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6화
“…….”
홍산은 대답 대신 술병을 들어 올려 입에 꽂아 넣고는 단숨에 한 병을 모두 비워 버렸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황준우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로는 조소가 어렸다.
“어때?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나를 뭘로 보고.”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은 황준우 역시 곧장 한 병을 통째로 비웠다.
그 막힘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경호가 손을 들며 말한다.
“저, 조금은 절제하심이…….”
“술내기에 절제는 무슨 모순(矛盾)이야. 경호는 잘 두고 보기나 해. 나중에 딴소리 안 나오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내 두 사람이 두 병째 술을 집어 들고는 다시 입 안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목울대가 몇 번 출렁이고 또 한 병을 모두 비운 홍산이 자신의 머리 위에 술병을 털었다. 방울 하나조차 맺히지 않는 완벽한 음주였다.
황준우 역시 같은 행동으로 복수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그 술병에서는 몇 방울의 술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큭큭.”
“우연이야.”
“뭐, 한 번쯤은 봐주도록 하지. 힘들만도 하니까.”
“우연이라니까. 그나저나 벌써 술이 모자라네, 경호.”
“예, 예. 여기 방금 전하고 같은 술로 다섯 병 가져다주십시오.”
경호의 말에 주변을 거닐던 점소이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 후 주방으로 뛰어갔다.
아마 방금 전 황준우와 홍산이 비운 술이 이런 객점에서 팔기에는 제법 비싼 금홍주(金紅酒)인 탓일 터였다. 경호는 나름대로 두 사람의 숙취를 생각해 제법 주머니를 털더라도 비싼 술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다섯 병 더 나왔습니다.”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음에도 한 젓가락도 대지 않은 음식을 곁눈질로 바라본 점소이가, 붉은 얼굴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는 질린 표정을 비추다 재빨리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의 입가로는 닮은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그럼 세 병째.”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린 홍산과 황준우가 함께 술병을 들어 올리고 입가에 가져간다.
‘이래서야 얼마 못 가겠군.’
경호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빈속에, 내공조차 쓰지 않은 채 술만 들이붓고 있다.
당장에라도 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판국이었다.
“푸엑-!”
아닌 게 아니라, 목울대를 힘차게 움직이던 홍산이 헛기침과 함께 머금고 있던 술을 뱉어 냈다.
꿀꺽, 꿀꺽.
힘겹게, 세 병째까지 마신 황준우의 입가로는 승자의 미소가 번졌다.
“고작 이 정도야? 흐흐.”
“우연……일 뿐이다.”
“그래, 그래. 한 번쯤은 봐주지.”
“이걸로 동점(同點)일 뿐.”
“알았다니까.”
황준우의 말에 남은 세 병째 술을 모두 비운 홍산이 네 번째 술병을 들고서는 곧장 속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오오, 나도 질 수 없지.”
황준우 역시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네 병째 술을 들어 속에 들이붓는다.
꿀꺽, 꿀꺽, 꿀꺽.
경호의 얼굴에 어린 걱정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진짜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몰라.’
이러다가 두 사람 중 하나가 쓰러지는 게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아도 세 사람 중 어른의 입장에 속한 경호가 지금이라도 강제로 나서야 할 때였다.
‘그래, 말리자. 지금이라면 도련님이라고 해도 몰래 수혈(睡穴) 정도는 짚을 수 있겠지.’
황준우의 고집에 밀려 어쩔 수 없지 지켜보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흐흐흐…….”
“끄흐흐…….”
어느덧 식탁에 기대어 술병을 잡고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경호가 손을 내뻗으려 할 때였다.
“제길…… 아직 어려서 그런가. 예전하고 다르…….”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황준우의 두 눈이 무겁게 떨어졌다.
“으흐흐흐. 내가…… 이겼다.”
음흉하게 웃는 홍산의 시선이 경호를 향한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라는 듯 말이다.
“……기억하겠습니다.”
경호의 읊조림에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지은 홍산 역시 곧장 의식을 잃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레 두 사람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본 후, 일단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호의 입에서 큰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시고는,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지 않습니까.”
“원래……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야…….”
순간 황준우가 깬 줄 알고 놀란 표정을 짓던 경호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잠꼬대이신 겁니까.”
정말 말릴 수가 없다.
이마를 잡고는 고개를 내저은 경호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방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일단은 객점 식탁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놈들이 이곳에 있다고?”
“예, 확실합니다. 대낮부터 단화객점에 들어서 술을 잔뜩 마시고는 뻗어 버렸다더군요.”
허겁지겁 달려온 남궁사래의 보고에 남궁진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크하하하! 이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어디로 사라졌을지 모를 놈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모자라, 겁도 없이 술을 잔뜩 마시고 기절했단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 운명의 때가 아닌가? 명예를 회복하다 못해 제대로 일으키고 남궁진위의 이름에 위엄을 세울 때가 다가온 것이다.
“이참에 놈을 죽여도 되겠구나.”
기대에 찬 생각으로 가득한 남궁진위의 옆에 앉아 있던 죽립인이 스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떤 남궁진위의 시선이 곧장 죽립인을 향했다.
“하지만 숙부님. 놈은 만금장의 소장주입니다. 조금 골탕 먹이는 것이야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죽인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남궁진위에게 숙부라 불린 인물, 단양현에 위치한 남궁세가의 분가(分家)인 구벽세가(九劈世家)의 최고수이자 가주인 남궁문우가 검지로 죽립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흉수가 남궁세가인 것을 꼭 세상에 알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그의 말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 남궁진위의 두 눈에 망설임이 일었다.
하나 그는 잠시뿐.
세상에 알리지 못한다 한들, 남궁세가 내의 요직 사이에는 충분히 떠돌 수 있는 이야기다.
그 누구도 쉽게 해 내지 못할 그 일을 자신이 해냈다면? 남궁오래가 아닌 남궁진위의 이름을 남기기만 한다면!
‘고작 가솔들의 눈치 따위를 볼 게 아니다.’
어른들은 그를 더욱 밀어 주게 될 것이며 자연스레 지위는 공고해진다.
남궁전혁의 뒤를 이어 완벽하게 소가주의 위를 위임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 아랫것들에게 능력을 알리는 일은 조금 늦어도 돼.’
위엄을 보일 기회는 많다.
하나 만금장 소장주를 소리 소문 없이 죽일 수 있을 기회는 언제 또 올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결심을 굳힌 남궁진위의 말에 나머지 남궁사래의 몸이 굳었다. 하나 결국 그들 역시 나름의 욕심을 품고서는 남궁문우를 바라본다.
‘애송이 녀석들.’
소문 그대로인 남궁오래를 가는눈으로 바라보는 남궁문우의 내심에는 즐거운 웃음이 번졌다.
애송이에, 눈치 없고 겁도 없지만 어쨌든 남궁세가의 미래를 책임지게끔 예정이 되어 있는 녀석들이다. 이참에 조금 가르침을 내려 주고, 은연중에라도 그들의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남궁문우에게 있어서도 기회였다.
‘무얼 해 달라고 할까? 세가의 독립(獨立)? 아니면 본가로 편입? 그도 아니면…….’
머릿속 가득 즐거운 상상을 담은 남궁문우가 욕심 가득한 두 눈을 한 남궁진위를 바라보았다. 다른 남궁사래 역시 제법 욕심을 비추지만 그만은 못하다.
‘잘 다듬으면 제법 크게 될 수도 있겠어.’
당장은 부족함투성이지만 경험 속에서 잘 성장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상이다.
남궁문우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욕심이 많아야지만 꿈을 꾸고 그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남궁문우는 이미 그런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그중에서는 한때 자신과 어깨가 나란하다고 믿었던 남궁전혁도 존재했다.
‘놈이야말로 진짜 괴물이지.’
잔뜩 부풀어 오른 살집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욕심은 가슴 가득 품고 있으면서 가는눈 속에 그 감정을 파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참거나 인내하지는 않는다.
남궁전혁은 가지고 싶으면 가졌으며, 빼앗아야 한다 생각했으면 빼앗아 왔다. 태어나기를 패주(?主)의 아들로 태어나, 그 운명을 이어받은 것이다.
눈앞의 남궁진위가 그와 같은 괴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제법 쓸 만하게는 클 수 있다고 믿었다.
‘애송이 하나 처리해 주는 일 돕고 차기 남궁세가의 미래에 숟가락 하나를 얹는다. 남는 장사야.’
생각을 정리한 남궁문우의 눈이 가늘게 웃음을 그렸다.
그가 한때는 그토록 경멸했던 남궁전혁을 쏙 빼닮은 것 같은 미소다.
“단양현에는 흑수방(黑手房)이 있다.”
“흑수방이요? 고작 살수 집단 아닙니까?”
남궁문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겉으로 그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고작 살수 집단이지. 그래도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아 주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렇군요. 놈들에게 의뢰를 하는 겁니까?”
“틀렸다.”
남궁문우는 치밀어 오르는 욕을 억눌렀다.
빈틈이 가득한 데다 멍청하기까지 하니 골머리가 아팠지만 어쨌든 삼켜야 될 약(藥)이 아니던가? 모르면 가르치고, 기르면 된다. 그러다 너무 자라나는 것 같으면 가끔씩 끝가지만 쳐 주면 된다.
남궁문우라는 정원사의 손길에 익숙해지게끔 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흑수방에게 의뢰를 넣으면 놈들에게 덜미를 주지 않더냐. 당장이야 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에 큰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아…… 감사합니다, 숙부님.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남궁진위의 선창에 뒤를 따르는 남궁사래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죽립을 깊게 눌러쓴 남궁문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한다. 흑수방은 단지 겉포장일 뿐이지.”
“이이제이(以夷制夷). 그렇군요. 이참에 건방진 만금장에도 손을 쓰고, 흑수방에게 누명을 씌워 감히 남기의 창천 아래 벌이는 음흉한 짓을 막는다.”
“이번엔 옳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지는 못해도, 말한 바쯤은 알아먹는다.
어쨌든 남궁문우는 이 욕심 많은 애송이 남궁진위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누명을 씌웁니까?”
“간단하지. 우리가 흑수방의 암살자가 되면 된다.”
“그게 가능합니까?”
“말이라고 하는 게냐? 이곳이 어디냐?”
“단양현…… 남기!”
“그래, 남기에서 남궁세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나, 남궁창천! 창궁무애!”
저도 모르게 남궁세가를 뜻하는 비호를 외친 남궁진위의 몸이 떨렸다. 전율에 의한 감정의 복받침 탓이다.
남궁문우의 말이 옳았다.
남기 내에서 남궁세가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남궁세가의 식솔인 그들이, 오늘부터 우리가 흑수방이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진짜 흑수방의 생각과 의견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유시(酉時) 말에 작전을 시작한다. 그때까지 스스로 생각해라.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흑수방의 살수다.”
차가운 눈을 빛내는 남궁문우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 남궁진위를 비롯한 남궁오래가 고개를 주억였다.
완전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황준우와 홍산의 옆에 앉아 검을 끌어안은 채 심상수련(心想修練)을 하던 경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살기(殺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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