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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75화 (75/373)

학사재생 75화

무한(武漢).

비옥한 중원의 땅에 세워진 성도이자, 장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다는 점, 세 도시가 합쳐져 만들어진 독특한 특색 등으로 진귀한 볼거리가 많은 거대한 도시의 밤은 아름답다.

특히 항주의 서호(西湖)와도 자주 비견되곤 하는 동호(東湖)에는 늦은 밤까지도 가족 혹은 친구 또는 연인을 태운 배가 떠다니며 도시의 불빛을 더한다.

그러한 동호의 한편, 물놀이를 나온 다른 배들에 비해 수십 배는 거대한 범선이 나타났다.

용의 머리로 선두를 장식하고, 배의 후미에는 호상(虎像)을 두 마리 세웠으며 그 외로도 온갖 화려한 치장물로 가득 장식한 이 배는 작금에 와서는 동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깃거리였다.

달리 동련선(東蓮船)이라고도 불리는 이 배는 약 이십 년 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나 동호의 물길 위를 떠다니는 날은 일 년을 통틀어 단 하루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정해진 날짜는 달리 없었다. 그저 뜬금없이 물길 위로 뜨고, 또 다음 날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여기서 생기는 하나의 의문점은 그러면 이 동련선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역시 황궁의 가장 높은 이들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의 유흥거리라는 말이었다. 두 번째로 흥미를 끈 이야기는 거대한 무림문파에서 자신들의 세를 자랑하기 위해 만든 자랑거리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암상(暗商)들이 비밀 경매를 위해 만든 비밀 거점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끔씩 누군가가 동련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으나 모두가 죽립을 눌러쓴 데다 어두운 밤을 틈타 움직였기에 그 행색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던 탓이다.

동호에서 가장 화려한 배를 타면서, 누구보다 은밀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누군가는 동련선을 비웃으며 동란선(東爛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저 화려한 배 안에서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악독한 일이 꾸며지고 있을 것이다. 배를 타고 내리는 이들은 그 심성이 매우 독한 마귀들일 것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배를 타고 내리는 이들이 정말 그토록 무서운 마귀들이라면 우선 지적을 하는 사람들 먼저 처리하지 않았을까? 하나 동련선을 놓아두고 제멋대로 떠들고 까 내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넘치고, 그 누구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결국 헛소문으로 취급받을 뿐이다.

“아랫사람들이 하는 소리란 다 그런 게요. 그러니 헛된 소문은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맙시다.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가끔 귀를 열어 주는 척하는 것뿐이오. 열 번을 무시하고, 단 한 번을 잘해 주면 감사해하며 고개를 숙이오. 하나 열 번을 잘해 주고 한 번을 무시하면 곧장 욕지거리를 내뱉지. 우리 모두 협을 행해야 하고, 은혜롭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으나, 모든 상황에 그를 최우선에 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진짜 평화를 위한 길이란 것이지요.”

그러한 동련선의 화려한 선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의 말에 중앙에 놓인 둥근 탁자에 모인 이십 여명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선장의 말은 언제나 감격을 주는군요.”

주변인들의 말에 죽립을 길게 눌러쓰는 대신 입가에 비친 미소만은 더욱 짙게 그린 선장이 고개를 주억인다.

“그런 의미에 있어 오늘 나눠야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기에는 참으로 무거운 주제가 많소이다. 처음에는 이 나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아랫것들의 헛소문으로 생각했을 정도지요. 다들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칠야무신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무공서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선장의 무거운 말에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비추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장내에는 무거운 공기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들에게 있어 칠야무신의 이름이란 그토록 힘겨웠다.

꽤나 멀어졌다고 하여도, 지난 일이라고 쳐도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그 이름을 흘리는 선장이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미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 활협단(活俠團)에서 시장에 나온 칠야무신의 무공서 중 하나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장내의 무거운 분위기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누군가가 목울대를 크게 출렁이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려왔다.

“……뜸을 들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실 것 같아 시간을 드렸지만, 길게 끌 이유도 없겠지요.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당의 선원들 몇 분이 검사한 결과, 그 무공서는 의심할 바 없는 진품으로 판명됐습니다.”

웅성웅성.

조용하던 장내에 곧장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또는 선장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초리에는 대다수 불신이 가득했다.

“선장은 그 말에 모든 책임을 걸 수 있소? 갑작스럽게 시장에 나온 그 물건이 칠야무신의 무공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데에 모든 걸 걸 수 있냐는 말이오?”

손을 번쩍 들고 앞으로 나선 이의 풍채는 매우 거대했다. 키는 칠 척이 훌쩍 넘었으며 어깨는 산악을 닮았다. 죽립으로 가려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곧게 다물어진 굳은 입술은 마치 그의 성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 사내를 곁눈질로 올려다본 선장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주억였다.

“무당(武當)의 이름과 제 명예, 선장이라는 여러분들이 추대해 주신 무거운 직책. 그리고 검을 걸지요.”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를 참으로 담담하게 펼치는 선장의 앞에 기세등등하게 나섰던 사내의 입 끝이 씰룩였다.

“진짜란 말이군.”

“농담을 할 이유가 없지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강하게 두드린 사내의 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주변에 다가가는 것만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를 가득 품은 사내는 마치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선장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만약 칠야무신이 살아 있다면, 나 오태악에게 선봉을 주시오!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 나가 놈의 팔목을 꺾고 목을 비틀어 버리겠소. 놈에게 우리 태양궁(太陽宮)의 이름을 똑똑히 알려 주고 오리다.”

투둑, 투둑.

머리 위로 쓰고 있던 죽립이 사내, 오태악에게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 내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모습을 여전히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던 선장이 웃음을 지었다.

“믿음직하군요. 그 용맹이 있으면 설령 진짜 칠야무신이 살아온다고 할지라도 겁날 것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사건은 그의 무공서가 나타난 일일 뿐입니다.”

“칠야무신의 무공서를 칠야무신이 아니면 누가 만든단 말이오? 이는 분명 그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 아니겠소? 이 강호와, 나 오태악과 한판 붙어 보겠다는 말 아니오!”

“시끄럽다. 네놈이 제어도 못 하고 멋대로 뿜어내는 열기 탓에 몇 사람이 피해를 보고는 있는 줄 아는 게냐?”

그런 오태악의 어깨 위, 마치 얼음처럼 투명하여 그 속내까지 비출 것만 같은 손을 올린 사내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낸다.

“손 치워라, 차무열. 한 번 더 내 어깨에 함부로 손을 올리면, 그 자랑하는 손모가지를 통째로 태워 버리겠다.”

“우습군. 그깟 모닥불만도 못한 장난질로 뭘 태우겠다고?”

“그만!”

점점 불거지는 두 사람의 불화에 지켜만 보던 선장이 몸을 일으켰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신형은 사라진 후였다.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동시에 손을 얹은 그의 죽립 아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만하십시다, 우리.”

작은 말이었다.

딱히 힘이 있지도 않고 위협적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라도 서로를 향해 살수를 내뻗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이 기세를 거둔다. 서로를 향한 눈빛만은 쉽사리 거두지 않았지만, 자존심 높은 두 사람의 성정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제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모를 기사(奇事)였다.

“다들 놀라신 건 압니다. 하지만 말한 바 있듯 칠야무신의 무공서가 나타났다고 하여, 그가 중원에 돌아왔거나 살아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대부분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칠야무신은 그날, 우리가 보았던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선장의 말에 여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던 좌중의 분위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맞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은 분명 두 눈으로 보았다.

누구보다도 강했던 무인이 가장 위대하고 공명하였던 소림의 화신(化身)에게 붙잡혀 장백산 천지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기에 몇 번을 재확인했고,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그가 죽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여러분. 칠야무신은 죽었습니다.”

술렁대던 좌중의 분위기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내젓는 사람들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곧 냉정을 되찾는 듯했다.

‘겉으로 보기에만 말이지.’

선장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 하나, 하나를 바라본 후 웃음 지었다.

모두가 평정을 가장할 뿐이다.

아닌 척하지만, 떨쳐 내려 하지만 모두가 머릿속에 감도는 칠야무신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되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나겠지. 너무나 놀라 잊고 있던 것.’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욕심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빨리 고개를 들 테고 말이다.

“아, 그런데 선장. 그러면 구했다는 칠야무신의 무공서는 어디 있습니까?”

입가로 흐르는 짧은 웃음을 숨기지 않은 선장은 가장 먼저 질문을 한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깊게 눌러쓴 죽립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지만 누군지를 꿰뚫어 보는 일쯤은 어렵지 않다. 그 반절의 생김새, 그리고 목소리, 작은 단서들이 모두 상대의 정체를 말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많았으니 말이다.

“태웠습니다.”

“……!!”

“칠야무신의 무공서를!?”

“태웠다고요!? 엄청난 황금을 주고 구한 것이 아닙니까?”

좌중의 소란이 또 한 번 커진다.

그를 막기 위해 선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쓸모없는 무공이었습니다. 제법 화려하고, 치장을 잘 했지만 우리가 익히고 있는 문파의 무공만도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무공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 내가 포장을 잘해 놨으니 한번 맛보아 보렴. 속은 텅텅 비어 있을 테지만 말이야.”

“…….”

“은양납추두(銀樣??斗). 은빛 나는 납을 마치 진짜 철인 것처럼 붙여 놓은 실속 없는 창이라……, 제가 본 칠야무신의 무공서가 딱 그랬습니다.”

“그런 무공서를 칠야무신이 만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겁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친 선장이 고개를 주억였다.

“혹시 그쪽 선원 분께서도 저의 명예를 시험하고 싶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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