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76화
“그, 그건 아니지만…….”
“저와 감정을 맡은 다른 선원 분들도 그 탓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무공서는 정말 그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칠야무신 또한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무공서가 하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무공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군요.”
“하면 다른 무공서가 어디에 있는지는?”
“판매처가 만금장입니다.”
“허어…….”
상가로 시작하였으나 고작 상인 가문 따위로 치부할 수 없는 대업을 이룬 소주의 큰손. 그런 그들이 이런 큰 거래에 대해 누설을 하고 다녔을 리는 없다. 흔적을 쫓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만금장을 이용하고, 신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단 내에서 계속해서 조사 중입니다. 만금장은 어떻게 칠야무신의 무공서를 손에 넣었는지, 또한 남은 것이 더 있는지, 그 외로도 여러분들이 의문으로 가질 만한 모든 것을 우리의 다음 승선까지는 모두 알아내고 정리해서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만남이면 일 년 뒤 아닙니까?”
선장의 말에 또 다른 사내가 손을 들어 목소리를 높인다.
그만큼 조급하다는 뜻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정보가 모이는 대로 올해에는 예정을 벗어나 다시 한 번 승선 모임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음…….”
선장의 말에 모두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안이 사안이다.
그 말이 옳았다.
별것 없던 중소무관을 무림의 대문파 중 하나로 만든 칠야무신의 무공이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다수가 무공을 익힌 이상, 이보다 더 중요한 사안은 몇 없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자 그러면 이 부분은 일단락 짓기로 하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얼마 전, 남궁세가의 검제께서 아직 살아 계심이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 사안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다. 하나 이 정도로는 칠야무신의 이름을 꺼냈을 때만큼이나 좌중의 혼란을 자아낼 수는 없었다.
“오래도 살아 있군요.”
“아직까지 정정하다고 합니까?”
“만약 정정하다면 벽을 몇 개는 넘었겠군요. 제법 콧대가 높아졌겠습니다그려.”
“정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검제께서 우리와 한배를 타기를 바라고 승선 제안을 하려 합니다.”
“아…….”
“과연…… 검제라면 뭐.”
“자리를 욕심내지 않겠습니까? 예전부터 야망이 제법 큰 양반이었는데…….”
“그래 봐야 이제 막 승선하는 애송이일 뿐입니다. 아무리 검제라고 해도 안 될 일은 있는 것이지요. 여기가 어디 동네 놀이판입니까?”
그저 조금 놀라고 감탄한 정도.
딱 그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제가 살아 있다는데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다. 천하에 검을 쓰는 무수히 많은 무인들 중, 제일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이름에도 이들은 침착하기만 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하나, 하나가 그에 못지않은 명성과 힘을 갖춘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야무신의 이름에는 그토록 흔들린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사람을 잡고 흔드는 그 이름이 어찌나 무겁단 말인가?
모를 리가 없다.
선장 역시 그때 그 사건 당시 장백산에 있었고, 그의 무공과 신위를 보았다.
태연한 듯 말하는 그의 가슴 한편을 묵직할 정도로 짓누르는 무게감은 반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무신이라…….”
짧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선장의 시선이 어느덧 남궁세가와 검제에 대한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좌중을 내려다본다.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아직도 머리가 복잡하십니까?”
모두가 떠난 자리.
피곤한 듯 죽립마저 벗어던지고 늘어진 선장을 향해 오 척도 되어 보이지 않는 단신의 노인이 다가와 묻는다.
“아, 궁왕(弓王)께서도 아직 계셨습니까?”
놀란 표정의 선장, 깊은 주름이 인상적이나 그리 늙어보이지는 않는 중년인이 단신 노인, 무림에서 가장 활을 잘 쏜다고 알려진 궁왕, 오칠을 향해 웃음을 보인다.
“아무래도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무겁습니다그려.”
“천하의 궁왕께서도 칠야무신의 이름은 무거우신가 봅니다.”
“선장께서도 그럴진대, 제깟 놈이 무슨 재주로 버티겠습니까?”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웃는다.
오래된 친우를 바라보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씁쓸함과 연민 등이 서로를 내비친다.
“지난 이름이라 생각해도, 참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칠야무신이지요.”
“무섭습니다.”
“저도 그래요, 선장.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모일 수 있던 것 아니겠습니까? 천하라는 좁은 판을 놓아두고 제 욕심 채우기 바빴던 양반들이 한배를 타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아간다. 이상적인 이야기지요. 칠야무신이 없었다면 활협단도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활협…… 활협이라…….”
“선장께서 지은 이름이시지 않습니까?”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변한 것이 없다는 뜻이십니까?”
“변한 것이 왜 없겠습니까? 당시의 저는 젊었고, 진짜 협(俠)을 외쳤습니다. 칠야무신의 토벌 역시 올바른 정의라고만 믿었지요. 한데 지금의 전 조금 아니, 많이 다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흘흘.”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선장을 보며 웃음을 흘린 오칠이 고개를 주억인다.
“그게 사람 욕심이란 겁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때가 있지요. 또 그것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란 말로 포장시켜 나아가기도 합니다. 결국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인데, 그래도 합니다. 참 간사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을 곧게 잡아야 합니다.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선장께서는 나아가는 배의 선두에 서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마음을 못 잡은 것 같습니까?”
놀란 선장의 물음에 오칠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아주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궁왕께서 그리 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흘흘흘. 그래서, 이번 남궁세가에는 누굴 보내기로 하신 겁니까?”
칠야무신의 이야기를 떨치고 나니 생각나는 것은 역시 검제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모임 내에서도 오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큰 건의.
새로운 선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당연히 사람을 보내는 것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제가 한 번 맞혀 볼까요? 아마 태원무관주를 첫째로 꼽으셨겠죠. 이번 일로 제법 긴장도 하고 있을 테니 바람이나 조금 쐬란 의미로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검제를 조금 돕고자 생각하셨을 테니 적어도 십존(十尊) 중 하나를 뽑으셨을 테고,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쪽은…….”
“아아, 그만하셔도 됩니다. 자꾸 하시면 제 속내가 다 읽힌 것 같아 부끄럽지 않습니까.”
“흘흘.”
궁왕을 향해 크게 손을 내저은 선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든 날이지만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오칠의 말대로 그가 선 자리는 그런 위치였으니 말이다. 선실의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강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바람이 부는군요. 기분이 조금 가벼워집니다그려.”
뒤를 따라 나선 오칠이 그런 선장의 기분을 헤아리고 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저도 모르게 입가로 미소를 그린 선장이 고개를 주억인다.
“불어야지요. 불어야 흘러가고, 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변화를 좋아하십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라고, 멈춰 있는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리게 되어 있답니다.”
“흘흘흘. 언제나 그렇지만 선장은 참 말을 재밌게 하십니다. 제자 분들도 좋아하시지요?”
“스승님이 더 좋아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얼굴을 못 본 지 오래됐습니다. 건강하지요?”
“아무렴요. 아주 정정하십니다. 그저 이대로 오래토록 버텨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원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놀랄까요. 냉정하고 때로는 귀신보다 무서운 선장도 제 스승과 제자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워라. 그야말로 원시천존의 은덕일까요?”
“무량수불. 궁왕께서는 도인도 아니신데 어찌 원시천존을 말씀하십니까. 거참, 계속 저를 민망하게 하실 셈입니까?”
“흘흘흘.”
“하하하!”
오칠과 선장의 뒤섞인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남궁세가가 뒤집혔다.
현재 세가의 실세이자 중심이라 볼 수 있는 남궁전혁이 주화입마로 쓰러지면서, 가장 큰 권력을 잡고 있던 남궁호량이 휘청였다.
그 틈새를 파고든 이는 유일하게 남궁호량과 맞설 수 있다 하여 삼인자의 자리에 앉아 있던 남궁호욱이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기회를 잡은 그는 그간 묻어 왔던 남궁호량의 치부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섰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남궁호량, 남궁전혁 일가의 철옹성이 흔들리고 남궁세가 전체에 대변혁의 바람이 일었다.
그런 변혁의 바람의 중심에 선 두 사람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한식탁을 끼고 밥을 먹고 있다. 세상의 소식에 민감한 호사가 혹은 다른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보았다면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비벼 볼 풍경이다.
마치 견원지간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칼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이 한솥밥을 먹으며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꼴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하지만 분명 지금 눈앞의 풍경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두 사람과 함께 원형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젊은 청년,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한다.
동시에 말없이 밥숟가락만 움직이던 두 사람이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 떤다.
그 모습을 황준우의 등 뒤에 웅크린 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검은 도포와 죽립으로 전신을 둘러싼 채 어딘지 모르게 검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를 굴리는 그의 모습은 기괴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 저자는 누구지?’
‘시선이 참으로 섬뜩하구나.’
만약 남궁천이 살아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에 검을 뽑아 들고 그를 위협했을지도 모른다.
쥐는 평생 주인을 모시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한데 어찌 누군가의 등 뒤에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나 세상의 높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는 누구보다 유명하나, 또 그 아래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서 묻힌 서왕을 이제 막 남궁세가의 진짜 기둥이 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걱정하고, 마음을 졸일 뿐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황준우의 입장에서도 참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보기에는 안 좋지.’
젊은 놈이 나이 든 어른을 눈앞에 두고 잔뜩 겁을 주고 위협을 가하고 있다.
유교의 가르침을 받아 장원까지 했다는 놈이 할 짓은 아니다.
하지만 황준우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에도 분명 경우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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