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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77화 (77/373)

학사재생 77화

‘존경받아 마땅할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진짜 장유유서지.’

그런 의미에 있어 적어도 눈앞의 두 사람.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눈이 멀어 수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고 희생시킨 이 둘은 그 범위에 결코 들지 못한다.

“지금처럼만 해. 이 남궁세가라는 좁은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힘내라고.”

“…….”

“남궁호량.”

“예!?”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궁호량이 고개를 번쩍 들며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지만 말이다.

“혹시 해서 묻는 말인데, 남궁전혁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자신이 일종의 세뇌에 걸린 것조차 모른 채 남궁세가를 위해 일해 왔던 비운의 천재.

남궁전혁은 실상 그런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남궁천을 위해 키워졌고, 남궁세가를 위해 일할 노예로 만들어졌다. 남궁호량이 일러 준 것은 기껏해야 그 방식이었다. 과격해도 되고 거칠어도 된다. 군림하고 지배한다 한들 그의 것은 결국 검제 남궁천의 아래로 향하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사마정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황준우가 처음 느낀 감정은 신비함이었다.

제 자식의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부모란 존재가 그리 독해질 수 있을까? 고아였던 시절의 황준우라면 고개를 주억였을 터다. 하나 지금의 그로서는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일이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그 뜨거운 유대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행복.

아, 물론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너에게 있어서는 네 자식보다, 아버지가 중요했던 걸까? 검제와의 유대감이 우선이었던 건가?”

“…….”

남궁호량은 말이 없었다.

그 떨어트린 고개를 보며 황준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다. 사실 둘 모두 아니다. 황준우는 남궁호량이라는 사람에 대해 꽤나 깊이 알아볼 수 있었고, 덕분에 그의 본질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하, 그렇지. 둘 다 아무렴 상관없었지. 사실 너는 스스로를 위했을 뿐이니까. 네가 남궁전혁 꼴이 되기 싫었던 거지. 남궁천의 노예, 모든 것을 이루고 가져도 언젠가는 모두 받쳐야 되는 그런 삶, 네가 살기 싫었던 것뿐이지. 안 그래? 뭐 좋아, 거기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잖아. 제 자신이 가장 귀한, 이기적인 평범한 인생.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묻자고. 남궁전혁,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한 번이라도 있나?”

“그렇……습니다.”

힘겹게 입술을 여는 남궁호량을 보며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거짓말쟁이.”

“…….”

“하나 더해서, 그런 가식 떨 필요 없어. 너와 남궁천의 세뇌에 의해 남궁세가를 위한 일을 했다지만, 그 방법을 결정한 건 결국 남궁전혁 본인이었잖아? 제 욕심을 위해 죄 없고 힘없는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고, 강탈하고, 죽이고. 아버지와 아들은 거울이다. 네 교육 탓도 있겠지만, 결국 그런 거야. 남궁전혁 역시 너 못지않은 나쁜 새끼였다는 거지. 이해해?”

“이해……합니다.”

“그런 나쁜 남궁전혁보다 더 나쁜 녀석이 바로 남궁호량 너야. 그러니까 네가 지하 감옥에 처넣은 남궁전혁의 몫까지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거야. 알고 있겠지만, 나는 무서울 때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든. 다음으로 남궁호욱.”

남궁호량의 친동생이자 현재 남궁세가의 이인자로 불리는 남궁호욱이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적어도 그는 남궁전혁과 같은 선례를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얼굴은 썩어 문드러진 남궁호량보다 낫다.

“뭘 그렇게 좋아하고 있어. 똑같이 똥 묻은 개끼리.”

“너도 크게 다를 바 없잖아, 남궁호욱. 선인(善人)인 척 행세하면서 가솔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했지. 그리고 누군가가 희생당하면 기다렸다는 듯 마치 자신의 것처럼 강탈해 버렸지. 혹시 곤륜노(崑崙奴 = 흑인)에 대해 알아?”

“검은 피부의 짐승 같은 놈들 아닙니까?”

“짐승 같기는. 그건 너 같은 녀석을 읊는 말이고.”

황준우의 일침에 몸을 움찔한 남궁호욱이 시선을 떨구었다.

어쨌든 황준우가 정말 칭찬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쪽 양반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말이야. 저들 사는 세상에는 그런 짐승이 있다더라고. 늑대를 닮은 무리 지어 다니는 녀석들인데, 이놈들이 발도 빠르고 발톱도 날카롭고 턱 힘도 좋단 말이야. 그런데 제 손으로 사냥을 잘 안 해. 꼭 남이 잡아 놓은 걸 훔쳐 먹으려 들지. 근데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부터 마치 제 것이었던 양 망설임조차 없이 아주 간단하게 남의 사냥감을 빼앗아간다니까? 누구랑 닮지 않았어?”

“…….”

“다른 사람을 사지(死地)로 떠밀고 제 욕심을 챙길 때의 기분은 어때? 유쾌한가? 나는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만족감이 스스로를 채우나? 착각하지 마, 남궁호욱. 너는 네가 대단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야. 그 돼지 녀석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놓아두었던 것뿐이지. 자, 그럼 이제 물어보자.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했을까?”

두 사람의 시선이 빠르게 굴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폭풍처럼 몰아쳐 남궁세가를 한 손에 접수한 만금장의 소장주.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 없다.

그 극소수 중에서 진실을 떠벌릴 용기를 가진 이들 또한 어디에도 없다.

자그마치 검제 남궁천이 그의 손에 의해 죽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는 이야기는 무림 전체에 퍼져 나갈 경우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한때 우내십존의 이름을 가졌던 검제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도 놀라울 텐데,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까지 하면 그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세상 전체가 놀랄 그런 충격조차 남궁세가가 느낄 감정에 비견하자면 햇볕 앞의 등불에 불과할 터였다.

검제 남궁천.

한때는 남궁세가의 제일기재였고, 나아가서 남궁세가의 전설이 된 이름,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다른 식솔들조차 근대의 신화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달리 말해, 남궁세가에 있어 검제의 이름은 신이었다.

그런 신이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황준우와 무공을 겨뤘고, 져서, 죽었다.

현실적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두 눈으로 본 이상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 보고 있노라면,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 버리고 만다.

눈앞의 만금장 소장주는 남궁세가의 신을 잡아 삼켰다.

세상 전체를 통틀어 오로지 염라계의 마귀만이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실제로 황준우는 마치 마귀와 같았다. 남궁세가가 숨기고 있는 오랜 비밀과, 현재 가문의 정점이라는 남궁호량과 남궁호욱에 대한 모든 것.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눈 아래 있다.

그 무시무시한 남궁천이 있을 때와 같다.

어딜 가도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귀와 눈을 속일 수 없다.

마치 발가벗겨진 듯 모든 것이 드러난 사람의 기분은 오로지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황준우가 무서웠다.

그 무서운 사람이 두 사람의 죄를 낱낱이 읊고, 질문을 해 왔다.

남궁천을 죽이고, 남궁호량을 손에 넣고 순식간에 남궁호욱까지 무릎 꿇린 후 상청원에 앉아 모습을 감춘 채 제멋대로 남궁세가를 주무르던 황준우가 왜 갑자기 두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가시려는 거군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 두 사람의 대답에 황준우가 작은 미소를 보였다.

“정답. 알고 있겠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아? 그래서 말이야,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그리고, 시킬 일도 있고. 확인할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침만을 삼켰다.

“방금 전 내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말이지. 확인을 하고 싶었던 거야. 앞으로 너희 둘에게 계속 남궁세가를 맡겨도 잘해 낼 수 있을까, 믿어도 될까, 라는 질문인 거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고개조차 주억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못 해서는 안 된다. 남궁호량과 남궁호욱은 그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남궁천의 아래에서 여럿 겪었다. 그리고 당시에 대답하지 못한 이들이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믿어 주십시오!”

“충정을 다하겠습니다!”

“믿음은 개뿔. 충정은 지랄. 내가 너희한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다만 잊지 말란 거야. 나란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결코 그 뇌리에서 지우지 말라고. 혹시라도 배신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다시 한 번 나를 떠올려. 그때가 되어서도 무섭지 않다면 또, 나보다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한 번 해 봐. 막지 않을 테니까.”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머리를 크게 숙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두 사람을 본 황준우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좋아, 그러면 두 사람을 믿는다는 의미로 우리 약속의 징표를 남겨 볼까? 사마정.”

황준우의 부름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사마정이 품에서 두 개의 투명한 병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설마……?”

식탁 위로 무언가 올라오는 소리에 힘겹게 시선을 들어 투명한 병을 확인한 두 사람의 시선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고 지나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유리병 바닥에 작고 검은 무언가가 제 생명을 자랑하며 고동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벌레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려나? 고독(蠱毒)이야.”

“……!!”

“……!!”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며 황준우를 올려다본다.

고독을 직접 본 것은 분명 처음이다.

하나 이야기는 들은 적이 많았다.

흔히 고독이라 불리는 이 무서운 독벌레들은 최소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충(母蟲)과 자충(子蟲).

신비하게도 이 한 쌍은 서로에 대한 감각이 연결되어 있어,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서로를 느끼고 인지할 수 있다.

이 중 주권을 가진 것은 모충 측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충의 소유주 측이 자충을 삼킨 이에 대한 주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충은 자충에 연연하지 않지만, 자충은 모충을 평생 따른다. 이러한 관계를 가진 한 쌍의 고독 사이에서 자충 측은 특히 모충에 관련된 것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을 뽑자면 역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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