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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78화 (78/373)

학사재생 78화

한낱 벌레지만 그들 역시 죽음을 알고 느낀다.

모충을 마치 신처럼 모시는 자충의 경우에는 상대의 죽음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충격은 곧 방황이 되고, 방황은 공포, 분노, 충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루어지는 일은 결국 자충의 자살(自殺)이다.

문제는 자살의 과정에서 자충이 엄청난 독을 내뿜는 다는 데에 있었다. 남만(南蠻)에 산다는 거대한 대상(大象)조차도 엄청난 고통을 겪다 죽게 되는 이 독이 자충 본인뿐만이 아니라 사람 하나쯤 같이 데려가는 것이 무에 어렵겠는가?

결국 만에 하나라도 자충을 삼킨 사람이 있다면, 한 쌍인 모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상황에서, 상대에게 고독을 먹이는 이들이 상대에게 모충을 함께 건네어 줄 리는 만무하다.

자충과 달리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나, 마땅한 독조차 없는 모충 따위 제자리에서 발로만 밟아도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충을 삼킨 자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셈이다.

때문에 결국 자충을 삼킨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모충을 가진 이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여 만든 지독한 독물.

그것이 바로 고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고독을 보았다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알려진 것은 천하에서 가장 독을 잘 다룬다는 사천 당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정의회 측에서 비인도적인 처사라 하여 공식적으로 바깥 세상에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가 내에서도 기껏해야 십여 마리 내외가 전부라고 하였으니 실제로 바깥에 나왔다고 하여도 보기 드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그런 고독이 눈앞, 작은 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세상 무엇보다도 흉측하게 보이는 그 벌레의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의 표정이 감출 수 없게 일그러졌다.

“먹기 싫은 측은 먹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건 알아 둬. 나에게는 둘 중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해. 만약 둘 다 없다고 한들, 새로운 대리인을 구하면 그만이고 말이야. 지금 너희가 앉은 보잘것없는 두 자리라고 해도, 탐내는 사람이 제법 많잖아?”

황준우의 말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하나 그를 부정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었다.

비록 노예와 같은 입장이라고 한들, 거대한 남궁세가의 정점이다. 이 자리를 원하고 노리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실제로 남궁호량과 남궁호욱, 두 사람 역시 황준우가 곧 간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들뜨고 권력을 이용한 유희를 즐길 생각을 곧장 떠올렸었다.

물론 쉽지는 않을 터다.

남궁호량이 제멋대로 하려면 남궁호욱이, 반대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견제에 나설 테니 말이다.

그래도 상대 좋은 일만 시켜 줄 수는 없다.

같은 생각을 한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측은 남궁호량이었다.

“이걸 삼키면 됩니까?”

“간단하지?”

황준우의 말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인 남궁호량이 병의 뚜껑을 열어 자신의 속에 털어 넣는다.

너무 작아 잘 눈에 뜨이지도 않는 검은 자충이 그의 목울대를 넘어가 속으로 삼켜지는 소리가 유달리 남궁호욱의 귀에 크게 들렸다.

“그쪽은?”

뒤이어진 황준우의 목소리는 마치 협박과 같았다.

먹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먹겠습니다.”

굳은 눈을 한 남궁호욱 역시 곧장 남궁호량을 따라 나섰다.

두 마리의 자충이 남궁세가의 두 기둥이라는 이들의 몸속으로 사라진 모습을 지켜보던 황준우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적어도 그 정도 결의는 있어야 내가 믿고 맡기지. 잊지 마. 지금 너희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 공포를. 그만 나가 봐.”

남궁호욱과 남궁호량이 돌아간 방 안.

황준우의 뒤편에 서 아무 말 없던 사마정이 저도 모르게 짧은 감탄을 토했다.

“어느새 처사도 익히셨군요.”

“무신께서 하나가 아닌 둘을 놓아둔 것은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시키기 위함. 다른 척하지만 닮은 두 사람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쉽게 배신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맞아. 비슷한 생각으로 한 일이야. 눈에 훤히 보였나?”

“비슷한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요.”

“하긴 사마정, 너라면 그랬겠군. 그나저나 예전보다 말이 많아졌네.”

“…….”

황준우의 마지막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힌 사마정이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짧은 웃음을 그린 황준우가 손을 내젓는다.

“아니, 괜찮아. 딱히 타박하려던 건 아니니까.”

반가운 마음에, 어린아이와 같아 보이지만 어딘지 또 성장한 것 같은 모습에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사마정은 끝내 그 속내를 감춘 채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하나 더. 두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 역시 의도했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고독을 준비해 오라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고독도 중요하지. 하지만 사마정, 네가 더 중요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눈치 하나는 천하에서 손꼽던 편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황준우의 질문에 검붉은 눈을 굴리던 사마정의 안광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기둥이 세워졌군요.”

“그래. 지금 네가 계속 하던 일. 본래 기반은 사마정 네가 가지고 있어서 여기까지는 무탈하게 흘러왔지. 하지만 더 판을 벌리려면 기둥, 그리고 모습을 감춘 벽도 필요하겠지. 합비, 남궁세가면 나쁘지 않지?”

“훌륭합니다.”

예전의 황준우였다면 하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일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 사마정은 연신 감탄을 내뱉고 싶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경마저 차올랐다.

“고독, 그리고 서로를 향한 견제. 거기에 대한 네 시선. 그리고 나에 대한 공포. 배웠거든. 저런 유의 인간들은 다소 과격하고 무섭게 묶어 둬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지.”

“…….”

“아, 참고로 흑백쌍노에게는 너를 감시하라고 시킬 거야. 여전히 난 널 믿지 않으니까.”

“그리하시지요.”

사마정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황준우가 그것이 편하다면, 그를 따를 뿐이다.

“좋아. 그럼 이걸로 정리 끝. 아, 아니지. 마지막으로 이거.”

황준우가 식탁 위로 두 권의 책자를 던져 올린다.

“이건……?”

“흑백쌍노에게 줘. 선물이라고 하고. 일 년 정도 익히면 십 년쯤 젊어 보일 거라고 하고.”

“그런 무공도 있습니까?”

“내가 만든 거야.”

“…….”

“혹시나 해서 말인데, 오해하지 마. 정말 조금쯤 외모가 어려지게 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야. 원하면 사마정 너도 익히든지.”

“전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해. 잘 전해 주기나 하면 되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자, 그럼 진짜 난 이만 간다.”

“바로 가십니까?”

“이미 생각보다 오래 있었어.”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황준우가 손을 내저으며 성큼성큼 방 바깥으로 향했다. 남궁세가의 입구에는 경호와 홍산이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마정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게 된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다시 양지, 밝은 곳으로 가시는구나.’

그래, 그게 황준우에게 어울린다.

자신 같은 어둠과는 다르다.

사마정이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아 참……,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문득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던 걸음을 멈춘 황준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마정을 향해 말을 건넨다.

“그 무공. 명령이니까 너도 익혀. 예전에 비해 주름이 엄청 늘어서인지 적응이 안 된다.”

“내가 보기 싫다고. 그러니까 익혀. 뭐, 열심히 익히면 어려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수명이 조금 늘어날 수도 있을 테고. 그래야 곁에서 오래 부려 먹지. 이제 막 시작했는데, 갑자기 네가 노환으로 급사하면 나도 난감하다고.”

“……알겠습니다.”

“진짜 간다.”

드르륵- 탁!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방문을 빠르게 열고 닫은 황준우의 기척이 멀어진다.

눈을 감고 그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던 사마정의 입가로는 흐릿하지만 미소가 떠올랐다.

“곁에서 오래라…….”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자연스레 황준우가 남긴 무공서를 향해 손을 내뻗는 순간에는 어째서인지 어둠 속에서 자란 그의 가슴 한편에도 햇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남궁세가의 정문으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진짜 말이 모는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탄 경호가 묻는다.

“끝났지. 그런데 꼭 그런 데서 물어야 되는 거야?”

“뭐랄까, 왠지 이렇게 안 하면 도련님이 먼저 이 자리에 계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랄까요?”

“동감합니다. 더 이상 주공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지요.”

어느덧 경호의 바로 옆에 앉아 언제든 교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홍산이 크게 고개를 주억인다.

“남궁세가에 있는 사이 둘이 더 친해졌나. 아주 궁합이 착 맞네, 착 맞아. 이참에 둘이 결혼해라. 홍산이 아직 총각인 우리 경호 좀 구제해 줘.”

“도련님은 농담부터가 어딘가 잘못되어 있어요.”

“은공께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으나 역시 그건 좀…….”

“홍 공자가 그리 말씀 안 하셔도 저도 거부할 겁니다.”

서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그늘 져 있던 표정에 밝은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 나도 더 이상 번거로운 일 안 할 생각이니까. 답지 않게 분위기 좀 잡느라 나도 피곤하다고.”

“남궁세가와 완만한 합의를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의 경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준우를 바라본다.

마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잠시 가는눈으로 그런 경호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입가가 실룩 올라갔다.

“완만한 합의를 보기 위해서는 때론 위험한 도박도 해야 되는 법이잖아?”

“저 지금 왠지 엄청 위험한 발언을 들은 것 같은데요. 정말 완만하게 합의 보신 것 맞습니까?”

“말했잖아. 우리 경호 다친 만큼은 받아 내야겠다고. 딱 그만큼만 내놓으라고 했어.”

“도련님 성격이면 가문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했을까 봐 그럽니다.”

“은근히 귀신같은 면이 있었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마차에 올라탔다.

어찌 됐든 이제 남궁세가에서 볼일은 끝났다.

경호 말마따나 가문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 준비하던 세력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담장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다. 사마정의 능력이라면 한동안은 신경 쓰지 않아도 그 기반으로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마음에 쌓여 있던 짐을 털어 내고 가벼운 기분으로 마차 위로 누운 황준우에게 경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면 바로 집으로 갑니다?”

“당연하지. 가자, 집으로.”

향시로부터 시작된 긴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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