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88화
말릴 새도 없이 이어지는 구타에, 잠시 넋이 나간 듯 바라보기만 하던 중년 무인이 재빨리 손을 내뻗어 그런 황서연의 어깨를 잡았다.
“소, 소저! 멈추시오!”
“말리지 마요,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은 돈을 벌 자격도 없다고 하셨어요. 아주, 죽어! 죽어 버려야 돼!”
“소, 소저……!”
퍼버벅-!
“아아악! 말려, 어서 말…… 끄아악!”
중년 무인이 어깨를 더욱 힘차게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황서연의 주먹이 그야말로 장대비처럼 상주의 몸 위로 쏟아진다.
“안 말리십니까?”
그 모습을 조금은 놀란 시선으로, 또 한편으로는 걱정 된 기색으로 바라보던 경호가 물었다.
“저걸 말리라고?”
황준우가 다시금 경호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말리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즉에 뜯어 말렸다.
한데 왜 아직까지 지켜보고 있겠는가?
아마 지금 이 순간, 홍산을 비롯한 세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이 분명할 터였다.
“그냥 더 하게 내버려 두죠.”
결심을 굳힌 경호의 말에 이죽이는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잘됐지, 뭐.”
“나쁜 놈! 나쁜 놈은 혼나야 돼! 아주 많이 혼나야 된다고!”
“끄아악-!”
황준우의 태연한 목소리와 황서연의 흥분한 음색,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이 마치 하나 된 합창(合唱)처럼 동시에 어우러져 객점 내에 떠돌았다.
“제발 그마아악-!”
물론 주연은 비명을 지르는 상주 측이었다.
너무 맞아서 의식까지 잃어버린 상주의 위에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은 황서연이 제 주먹을 들어 올린 후 상쾌한 미소를 흘렸다.
“아, 속 시원해. 세상에는 정말 때리고 싶은 녀석들이 많단 말이야.”
너무나도 태연한 그녀의 목소리에 넋을 잃고 있던 상인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네, 네 이년! 지금 네년이 뭔 짓을 한 줄 아는 게냐? 우리는 대 전화상단의…….”
“네 이년?”
눈을 매섭게 뜬 황서연이 앞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어억-!”
그에 따라 뒷걸음질 치다 제자리에 엎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상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하하! 겁도 많으면서 어떻게 일어났담. 그냥 거기서 조용히 박혀 있어요, 아저씨.”
크게 웃으며 넘어진 상인을 무시한 황서연의 시선이 이번에는 난감한 기색의 중년 무인을 향했다.
“솔직히 말해서, 속 시원하죠?”
“……미안하오, 소저.”
그녀 말대로 편안하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중년 무인은 전화상단에 고용된 입장이었고, 쓰러진 상주는 어찌 되었든 이번 표행에 있어 그의 상관이었다.
검을 뽑아 든 중년 무인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어렸다.
“내 이름은 유지량. 전화표국의 표두요.”
“자자, 여기서 그만. 우리 대화로 합시다, 대화.”
얼굴을 힘겹게 굳히며 내력을 일으키는 그의 앞으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보인 이는 황준우였다.
“네놈은 또 뭐냐!? 예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끼어들어!”
주저앉았던 상인이 다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황준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진짜! 우리 오빠한테!”
“꾸에엑-!”
동시에 황서연이 몸을 날려 일전과 마찬가지로 상인의 턱에 힘차게 발을 박아 넣었다.
마치 짐승과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엎어진 사내의 눈에 황서연의 주먹이 다시 춤을 추려는 순간이었다.
“자, 잘못했소! 으허엉!”
울음을 터트린 상인의 바짓가랑이 사이가 촉촉이 젖은 것을 확인한 황서연의 주먹이 멈추었다.
“더, 더러워…….”
아직 어린 소녀의 감성(?)을 가진 탓인지 차마 그런 상인을 때리지 못한 황서연이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황준우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장하다. 진짜 장해, 내 동생!”
“그렇지? 후하하!”
영문은 잘 모르지만, 일단 황준우의 칭찬이기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인 황서연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큰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께서 저기 계신 소저의 오라비 되시오?”
“그렇지.”
중년 무인, 유지량의 두 눈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보아하니 내 보잘것없는 솜씨로는 두 분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소. 하지만 들었다시피 우리는 전화상단의 일원들이오. 앞으로 여정 길을 주의해야 되실 게요.”
언뜻 듣자면 위협 혹은 권고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유지량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진심 담긴 걱정이었다. 괜히 자신 탓에 두 사람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 낀 기분이 든 탓이다.
“전화상단 상단주가 보는 눈이 없네. 이런 귀한 인물을 앞에 두고 저런 머저리한테 상주를 맡긴 거야?”
그런 유지량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유지량이라고 했던가? 당신하고 뒤에 조청?”
“……?”
유지량의 뒤에서 마찬가지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젊은 무인, 조청이 황준우를 바라본다.
“가족이 있나?”
“있소.”
“없소이다.”
유지량과 조청의 입에서 서로 상반된 의견이 흘러나왔다.
“그렇구먼. 뭐, 큰 문제는 아니지. 내가 제안 하나 할게. 두 사람 다 이참에 일자리 옮겨 보는 것 어때?”
“……전화상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황준우가 내민 손을,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유지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책임져야 할 것이 있는 가장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상대가 황준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걸? 왜냐면 내가 만금장 소장주거든.”
“……?”
황준우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유지량의 두 눈에 의문이 깃든다.
“저기 있는 소저가 내 여동생. 그러니까 내가 안 한다 그러면 만금장은 쟤가 물려받겠지? 아마 이거 거의 확실한 일일 거야.”
“만금장?”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의 등장에 조용히 앉아 눈치를 보던 상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먼저 일었다.
천하제일상가.
만금장이 가진 그 위용은 같은 상인 집단으로서는 일종의 전설과 같았다. 그런 만금장 소장주가 눈앞에 있다.
“진짜 만금장 소장주입니까?”
침을 꿀꺽 삼킨 유지량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준우를 향해 되물었다. 누구든 그럴 터였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소녀 협객과 젊은 청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상주를 짓밟더니 자신들이 만금장의 가솔들이란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소장주라고 한다.
“아, 그냥은 믿기 어렵나. 경호!”
“예, 도련님.”
황준우의 부름에, 뒤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던 경호가 앞으로 나서 품에서 만금장을 상징하는 팔마패(八馬牌)를 꺼내 보였다.
“여덟 마리의 황금 말!”
“진짜 만금장이란 말인가!”
무인들과 상인.
양측 모두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의 객점에서 만금장 소장주와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희박할지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운명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이었다.
“이쯤이면 전화상단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증명된 것 같고. 어때, 아직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
황준우의 물음에 유지량의 두 눈에 큰 파동이 일었다.
당장에라도 내미는 그 손을 잡고 싶은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다.
“표두님, 이건 기회입니다.”
뒤에 있던 조청이 망설임 없이 나와 황준우의 앞에 섰다.
“표사 조청, 받아만 주신다면 온 힘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 나한테 그럴 필요 없고. 두 사람 다 어차피 만금표국에 취직할 텐데 아버지나 잘 도와주면 되지 뭐. 그럼 이쪽은 된 것 같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활짝 핀 얼굴의 조청이 주먹을 꽉 쥐며 외친다.
내심 그 역시 전화상단 특유의 표국 무인들을 무시하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던 탓이다.
그래도 이미 머문 곳이고,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터라 쉽게 떠날 수 없던 차에 황준우의 손길은 큰 기회였다.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조청이 나선 순간, 더욱 마음이 크게 흔들린 유지량이 황준우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무리 만금장이라지만, 전화표국 역시 천하십대상단 중 한 곳. 이렇게 반 억지로 물건을 운송하던 중 표두와 표사를 빼앗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터다. 만금장의 위세를 탐내는 천하십대상단들은 어떻게든 그 명성에 흠을 만들고자 하니 말이다.
“괜찮아. 커다란 담에 조약돌 하나가 날아와서 부딪친다고 해서 흔적이라도 남을 것 같아?”
황준우는 코웃음 치며 가볍게 답했다.
전화상단.
천하십대상단 중 수위를 다툰다는 그 이름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하는 그 모습에 유지량의 흔들리던 마음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두 가지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해 봐.”
“제 가족들을 안전하게 소주까지 데려다주십시오.”
황준우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우선은 황석후에게 말해서 쉽게 해결하는 법이 있다.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릴 필요 없지.’
황준우 스스로 벌인 일이다. 그쯤은 혼자 해낼 수 있었다.
‘남궁세가 놈들 조금 부려먹지 뭐.’
결정이 쉽게 내려졌다.
“좋아. 두 번째는?”
“이 녀석들도 함께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침을 꿀꺽 삼킨 유지량이 일생일대의 각오를 한 표정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편,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표사 열댓 명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두님!”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가십시오!”
“이런 기회는 다시없습니다, 표두님!”
“아이, 시끄러!”
표사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잠시 어이없게 바라보던 황준우가 일갈을 내질렀다.
제법 많은 내력이 섞여 있었던 터라 깜짝 놀란 표사들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어려울 것 없지. 다들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만 한다고 하면 모두 받아 줄 수 있어.”
“……!!”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외친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제 완전히 눈앞에 놓인 것이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따르겠습니다!”
“우리도 만금장으로 가겠습니다!”
표두와 표사가 한마음이 돼서 외치자 당황한 것은 숨죽이고 있던 상인들이었다.
“아니, 소장주! 우리 쪽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갑작스럽게 표사들을 다 빼 가면 이번 상행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유 표두의 말대로 우리 전화상단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 경을 치르실 텐데 지금이라도 후회할 일 하지 말고 무르시지요!”
그중 마른 체형의 가는눈을 한 사내가 재빨리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나름대로 기세를 담아 외쳤으나,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콧방귀만 뀔 일.
“그건 그쪽 사정이고. 해 보려면 마음대로 해 보시든지.”
아주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말했다.
전화상단은 물러갔다.
표두와 표사마저 모두 잃고, 상주는 의식마저 없어졌다. 게다가 상대는 만금장 소장주. 딱히 큰 권리가 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몇 없었다.
“두고 보시오! 꼭 후회하게 될 거요!”
기껏해야 목소리를 높이며 뒤끝을 남기는 일 정도가 전부인 것이다.
“꼭 아무것도 못할 놈들이 목소리만 살아서는,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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