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5화
제법 굳어진 황준우의 표정에 할 말을 잃은 홍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크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아직 사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름지기 사내라며 필요할 때 술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네가 해낼 수 있을까?”
“배웠다? 스승님이 계신가 보네?”
“…….”
홍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괜히 캐물을 것도 없다 생각한 황준우는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술, 까짓 거 마시지 뭐.”
현생에서는 아직 마셔 본 적 없지만, 전생에는 제법 말술을 자랑하던 그였다.
‘이걸로 낙승인가.’
자연스레 입가로는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6. 남궁흑수(南宮黑手)
“끄응…….”
“대형!”
“일어나셨습니까!?”
남궁진위가 눈을 뜰 때까지 좁은 객점 방 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남궁사래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만, 머리가 울린다.”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말린 남궁진위의 미간이 쉽사리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련하게나마 계속해서 이어지는 두통이 그를 괴롭힌 탓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그 겁 없는 낭인 놈하고, 만금장…… 소장주. 내가 그에게 당했군.”
뒤늦게 상황을 정리한 남궁진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슴 한편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놈은? 놈은 아직도 그곳에 있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대형을 지키기 위해…….”
“멍청한 놈들!”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같은 화를 토한 남궁진위의 눈이 서로 시선을 미루는 나머지 남궁사래를 직시한다.
‘이런 놈들과 하나로 묶여서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다니.’
남궁오래.
남궁세가의 미래라고 불리는 그들은 모두 현재 남궁세가의 중임을 맡고 있는 거물들의 친족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려서부터 많은 지원과 예쁨을 받고 자랐고, 어느 순간이 되니 자연스레 남궁세가의 다음 세대를 책임질 미래의 인재로 내정되었다.
남궁세가에 속한 모두가 그렇게 불러 주니 본인들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 남궁진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떠받드는 이들의 시선 뒤에 감춰진 비웃음과 조롱, 그리고 걱정들. 아직 어린 탓이라고들 외면하지만 남궁오래는 많은 면에서 부족하다.
감정 조절도 서투르며 제대로 혼자서 처리해 낸 일이 하나도 없다. 남궁세가의 어른들은 그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저 감싸고 돌 뿐이었다.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대다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그들이 운영할 다음 세대에 대해 큰 걱정을 안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싫었다.
하나 그런 시선을 가진 이들에게 몰매를 하고 고역을 준다 한들 시선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악독하게 굴고 지독하게 괴롭힐수록 시선 뒤에 숨은 조롱은 더욱 커져만 갈 뿐.
결국 남궁진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를 억압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여 남궁세가의 중심에 서야 한다.
바로 지금의 남궁전혁처럼 말이다.
벌써 삼 대째 이어져 온 남궁세가주의 직계 혈족이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내가 그 뒤를 잇는 거다. 작은아버지께서 가주의 직위에 오른 이후에는 그 자리에 바로 내가…….’
때문에 가문을 박차고 나와 외부의 일에 직접 손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고, 건재하며, 지모 역시 부족함이 없음을 알리려 했다. 위엄을 갖추고자 했다.
어른들이 너희는 하나라며 붙여 준 나머지 남궁사래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크게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커다란 목표와 꿈을 이룰 웅심을 품은 채로 말이다.
하나 세상이 언제고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간 적이 있던가? 남궁오래는 남궁세가의 외당(外黨) 무인들 중 가장 하급의 무인들이 한다는 수금(收金) 업무를 부여 받았다. 가장 밑바닥부터 세상을 겪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지시라지만, 마음에 들 리는 없었다.
남궁진위가 하고자 했던 일은 천하에 널린 마두(魔頭)를 처치하고 자신의 협행과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나 어쩌겠는가?
시키면 해야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대다수 쉽게 진행되었고, 작은 난항을 겪어도 어려서부터 남궁세가의 직계무공을 익히고 영약을 먹으며 자란 그들에게 큰 문제는 없었다.
홍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낭인 주제에 감히 대 남궁세가에게 반항할 뿐 아니라, 세금 납부마저 거부한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한 남궁오래는 홍산을 마졸(魔卒)로 지칭하며 쫓았다.
당황스러웠던 점은 홍산이 고수였다는 사실이고, 우연치 않게 마주한 일행이라 착각했던 이들이 만금장의 인물들이란 부분이었다.
“내가 쓰러졌어도 끝까지 싸웠어야지. 하다못해 감시라도 붙였어야지! 네놈들은 이런 작은 업무조차 제대로 해 내지 못하면서 남궁오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게냐!?”
남궁세가 외당에서도 가장 하급의 무인들이 행하는 일.
그조차도 해내지 못한 남궁오래.
남궁진위.
그 소식이 퍼지고,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를 떠올리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때가 되면 무인들이 아니라 고작 시종, 시녀들마저 그를 비웃을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상대는 만금장이고…….”
“가문에서도 이해해 줄 것입니다, 대형.”
다른 남궁사래의 말에 남궁진위의 콧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멍청한 놈들. 만금장이니까 더 실패하면 안 되는 것이다. 만금장한테만은 지면 안 되는 게야. 우리가 남궁세가고, 남궁이 곧 남기제일일진대 어째서 고작 만금장 따위의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이냐?”
이를 간 남궁진위의 손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뭘 하고 있는 게냐! 어서 놈들을 찾아내라.”
“하, 하지만 어찌…… 아직까지 그곳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하오문이 있지 않느냐! 네놈들 주머니를 써서라도 찾아내!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냐?”
“아, 알겠습니다, 대형. 빠른 속도로 찾아내겠습니다.”
“모두 썩 나가!”
커다란 외침에 꼬리를 말 듯 후다닥 달아나는 나머지 남궁사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진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노 탓인지, 아니면 맞은 충격 탓인지 아직까지도 머리가 아른거리지만 이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만금장…… 황준우…… 홍산.”
어느 하나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어떻게든 이 치욕을 돌려주어야 한다. 위기는 곧 기회. 해내기만 한다면…….”
남궁세가의 미래라 불리는 남궁진위가, 만금장의 미래인 소장주 황준우를 누르고 남궁의 이름을 드높인다.
가장 기본적인 수금 업무도 못 하는 남궁오래하고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가문의 식솔들이 그를 바라볼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로는 은근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야. 하지만 저런 얼간이 넷만으로 놈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 리는 없지.’
분노와 흥분.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도 나름대로 이성을 찾았다고 자신한 남궁진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이라면 나를 도와줄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제 나름대로 말이다.
남궁진위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허우적댈 무렵, 홍산을 비롯한 황준우 일행은 머물렀던 곳을 떠나 단양(丹陽)현의 중심에 도착했다.
어느 쪽과도 극히 가깝지는 않지만 회하(淮河)와 태호(太湖) 사이에 위치한 단양현 역시 작은 편은 아니었다. 나름 도시의 규모를 이루고 있고 상인들도 많이 오가는 탓에 객점을 비롯해 홍루까지 즐비한 편이다.
“딱히 멋진 풍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처럼 붉은 빛깔 집이 가득하니 또 구경하는 재미는 있네. 여기서 괜찮지?”
“…….”
황준우의 물음에 답 대신 고개를 짧게 끄덕인 홍산의 시선이 정면의 객점을 향했다.
두 눈에는 승부욕이 불타오르고 있는 채였다.
“힘 한 번 제대로 들어갔네. 그나저나 단양현이라고 하더니, 그래도 역시 지붕을 빨갛게 칠한 곳은 없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만약 그랬다가는 집이 무너져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황준우의 대책 없는 말에 경악한 표정의 경호가 몸을 떨었다.
천하에 있어 붉은빛 지붕을 쓸 수 있는 장소는 황궁 단 한 곳뿐이다. 하니 어찌 황준우의 말이 두렵지 않겠는가?
“농담이지. 경호는 왜 이런 말을 못 받아 줄까. 딱딱해서 그런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시끌벅적 떠들며 객점으로 향하던 황준우의 시선에 문득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뛰어가는 청색무복의 무인들이 보였다.
“어, 저 녀석들?”
“남궁오래 아닙니까?”
황준우를 따라 시선을 돌리고 그들을 발견한 경호가 물었다. 객점을 향해(?)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홍산의 귀에는 그조차 들리지 않은 듯했지만 말이다.
“어딜 저렇게 바쁘게 뛰어가는지, 이쪽은 보지도 못한 것 같구먼.”
“많이 급한가 봅니다.”
“그때 얻어맞은 놈은 아직 못 일어났나 보네. 넷이 다니는 걸 보니.”
“도련님 주먹이 워낙 맵지 않습니까?”
“그래도 슬 일어날 때가 됐는데. 녀석, 보기보다 약골인가 보네.”
웅얼거린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객점으로 들어섰다.
사실상 보이지 않는 남궁진위가 의식을 차렸든, 말았든 그의 알 바가 아니라 생각한 탓이었다.
“대낮부터 사람 많구먼.”
객점 내 풍경은 황준우 말마따나, 만원(滿員)이었다.
상인들이 많이 오가는 도시라 그런지 이른 오전부터 손님들이 가득하다.
물론 모든 객점이 그렇지는 않을 터다. 그만큼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들어온 객점의 수준이 괜찮다는 뜻이다.
“어서 오십시오! 마침 창가 자리가 비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치우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을 향해 다급히 달려온 점소이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어쩐지 운이 좋은걸? 그냥 막 골라 들어온 객점이 제법 괜찮은 곳인 것 같고, 마침 창가 자리가 딱 생기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전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은 조금 겁도 나는데요.”
“겁낼 게 뭐가 있어.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일을 마냥 즐기다 보면 위기가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고요.”
“간만에 아저씨 같은 잔소리 나왔네. 홍산, 어서 가자.”
마침 자리를 다 치우고 다가오는 점소이를 발견한 황준우가 첫걸음을 떼고, 입을 다문 채 지켜보고 있던 홍산이 그 뒤를 따른다.
경호는 그 둘의 뒷모습을 조금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필 이렇게 운수 좋은 날, 두 분이 술내기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휴.”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날인 것이다.
객점 창가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분위기는 완연히 상반되었다.
홍산은 정말로 생사대적(生死大敵)이라도 만난 듯 전의(戰意)를 크게 불태우고 있었으며, 황준우는 웃는 표정으로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제법 거한 술상이 차려질 때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
“진짜 하실 겁니까?”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그 사이에 놓인 술 병 다섯을 바라본 경호가 긴장한 눈빛으로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농담이라 할 리는 없잖아?”
“술…… 처음 드시지 않습니까?”
“말도 처음 탔을 때부터 잘 탔잖아. 무공도 그랬고.”
“…….”
“난 원래 처음 하는 것들도 다 잘해. 그리고 예상하건대, 홍산도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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