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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80화 (80/373)

학사재생 80화

“스승님께서는 제가 알고 있는 무인 중 정의가 살아 계신 진짜 협객이셨습니다. 좋은 분을 모시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스승님께서도 소주대인의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들으셨다면 크게 기뻐하고 계시겠군요.”

“하늘…… 이런…….”

홍산의 자연스러운 말에, 한때 은인이었던 이가 더 이상 지상에 없음을 알게 된 황석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저 때가 되어 떠날 뿐이니 큰 심려는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도 가시는 길 행복했다고 하셨으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행복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셨으니까요.”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번진다.

그 모습을 가는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의 입에서는 짧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인연이 흐르고 흘러 이렇게 도착하니, 진짜 운명이란 게 있긴 한가 보네. 아니지, 애초부터 그 협객 분 덕분에 나랑 홍산이 만나게 된 건가? 또 그리 치면 아버지 덕이네요?”

“선대에 복을 잘 쌓아야 후대에까지 미친다는 말이 괜히 있겠느냐.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네가 좋아할 만한 인물이다. 모신 분도 훌륭하였으니 아마 배움에도 부족함이 없으시겠지. 그야말로 복이로다. 복.”

“말했듯이, 아버지 아들이 잘난 덕입니다.”

“녀석, 그 잘난 체만 조금 줄이면 얼마나 좋을까.”

“에이, 아버지. 잘난 체가 아니라 그냥 잘난 거라니까요.”

“장주님, 제가 도련님 저 소리 탓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한 번 야단을 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와, 경호 너…….”

“야단친다고 들을 나입니까. 경 무사께서 조금 힘들어도 애써 주시지요.”

“아버지까지…….”

“하하하! 너도 이 아버지를 놀리는 걸 즐기곤 하지 않느냐. 한번 당해 보니 기분이 묘하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황준우를 보며 또 한 번 큰 웃음을 터트린 황석후가 되묻는다.

결국 혀를 차며 웃음을 터트리는 황준우였다.

서로를 향한 인사와 짧은 잡담이 끝나고 집무실에는 황준우와 황석후, 둘만 남았다.

나가려는 황준우를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황석후가 붙잡은 탓이었다.

“우선…… 남궁세가 이야기를 들었다.”

“왠지 그 이야기 하실 것 같았어요.”

작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인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더구나. 큰일이야 있겠나 싶다가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어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건강히 돌아왔잖아요?”

“그래서 다행이지. 그런 의미로, 이참에 묻자꾸나. 얼마나 턴 게냐?”

“아버지답지 않은 저렴한 표현이네요.”

“강탈이라고 해 줄까?”

“아니요. 그냥 털었다고 해요. 뭐, 일단…… 아버지가 아시는 정도요?”

황준우의 농담 섞인 말에 가는눈을 뜬 황석후가 어깨를 으쓱인다.

“나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란다. 앉은자리에서 천하 전체를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으면 만금장주가 아니라 신을 해 먹었겠지.”

“그거 불가나 도가 측사람 입장에서 들으면 굉장히 위험한 이야기겠네요.”

“예끼, 이놈. 장난치지 말고 어서 말해 보거라. 한 삼십 만?”

황금으로 삼십 만.

일반적인 양민은 물론, 제법 재물이 있다는 사람도 눈이 돌아갈 액수다. 남궁세가라고 해도 쉽지 않았을 일. 하지만 황준우라면 충분히 그쯤 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그 정도로 되겠어요? 저한테 암살 시도를 하고, 경호도 죽을 뻔했는데?”

“고작 그 정도라……. 이야기를 듣자 하니 남궁세가를 날로 삼키기라도 한 것 같구나.”

경호 때와는 다르다.

농담인 듯 말하지만, 진중한 황석후의 눈은 엄연히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황준우 역시 더 이상 농담을 하기보다는 진지한 자세로 답변을 하였다.

“예. 통째로 삼켰습니다.”

“진짜로?”

진지하고, 무겁던 황석후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놀란 표정에서는 큰 진심이 느껴졌다.

“와, 아버지. 방금 전까지 너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변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해낼 줄을 몰랐지. 남궁세가의 자존심이 보통인 줄 아느냐? 저들과 같은 성도 아닌 다른 성씨를 쓰며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게 쉬웠으면, 이미 다른 누군가가 몇 번을 그리했겠지. 단순히 힘과 돈 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잖아요.”

“남궁호량과 남궁호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구나.”

“어렵지는 않았어요. 뒤가 구린 양반들일수록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어딜 가나 똑같더라고요.”

“허허허!”

황준우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인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허 참. 아마 아직 검제께서 살아 계셨을 텐데…….”

질문을 하는 황석후의 눈이 황준우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린 시절부터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던 괴상한 아들이,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

특히 무(武)에 관해서라면 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황석후 본인은 물론 만금장 최강의 무인이라는 대표두 여선위마저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는 검제다.

과거에는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손가락에 꼽혀, 우내십존이라 불렸었던 위대한 무인.

괜히 제(帝)가 아닌 것이다.

“싸웠느냐?”

“짐작을 할 수가 없구나. 그분께서는…….”

“죽였어요.”

냉정하고 차갑다.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아들에게 듣기에는 무거운 말.

이때가 되니 그 이름 높던 검제가 죽었다는 말보다, 아들이 죽였다는 이야기가 더 신경 쓰인다.

그래서인지 황석후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늘이 졌다.

“네가 노력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

복잡한 천하를 살아가면서, 무공을 익힌 이에게 있어 언젠가는 꼭 찾아오게 될 사건이다. 만금장같이 거대한 상가를 운영하다 보면 표행에서 마주친 도적떼와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알면서도 무겁다.

황준우의 나이가 아직은 어리다는 사실 탓일 터였다.

“처음은 아니었어요. 이미 작년에 공주마마 보표로 나섰을 때부터 시작됐으니까요. 너무 마음 두지 마세요.”

“그렇게 일찍…….”

마음이 쓰다.

그런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황석후를 본 황준우가 시원한 미소를 보였다.

“말씀드렸잖아요. 잘난 아들이라고, 크게 상처 받지 않았어요.”

아주 먼 과거에, 전생에서의 첫 살인 때에도 그랬다. 놀랍고, 손이 떨렸지만 크게 상처 받지는 않았다. 이미 당시부터 알았던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통해서라도 살아남아야 되는 것. 그런 시대잖아요.”

“그래, 그런 시대지.”

인간의 문명이 더 발달하고,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큰 울타리가 단단해진다 한들 피를 통한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해야 된다면, 해내는 것이 옳다.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로 제 마음을 풀어내는 장성한 아들의 얼굴을 보는 황석후의 입가로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 쓸데없는 걱정이 네 어깨를 무겁게 할 수도 있겠지. 다만 의미 없는 피를 뿌리지는 말거라. 결국 피는 원한이 되고, 원한은 언젠가 돌아오는 법이니 말이다.”

“마음 깊숙이 새겨 두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알고는 있다.

아주 어쩌면, 가끔씩, 아니 솔직히 말해 자주 의미 없는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 일이란 것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되도록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대가 그러하기에 검을 쓰고 피를 흘리지만, 그 모든 순간이 무의미하지 않게 노력한다. 누군가에게는 콧방귀나 뀌게 할 그 작은 생각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죽이는 데 익숙해져 가는 와중에도 하나의 중심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협(俠)이란다.”

“아버지는 이제 제가 학사가 아니라 협객이 되길 원하시는 걸까요?”

“아무렴, 마두(魔頭) 소리 듣는 것보다야 좋지 않겠느냐?”

“하하…….”

“그나저나 남궁세가의 숨겨진 주인이 내 아들이라……. 스스로 커나가는 법을 익혀 보라고 했더니 그사이 아버지를 뛰어넘으려 하는구나.”

“에이, 농담도. 애초부터 남궁세가 정도야, 큰 문제가 아니었잖아요?”

세간에서는 남궁세가를 남기의 왕이라 부른다.

만금장이 상계의 큰손이자, 소주의 대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딱 그 정도의 한계로만 바라본다. 그러한 세간의 시선은 엄연히 말하자면 남궁세가와 만금장의 합작(合作)이었다.

남궁세가는 스스로가 제일이기를 바랐으며, 만금장은 가진 바를 축소시키고자 했다. 결국 시선이란 것은 두 가문의 이해가 맞아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했다.

서왕 사마정이 말했듯 현재 만금장은 천하제일의 장원.

애초부터 만금장이 마음먹고 남기에 군림하고자 했다면 남궁세가 따위는 상대가 아니었을 터라는 것이 황준우의 생각이었다.

“머리가 많이 굵어지기는 했구나.”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잔소리 하는 김에 하나만 더 하자꾸나. 가진 것을 모두 내보일 필요는 없다. 강호에는 이런 격언도 있다더구나, 늘 전력(全力)의 삼 할을 숨겨라.”

“깊이 동감하고 있어요. 그래서 남궁세가도 되도록 제 것이라고 티 안 내려고요. 알려져서 좋지도 않을 일이고요.”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서 궁금한 건데, 이제 조금쯤은 알려 줘도 되지 않아요? 세간에 알려진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가짜 말고, 진짜 진실이요.”

“음…….”

“삼 할을 숨긴 거예요? 삼 할만 보여 준 거예요?”

황준우의 눈이 의심 가득한 빛으로 가늘어진다.

잠시, 즐거운 시선으로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황석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후자.”

“…….”

“왜 그렇게 놀라느냐? 이미 모든 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행동했으면서.”

“대충 지금 보이는 것에 두 배는 조금 넘지 않을까 했는데, 후자라고 하심은 세 배도 넘는다는 거 아니에요? 와, 나 진짜 부담되네. 아버지 미리 말씀드리는데 가문은 제가 아닌 서연이한테. 아니, 잠시만 삼 할도…….”

“그만, 그만. 잡소리는 이쯤하고 두 번째 본론으로 넘어가자꾸나.”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목덜미 잡고 넘어갔을 이야기를 고작 잡소리로 취급한 황석후는 곧장 다음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네가 건네주었던 칠야무신의 무공서들 말이다.”

“아, 네.”

양팔을 벌리며 과장되게 놀란 모습을 하던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난다.

만금장의 그 엄청난 금력과 숨겨진 힘도 결국 아직은 황준우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실상을 따져 보면 잡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공서에 관련된 이야기는 달랐다. 직접적으로 그의 황금이 연관된 이야기. 이미 돈은 많다지만 풍족하지는 않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생각하는 황준우의 귀가 쫑긋해질 법한 소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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