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7화
그리 잘 절제되지 않은 데다, 투박한 편이지만 엄연한 살기다.
게다가 그 목표도 분명히 황준우와 홍산,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방을 향했다.
‘그리 많지는 않아.’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은 경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다섯 정도?’
자연스레 대낮에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남궁오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혼잣말을 읊조린 경호는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한 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남궁오래다. 게다가 아무리 개차반이라고 해도 천하의 남궁세가.
살수를 부릴지는 몰라도 직접 암살에 나설 리가 없다.
‘남궁오래가 보낸 살수인가.’
가장 확률이 높은 쪽으로 생각을 기울인 경호의 신영이 벼락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번쩍하고 휘둘러진 검이 이제 막 창문을 향해 뛰어 들어오려던 암살자의 가슴을 가른다.
아니, 가르는 듯했다.
어느샌가 첫 번째로 돌입하던 암살자의 등 뒤로 나타난 검은 복면인이 그를 재빠르게 끌어당겨 경호의 기습으로부터 구해 낸다.
“가, 감사…….”
“닥쳐라.”
짧게 상대를 질책하는 복면인을 노려보는 경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었어.’
어느덧 방 안에 나타난 암살자의 숫자가 여섯.
하지만 경호가 느꼈던 기척은 그중 다섯뿐이다.
상대가 자신도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신술에 뛰어난 이, 혹은 무공의 경지 자체가 높은 무인이란 뜻이다.
그리고 첫 번째 기습에서 느낀 반응에 경호는 둘 중 후자의 생각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거 위험한데…….’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 순간 긴장에 몸이 굳는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필 이런 때에 황준우가 술을 먹고 완전히 늘어졌다. 호위무사의 입장인 주제에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단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울상이 지어졌다.
“그러게 내가 유난히 운이 좋은 날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네 마지막 유언이냐?”
복면인들 중 제일 고수로 보이는 이가 두 눈에 음험한 살기를 비춘 채 말한다.
“유언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누군지 정도는 알 수 있을까?”
헛웃음을 흘리는 경호의 말에 조소가 분명한 표정을 비춘 상대가 일권(一拳)을 내뻗었다.
조금 늦었지만 어렵지 않게 그 검을 막아선 경호가 곧장 반격에 나섰다.
파앗- 깡!
검과 주먹이 맞닿았다 생각한 순간, 벼락처럼 세 번째 불빛이 번뜩였다.
“크윽!”
이번에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은 경호가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 상대방의 검은 손길이 사방에서 번뜩이듯 날아들었다.
카가가강-!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다섯 번이나 막아 냈지만 분명 하나뿐일 상대의 주먹은 어느새 아홉까지 불어나 그의 전신을 마구잡이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크아악-!”
재빨리 호신강기를 펼쳐 방어했으나 전해지는 통증을 모두 막을 수 없던 경호의 입에서 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순식간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얻어맞기만 한 경호의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무너질 수 없었다.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네놈들은…… 도련님께…… 못 가.”
웃음을 보인 경호의 말에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본 복면인이 짧은 감탄을 토했다.
“호오…… 의지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군.”
“흐흐, 내가 또 쉬운 남자는 아니지. 그래서 이 나이 때까지 장가도…… 쿨럭!”
거칠게 핏물을 쏟은 경호는 붉어진 눈으로 복면 사내를 노려보았다.
“검은 손…… 네놈들, 흑수방이냐?”
나름대로 짐작을 내뱉은 그 말에 상대를 죽일 각오로 내력을 끌어올리던 복면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두 눈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문답무용. 아쉽지만 죽어 줘야겠구나.”
물론 실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복면인 아니, 남궁문우는 그 누구보다 자신들이 흑수방으로 보이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지 의식을 잃을 정도로만 손을 쓸 예정이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 뒤에서 경호가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복면인들 중 하나가 나서며 말한다.
그 두 눈에 담긴 복수심.
열의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심정이 된 남궁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복수에 마음을 둘 줄 알아야 더 큰일도 할 수 있는 법이지.’
실제로 앞으로 나선 남궁진위는 경호에 대한 복수를 생각했다.
자신들 다섯이 힘을 합쳐도 밀려야 했던 치욕의 그때, 도와달라고 외쳐도 무시하던 모습까지.
‘죽여 버려야지.’
남궁진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죽여서는 안 된다.]
하나 뒤편에서 전해진 전음이 그를 말렸다.
남궁문우는 그의 복수심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과해서 넘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었다.
그 말이 옳았다.
눈앞의 어리석은 호위무사는 자신들을 흑수방으로 보아 주었다.
살려 두는 쪽이 이득이다.
더 큰 복수가 된다.
“흑수방이…… 아니네.”
“무슨 암살자가 이렇게 말들이 많아…… 누구냐, 너희?”
경호의 두 눈에 의심이 가득 깃든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듯한 기분에 남궁진위의 고개가 재빨리 남궁문우를 향했다.
[멍청한 놈!]
쳐다보면 안 되지.
의심이 확신을 만들어 줄 뿐이다.
“남궁오래. 설마 진짜 남궁세가냐?”
남궁진위의 눈이 떨렸다.
경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남궁문우도 다르지 않았다.
“멍청한 애송이 녀석!”
거칠게 욕을 내뱉은 남궁문우가 앞으로 나서며 주먹을 내뻗었다.
빛살처럼 뻗어진 주먹은 다시 아홉이 되어 경호의 전신을 두들기려 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은 전력(全力)이었다.
콰과광-!
벼락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이 일었다.
“쿠에엑-!”
바닥으로는 선홍빛 핏물이 가득 쏟아져 내렸다.
그 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남궁문우였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서만큼은 절대자로 보이던 그가 창백한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숙부님!”
놀란 남궁진위가 다급히 외치며 정면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는 경호의 바로 앞에 선 황준우가 있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이런 놈이 호위무사라고…….”
저도 모르게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경호가 주절거린 순간이었다.
“히끅-!”
붉어진 얼굴로 몸을 비틀거린 황준우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 잠시. 급하게 술기운을 몰아내느라…….”
“괜찮으신 겁니까?”
“아직은 안 괜찮아. 근데 우리 경호, 엄청 다쳤네.”
여전히 조금은 풀어진 두 눈에, 경악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경호의 양 볼을 부여잡은 황준우의 눈매가 사납게 치솟았다.
“어떤 건방진 놈이 우리 경호를 이 꼴로 만들었을까? 나 지금 엄청 화나는데.”
“그 건방진 녀석 여기 있다. 이노옴-!”
그사이 진탕되었던 내력을 안정시킨 남궁문우가 날아올랐다.
그의 양손에서는 지금의 구벽세가를 이룬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는 구벽신권(九劈神拳)의 모든 진의(眞義)가 담겼다. 빛살처럼 빠르고, 주먹이 마치 검이라도 되는 양 날카롭다.
남궁진위는 그 주먹이라면 눈앞에 태산(太山)이 있다 한들 아홉 조각으로 쪼개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야말로 구벽신권!
본래 무공의 이름이었지만 어느덧 그의 몸과 같은 절기가 되었다 하여 한 사람의 별호가 된, 본가와 분가를 모두 포함한 남궁세가 제일가는 권법의 고수가 펼친 주먹이 황준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전신(全身)을 아홉 개의 불빛이 두들겼다.
황준우를? 아니.
남궁문우가 두들겨 맞았다.
“크아악-!”
비명을 토하며 허공으로 날았다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그의 몸 이곳저곳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두터운 눈두덩을 비롯하여 총 아홉 곳.
“내가 아홉 개의 불빛을 본 게 착각은 아니었구나.”
저도 모르게 흘린 혼잣말에 흠칫 놀란 남궁진위의 몸이 떨렸다.
“아…… 이제 좀 몸이 풀리는 느낌이네.”
시선을 돌려보니, 선명하게 빛나는 눈을 한 황준우가 중얼거리고 있다. 직후 고운 호선으로 휘어지는 그 시선을 마주하였는데, 어째서인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남궁오래. 네놈들이구나.”
단지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어린 소장주는 설령 술에 취해 있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들의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잘못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눈치 없는 남궁진위도 예측이 아닌 확신을 했다.
“나, 나는 아니……!”
그래서 손을 내저으며 재빨리 부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보다 황준우의 주먹이 더 빨랐다.
‘아, 아홉 개의 불빛…….’
검(劍)을 대표로 하는 남궁세가의 몇 없는 권각술 중 하나가 또 한 번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하늘이 돌았다.
남궁문우와 다를 바 없는 멍투성이가 돼서 쓰러지는 남궁진위의 모습을 본 남은 남궁사래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눈앞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 분명했다.
“우, 우리가 시작한 일이 아니오. 정말 아무것도 모르…….”
퍼버벅-!
“살려 주시오, 꾸엑-!”
“이러려던 게 아니…….”
“부디 아프지 않게…… 꺽!”
제각각 나름의 마지막 말을 남긴 남궁사래도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그 중심에서 비틀거리면서 제 주먹을 흘낏 바라본 황준우의 눈가로는 웃음이 번졌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구먼. 멋만 부리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경호의 입가로는 감출 수 없는 쓴웃음이 번진다.
‘지금의 난 숙취 중인 도련님보다 약하구나.’
호위무사라는 이름이 정말 우스울 정도다.
지켜 줘야 하는 상대에게 은혜나 입고 있는 상태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부족하다 느꼈으니 말이다.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그런 경호의 앞에 태산처럼 선 황준우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묻는다.
“더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될 거야.”
“도련님을 지킬 수 있을 만큼요.”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아닌 게 아니라 어린 몸이 처음 들어온 술기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에 의식을 차리기까지 꽤나 힘들었다. 귓가에 쏙 파고든, 경호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목 바로 아래 검이 닿기 직전까지는 꿈나라를 헤맸을지도 모를 수준으로 취한 것이다.
전생에 제법 술에 강했다고 하여, 현생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착각부터가 문제였다.
결국 방심과 다름이 없다.
“일단 치료부터 하자.”
경호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 담긴 시선으로 주저앉은 황준우의 손에서부터 몰려나온 황금빛 기운이 단숨에 경호의 전신을 휘감는다.
곁에서 지켜보면 눈이 멀어 버릴지도 모르는 그 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사라진 후에는, 다치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경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건 대체 어떻게……?”
몸의 상처도 사라지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말끔히 없어졌다. 오히려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도 든 경호가 놀란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본다.
“땅의 기운을 북돋아서 회복력을 증진시켰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지인의 기운을 기본적으로 조금씩은 갖추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다행이다. 큰 내상은 없네.”
“그렇……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눈앞의 어린 주인을 보고 있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그랬다.
“정말 다행이야. 약속할게, 경호. 나 다신 술 안 마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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