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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74화 (74/373)

학사재생 74화

한데 이렇게 마주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호량아. 설린이 올해로 방년이던가?”

“예, 그렇습니다.”

“아직 마땅한 혼처가 없지?”

“팽가와 당가 측에서 말은 몇 나왔습니다.”

“결정된 바는 없다는 뜻이로군.”

흡족한 표정을 지은 남궁천이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준우를 마주한다.

“어떠냐?”

“무슨 말이야?”

“네게 남궁의 이름을 주겠다. 대신해서 너는 그 황가의 피를 나눠 다오.”

세가라는 혈계 직속으로 묻혔기에 누구보다도 그 힘을 숭상하는 남궁천이었다.

때문에 벌써 몇 대째나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황씨 가문의 피가 탐이 났다.

‘저 놀라운 혈맥을 우리 남궁의 아이가 받아 내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다음 대의 남궁세가는 남기의 왕이 아니라,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네가 좋아하는 협상이나 제안 따위가 아니란다. 명령이지. 그저 너는 따르기만 하면 돼. 단지 그것만으로도 너는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일 남궁가의 식솔이자, 천하제일인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후대까지 칭송받겠지! 네 자식이 그 전설의 칠야무신마저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어떠냐!? 가슴이 부풀지 않는가!? 천하를 한 손에 쥐고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에 웅심이 떨려 오지 않으냐는 말이다!? 너와 네 자식, 그리고 나와 남궁세가. 또 만금장!”

격하게 흥분한 듯 두 눈시울을 붉히며 양팔을 크게 펼친 남궁천이 황준우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우리라면 가능하다. 너와 나 둘이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가 이 발아래 놓이는 것이다. 천하에서 오직 우리 둘만이 존귀하게 된단 말이다!”

침까지 튀기는 남궁천의 열변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호소력이 깊었다.

제법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의 제안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마저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만큼 깊다.

하지만 황준우는 달랐다.

“뭔 개소리야. 저기 있는 뚱땡이보다 더 욕심 많은 영감 주제에 어디서 약을 팔아?”

여전히 양어깨를 부여잡은 채 몸을 떠는 남궁천을 보며 황준우의 입가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나도 욕심이 많은 편이라 말이지. 그렇게 먹은 천하를 왜 둘이서 나누나?”

“허허…… 허허허…….”

“남궁만이 제일이고, 창천만이 유일하다. 영감이 만든 말 맞지?”

“잘 알고 있구나. 눈치가 빨라.”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히는 남궁천의 두 눈에 짙은 노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 과거에 강호를 종횡할 때도 그렇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직설적인 모욕을 당한 적이 있던가? 적어도 검제 남궁천의 삶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당황했고, 잠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지만 지금은 명확하게 해결책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제 네가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부여잡은 황준우의 양어깨에 힘을 밀어 넣기 시작한 남궁천의 얼굴 위로 분노 섞인 웃음이 흘렀다.

“건방진 애송이 녀석. 네가 어떠한 기회를 잃은 건지 저승에서, 염라대왕의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아라. 우리 남궁만이 제일이며, 창천만이 유일이다. 그리고 그 푸른 하늘은 곧 나 남궁천이 될 터이니…….”

다시금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던 남궁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쯤 황준우의 팔이 부러지고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일그러지고 있을 시점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의 눈앞에 있는 황준우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비웃음만을 짓고 있을 뿐이다.

“어이, 영감. 그거 알아? 댁은 저기 누워서 피 토하고 있는 뚱땡이보다 더 돼지 같고, 더 멍청한 양반이야.”

“저 녀석은 적어도 나를 얕보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거든?”

황준우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남궁천의 손이 무형의 힘에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 이 내가 내력 싸움에 밀린다고?”

긴 은거 기간 동안 나이가 드는 만큼 쇄하지 않기 위해 몸에 좋다는 영약은 모두 챙겨 먹고 무공도 열심히 수련했다.

천하의 중심에 홀로 우뚝 선 자신을 상상하다 보면 괴로워도 버틸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내력도 늘었고 무공 실력도 진보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자신감이 되어 그의 단전과 육체에 녹아나 있다. 한데 그중 첫 번째라 볼 수 있는 내력이 밀린다.

‘이 내가? 고작 약관도 안 된 애송이한테?’

남궁천은 믿을 수 없었다.

어미 배에서부터 영약을 먹고 자랐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인 탓이다.

“내공이란 건 말이지. 양도 중요하지만 질이란 게 있는 법이거든. 확실히 절대량만 따지면 내가 아직은 부족할지도 몰라. 그런데 질에서 내가 워낙 압도적이네? 그러니까 영감의 내력이 내 내력 앞에 힘을 못 쓰는 거야.”

“그걸 누가 모른다는 말이냐! 이건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된단 말이다!”

내공에는 양이 아닌 질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무인들은 더 뛰어난, 놀라운 효과를 가진 신공절학의 내공심법을 원한다.

더 많은 양의, 그리고 더 훌륭한 질을 가진 내력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중에서도 검제 남궁천이 익힌 천뢰제왕신공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내공심법이다.

그야말로 신공절학.

모으는 양도 놀랍지만, 그 질이 가히 비견할 적수가 몇 없다.

그러니 지금 황준우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지금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고 있잖아.”

“크아악-!”

폭음이 일고 청천원의 방 안이 걸레짝처럼 찢어지며 지붕이 날아갔다.

결국 내력 싸움에서 밀린 남궁천은 비명을 토하며 뒷걸음질 친다. 입가로 흐르는 옅은 핏물을 훔친 그는 연신 거친 숨을 흘렸다.

“이, 이럴 수가…….”

“검제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남궁천이 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을 표했다.

그 틈새에, 힘겹게 번지려는 내상을 수복한 남궁천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외친다.

“이 건방진 애송이 놈. 무슨 사술을 부리는 게냐!”

“그놈의 사술, 사술. 뻔한 방식 지겹지도 않냐? 조금 색다른 말 없어?”

“죽여 버리겠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새삼스럽게 흥분하기는.”

피식 웃는 황준우를 향해 남궁천이 지난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휘두르지 않았던 검을 뽑아 든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듯 폭발한 기운이 푸른빛으로 형상화되어 황준우의 머리 위로 나타난다.

“제왕…… 검형!”

그를 바라보는 남궁세가 무인들의 얼굴에 감격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천하제일의 검공이라 뽑히는 제왕무적검(帝王無敵劍)!

그를 대성한 이후에 정수만을 뽑아내어 익혀야지만 펼칠 수 있다는 전설의 검공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야말로 검천(劍天)!”

남궁호량 역시 감격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푸른 기운 하나, 하나가 강기이자 검이다. 푸른 검의 하늘 아래 우뚝 선 제왕의 목소리가 명령을 내린다.

“놈을 죽여라!”

남궁천의 일갈에 하늘을 뒤덮은 수천, 수만 개의 검강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오오-!

주변의 대기가 일고 바람이 갈라진다.

구구궁-!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떨리며 비명을 토한다.

그 중심에 서, 목표가 된 황준우는 그 와중에도 여유롭게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빠르게 쏟아지는 제왕검형의 기운 속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황준우는 그렇게 해낸다.

그 모습이 마치 태산이 일어나는 것만 같다. 거대한 파도가 바다를 건너 밀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어딘지 느린 듯, 하지만 제왕검형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황준우의 손에는 어느덧 작은 떨림을 토하는 수왕검이 들려 있었다.

우우웅-!

수왕검이 전율하듯 몸을 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장엄하고 긴장되는 모습이다.

하나 정작 수왕검의 주인이자, 그 시선의 당사자인 황준우만은 다르게 들렸나 보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쓸데없이 겉멋만 잔뜩 들고 완전 꽝이잖아, 이거.”

거침없는 비웃음과 함께 조롱을 날린 황준우와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동시에 남궁천은 대소(大笑)를 터트렸다.

“푸하하! 어설픈 허세와 격장지계에 무너질 제왕검형이……!”

꽈과광-!

그가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이 허공으로 날아오른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몇 번 검을 휘두른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 자체로 하늘처럼 보였던 푸른빛 강기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다…….”

“네놈은 남궁의 이름 아래 먼지처럼…….”

총 다섯 번.

딱히 강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으로 하늘을 뒤덮던 제왕검형을 모두 지운 황준우가 남궁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지처럼 뭐?”

“먼지……처럼…….”

“제왕검형이 먼지처럼 산산조각 날 거라고?”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 있어. 나도 한때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힘을 쏟아 내면 엄청 강할 것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었거든. 근데, 그거 엄청 비효율적이야. 이건 마지막이니까 알려 주는 비급이야. 염라대왕 앞에서라도 복습하게, 잘 기억해 두라고.”

동시에 수왕검에서 뿜어져 나온 예리한 기세가 남궁천의 목덜미 앞까지 다가간다.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아슬아슬하게 턱 끝을 베이며 살아남은 남궁천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쥐고 반격에 나섰다.

“아직, 아직 끝은 아니다!”

내력 싸움에 이어 제왕검형까지 제법 많은 내력을 소모했지만 남궁천 그래도 검제였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애송이한테 당하는 그런 낭만 없는 죽음은 원하지 않았다.

“아직 끝이 아니긴.”

카가가강-!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긴다.

그를 바라보는 남궁세가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왕무적검이 연신 펼쳐지는 남궁천의 검이 무너질 리 없다. 그의 말대로 그는 검제였고, 남궁세가의 제왕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 희망도 검을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사그라든다. 기대도 녹아내린다.

결국 십 합.

고작 열 번의 검도 받아 내지 못한 남궁천이 검을 놓쳤다.

“이 내가…… 남궁천이……!”

마지막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내지르는 남궁천의 목에 수왕검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파고들었다.

단숨에 살과 뼈를 끊고 허공으로 치솟은 수왕검에 묻은 피를 떨쳐 낸 황준우가 주변을 둘러본다. 차갑고 섬뜩한 그 시선에 몸을 움츠리는 이들을 향해 작은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물었다.

“자, 그래서 다음? 내 돈 주기 싫은 사람?”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손을 드는 이도 없었다.

맹렬히 타오르는 기세를 두 눈에 담은 남궁호량조차 웃는 황준우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 뿐이었다.

손을 털며 아직도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수왕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연다.

“그럼 이 일은 이걸로 끝. 자, 그럼 이제 계산을 다시 해 볼까?”

이어진 목소리는 너무나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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