을 다문다.
“내 표정이 어때서? 나름 진지한데. 어쨌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홍산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말 자체가 오해를 부른단 말이다.”
“말했잖아. 진지해서 그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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