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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73화 (73/373)

학사재생 73화

“나를 죽이고, 남궁세가도 망하고? 아니, 넌 못 해. 네가 죽어도 남궁세가만큼은 지켜야 된다고 믿으니까. 네 머릿속에 그런 광기를 심은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누가 주인이라는 것이냐! 나는 남궁전혁이다! 남기제일수재! 그 누구라 한들 내 머리 위에 설 수는 없다!”

남궁전혁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미소를 그린 황준우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네가 나를 죽일 수 없는 건 사실이잖아.”

다리를 까딱까딱거리며 탁상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그 향을 음미하며 마신 황준우가 또 한 번 활짝 핀 미소를 보였다. 여유롭다. 반면 남궁전혁은 스스로 결코 잃지 말자고 다짐했던 이성을 잃었다.

탁상 위의 승부는 갈렸다.

“자, 협상은 이제 끝난 것 같고. 정리를 해야지. 황금 백오십만 문, 보름 뒤까지 내놔.”

황준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9. 남기의 왕

같은 시각.

남궁세가의 유일한 금지(禁地)라 불리는 무애원(無涯院)의 가장 깊은 심처(深處)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둥근 원형 식탁 앞에 서로의 시선을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있지만 두 사람의 입장이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쪽은 편안하게 정좌를 한 상태였으며, 반대편에 앉은 이는 무릎을 꿇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중 정좌를 한 측, 새하얀 백발에 바닥까지 닿는 긴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 측이 먼저 입을 연다.

“그래, 만금장 소장주. 그 아이가 보기보다 제법이라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의 안색이 낯이 익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기세가 느껴지는 굳은 인상, 그 얼굴을 아는 이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남궁세가주, 남궁호량이었으니 말이다.

본디 금지인 무애원에 머무는 이들이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선대의 원로들이라고는 하나, 남궁세가에 있어 가주의 위치는 절대적이고 견고하다.

나이가 많고, 배분이 위라고 하여 가주를 무릎 꿇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데 그런 가주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여전히 기세가 가득 담긴 두 눈으로도 눈앞의 노인을 감히 마주 볼 생각을 못한다.

천하에 있어 남궁호량을 이토록 움츠리게 만들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검제 남궁천.

한때 우내십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던 그는 황석후가 만금장의 장주로 취임하고 얼마 뒤, 생각지 못한 역풍을 맞아 휘청거린 남궁세가의 봉문과 함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뒤로 다시 남궁세가가 개문하였을 때에도, 검제 남궁천이 세상의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다.

남궁세가의 번영에는 언제나 남궁호량과 남궁전혁.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서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천하의 대다수가, 검제 남궁천은 죽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남궁호량을 무릎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오로지 그밖에 없다.

검제 남궁천, 한때는 남궁세가 유일무이한 제왕(帝王)이라 불렸던 그만이 가주의 머리 위에 설 수 있다.

“전혁이 그 아이가 무너질 것 같으냐?”

“욕심이 많은 아입니다.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욕심이 많지, 그래서 약점도 많고.”

“…….”

남궁호량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에서 아니, 천하 전체를 통틀어 가장 욕심이 많은 남궁천이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뱉지 못한다. 아니 생각조차 없었던 듯 지워 버린다. 그런 남궁호량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남궁천이 눈앞의 상을 가볍게 두들겼다. 입에서는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전부터 그랬어. 그놈의 황씨 일가는 무엇 하나 쉽지가 않았지. 너도 겪어 봐서 알 것 아니냐? 근데 왜 또 당했을까?”

“…….”

“전혁이라면 잘 키웠지. 오로지 남궁세가를 위해 살도록 잘 만들어졌어. 네가,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런데도 부족해. 왜일까? 그 피가 유달리 남다른 건가? 우리는 남궁인데?”

“남궁만이…… 제일입니다.”

남궁호량 역시 그렇게 믿게끔 키워졌고 자랐다.

하지만 지금 남궁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남궁의 피가 결코 약하지는 않지만, 황씨 일가 측이 더 독해. 더 끔찍하고, 진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나름 잘 키웠다고 믿었는데, 내 자만이었나 보구나.”

“아닙니다. 누가 제왕의 선택을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결과가 그렇지 않느냐?”

“아직 전혁이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멍이 뚫린 둑이지.”

“…….”

“쯧쯧. 그러니까 내가 자만했다는 게다.”

할 말을 잃은 남궁호량을 내려다보던 남궁천이 혀를 차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남궁호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직접 나서시려고요?”

“조금 시끄러워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일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이니 소란을 더 키워야 되지 않겠느냐? 별것 아닌 잡음쯤은 모조리 묻혀 버리게 말이다.”

남궁호량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남궁천이 나서면, 다시 검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한때 우내십존이라 불렸던, 하나 이제는 사라진 그 이름.

그가 다시 강호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으로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다.

이미 정립되어 있는 강호의 규율과 서열이 뒤집히고 새로운 역사가 쓰이게 될 터였다.

숨죽이고 있는 지난 삼십여 년의 세월 남궁천은 이미 스스로가 우내십존을 뛰어넘었다고 말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전혁이가 무너지기 전에 어서 가서 누가 진정한 남기의 왕인지, 어서 가서 그 어린 꼬맹이에게 알려 주자꾸나.”

“제왕이시여…….”

남궁천의 가벼운 말투에 담긴 그 말.

남기의 왕.

그 깊은 의미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은 남궁호량이 고개를 숙인다.

드디어 숨죽이고 있던 제왕이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떼었다.

금자 백오십만 문.

밝힌 바 있듯 남궁세가는 그런 큰돈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모든 걸 벗어나 남궁전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수치심과 패배감에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뒷일이고 뭐고 당장 눈앞의 어린 꼬맹이를 쳐 죽여 그 내장을 끄집어내 말의 먹이로 던져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손을 내뻗지 못한다.

죽이라는 명령도 혀끝에만 감돌 뿐 입 안에서 튀어 나가지를 못한다.

‘왜! 왜!’

답답하다.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있는데 하지를 못한다.

여태껏 남궁전혁에게 없던 일이다.

그는 늘 원하는 대로 살아왔고, 뜻대로 이루어 왔다.

한데 이것만은 안 된다.

남궁세가의 이름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곧 남궁이고…… 제왕일지어다.”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아득바득 힘을 짜내 그 말 한마디를 흘리는 남궁전혁을 보며 황준우의 입가 어린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슨 발악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거기서 그만둬. 더 하면 죽을지도 몰라.”

“내가…… 푸른 하늘의 유일한…… 제왕…… 쿠웨에엑-!”

“소가주님!”

“소가주!”

푸른 천 위에 피를 한바탕 쏟아 내며 몸을 비틀거리는 남궁전혁과 그를 부축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수하들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고개가 좌우로 내저어졌다.

“그러게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처음 겪는 패배에 속이 상해 안 그래도 맛 간 정신 더 돌아간 건 알겠는데, 그만해라. 네가 죽으면 황금 백오십만 문을 또 다른 놈한테서 받아 내야 하잖아?”

“네놈이…… 네놈이…….”

“그만하거라. 보기 추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황준우가 아니었다.

어느덧 남궁전혁의 등 뒤에서 못마땅한 눈빛을 흘리고 있는 이는 검제 남궁천이다.

“누,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그를 처음 본 남궁세가의 젊은 무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검병에 손을 가져다 댄다.

“검제를 뵙습니다!”

그 검이 뽑히기도 전, 어딘지 모르게 감격에 빠진 표정을 한 무인들 몇몇이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며 머리를 숙인다. 그 놀라운 음성에 검병에 손을 가져다 댔던 젊은 무인들은 당황하며 몸이 굳었다.

“어린것들이 몰라 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재빨리 그런 남궁천의 등 뒤로 나타난 남궁호량이 고개를 숙인다.

그것으로 남궁천의 정체가 완전해졌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남궁호량이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인물은 천하에 검제 남궁천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제왕을 뵙습니다!”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머리를 조아리는 젊은 남궁세가 무인들의 두 눈에는 감격이 가득 차올랐다.

세간에서는 이미 잊혔다고 여기는 검제의 전설이지만, 남궁세가의 푸른 지붕 아래 살아가는 무인들의 가슴에는 아직 그 이름이 숨 쉬고 있다.

검제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현재 남궁세가의 제일고수이자, 우내십존 중 하나인 검치(劍痴) 남궁무상이 아직 제왕의 이름을 이어받지 못한 이유 역시 바로 그 탓이었다.

남궁호량, 남궁전혁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그의 이름을 남궁세가 전체의 가슴에 깊이 새겨 넣었다.

마치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듯 조심스러운 행보였고 실제로 꽤나 애를 쓴 만큼 결과도 이루어 냈다. 지금 남궁세가 무인들이 보이는 표정과 눈빛이 그 결과다.

“네가 만금장의 소장주냐?”

그런 남궁세가 무인들의 감동과 감격을 뒤로한 채 느긋한 걸음으로 황준우의 앞에 선 남궁천이 웃음을 보이며 묻는다.

자리에 앉아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만금장 소장주지. 그런데 영감 뒤에 손주는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나?”

생각지 못한 황준우의 거침없는 말투에 남궁천의 눈매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정도도 이겨 내지 못하게 키우지는 않았다.”

“잔인하시네.”

“그렇지. 나는 잔인한 사람이란다.”

황준우의 말을 수긍한 남궁천이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펼친다.

언뜻 남궁전혁이 보였던 행동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당시의 남궁전혁은 수하들을 부리기 위해 검지를 썼다. 그리고 실제로 그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하나 남궁천은 제 검지에 강기(?氣)를 일으키고 예리하게 다듬어서 표출한다. 심지어 남궁전혁과 다르게 그 힘을 휘두를 생각도, 자신도 있었다.

“어떠냐? 이런 건 처음 보지?”

남궁천의 어린아이 같은 장난에 황준우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제법 재밌는 재주이긴 한데, 처음 본 건 아니야. 같은 걸로 따지면 두 번쯤. 비슷한 건 한 열 번쯤 봤나?”

“푸하하! 농담을 잘하는구나, 꼬맹이. 마치 우내십존 모두를 만나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야.”

“만나 본 적 있지.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엔 네가 없었네. 신기한 일이야. 이렇게 욕심 많은 눈빛을 한 주제에 어떻게 거기에 없었을까. 아, 봉문했었다고 했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황준우를 내려다보는 남궁천의 입가로는 묘한 미소가 어렸다.

‘듣던 것보다 더 제법이로군.’

겉으로 보기에는 검지에 강기만 피어올린 채 평안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남궁천은 황준우를 향해 계속해서 무형(無形)의 기운을 쏘아 내고 있었다. 절정의 고수 아니, 초절정에 오른 진짜 고수라고 하여도 진땀을 흘릴 정도의 강력한 압박이 황준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이것이 황가(家)의 피…….’

탐이 난다.

처음 이 자리에 올 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황준우를 분명히 죽일 생각이었다.

분수 모르는 애송이에게 누가 진짜 남기의 왕인지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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