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89화
떠나는 전화상단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어 준 황준우는 곧장 팔짱을 끼고는 의자 하나를 붙잡고 앉았다.
“……소장주님.”
그때까지 결심은 섰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 가득한 기색을 얼굴에 그리고 있던 유지량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 걱정 마. 별일 없으니까.”
“맞아. 우리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쪽 표두님은 아무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왜 네가 나서냐?”
“틀린 말 했어?”
이 아이가 무슨 사정이나 알고 하는 이야기일까, 싶으면서도 미소를 지어 버린 황준우는 끝내 황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맞는 말 잘 했다. 아까도 멋있었어.”
“우히히.”
양손을 모으고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황서연을 잠시 푸근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유지량을 향했다.
“어쨌든 정말 아무 일 없을 테니까 큰 걱정 마. 가족들도 무사히 소주까지 갈 수 있을 거야.”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황준우의 담담한 목소리에 유지량을 필두로 한 표사 몇몇이 붉어진 눈으로 몸을 떤다.
“워워, 울지 마. 칼 찬 사내놈들이 그런 표정 짓는 거 싫어한다고.”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소장주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렇게 생각하면 일해서 갚아. 표두고, 표사잖아. 열심히 일해서 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란 말이야. 알았지?”
황준우의 말에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일간에 퍼지기 시작한 만금장 소장주가 유능하다는 소문 탓만은 아니다. 실제로 전화상단이 만금장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이번 일 역시 별 탈 없이 무마될 것도 잘 안다.
다만 그렇게 하면 분명히 만금장에도 손해가 생긴다.
한데 황준우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감수해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오랜 시간 표사 생활을 하며 업계의 생리를 보았던 유지량 입장에서는 그런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묻어 버리는 황준우가 너무나도 고마웠고, 감격스러웠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유지량의 표정에는 다짐을 넘어선 무언가가 가득 차오른다.
결의 혹은 신념이라 부르는 감정이다.
“이거 참, 나란 놈 또 추종자 하나 만들어 버린 것 아닌가 모르겠네.”
피식 웃으며 손을 저은 황준우의 시선이 잠시 경호와 홍산을 훑었다.
“전 아닙니다, 도련님.”
“…….”
“누가 뭐래?”
격렬하게 부정하는 경호와,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홍산을 향해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다시 유지량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일단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인데. 사정이란 것을 들을 자격이 있지 않나 싶어.”
전화상단 내에서 표사들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것은 척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떻게 천하 곳곳에 물건을 나르는 상단 입장에서 그럴 수야 있겠냐 싶지만 시기가 어려울 때는 군권이 힘을 내다가도, 때가 평안해지면 문관(文官)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치다. 결국 상단 내에도 정치 싸움이란 것이 있고, 칼 차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무인들도 밥은 먹고살아야 한다.
유지량 등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 가족까지 있다면 그런 간절함은 더욱 강해진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상인들이 표사를 무작정 막 대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마냥 이와 같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아무리 전화상단주의 영향력과 입지가 좋아도 십대상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정황상 상주의 행위가 너무 심해 황서연이 무력을 행사하기까지 했지만 그 나름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짐작은 가지만 정확한 상황을 들을 필요도 있다.
끼어들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 이유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황준우였다.
“명백히 제 실수입니다.”
“그렇겠지.”
유지량의 낙담한 목소리에 황준우는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어찌 됐든 그는 표두다.
밑의 표사가 문제를 일으켰다 하여도, 유지량에게 책임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더 높은 직책과 많은 돈을 주고 쓰는 것 아닌가? 그 정도 책임감도 없는 인물이라면 끼어들었다 한들 거두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시다시피 우리, 아니지…… 전화상단은 찻잎을 주요 거래 품목으로 삼습니다. 이번 일도 합비까지 찻잎을 운반하는 일이었는데, 경정산 초입에서 표사 하나와 찻잎을 실은 마차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뭐?”
황준우의 얼굴에 잠시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욕심 많은 표사가 표물을 가지고 훔쳐 달아날 수는 있다. 의외도 아닐 정도로 표행 중에는 제법 자주 있는 일이다. 물론 대다수 곧장 잡히거나, 운 좋게 달아나도 결국 물건 판매에서 꼬리를 잡혀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한데 이번 일은 뭔가 다르다.
“혹시 마차에 포대가 몇 없었나?”
“……아닙니다.”
“그러면 그 표사가 뭐, 초절정 고수쯤 되려나?”
“…….”
황준우의 연속된 질문에 미간을 찌푸린 유지량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당황스러운 사태였고, 상주의 노발대발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이 연속으로 떠오른 탓이다.
찻잎이 가득 든 마차 하나.
고작 잎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마차에 들어 있는 큰 포대기마다 가득 담겨 있는 찻잎의 무게는 성인 장정이 두 포대를 짊어지는 정도가 한계다. 그런 찻잎을 가득 실었다. 당연히 마차를 끄는 말도 있었을 것이고, 마차 자체의 무게도 가볍지는 않다. 막말로 마차에 달린 큰 바퀴 하나를 드는 것도 일반적인 성인 장정에게는 일이다.
물론 무림인의 경우는 다르다.
육체를 단련한 데다 내공을 수련하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무거운 마차 하나를 통째로 들고 달아나려면 절정고수는 되어야 한다. 수많은 시선이 곁에 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면 초절정쯤 되어도 힘들지도 모른다.
“놈이 뭐, 밤에 혼자 훌쩍 사라진 거야?”
“아닙니다. 산을 오르는 중이었고……, 중간 휴식처에 도달했을 때쯤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짜 이상한데?”
듣고만 있던 황서연이 눈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행이라든지, 바깥 경험이 아무것도 없는 황서연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 사라진 표사랑 가장 가까이 있던 쪽은?”
황준우의 표행의 후미에 위치해 있던 표사들 몇몇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중에는 유지량을 향한 불합리한 상주의 행동에 앞으로 나서 목소리를 높였던 조청도 함께였다.
“거기 있던 너희들은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어?”
“아, 예. 분명 제가 봤을 때까지는 곁에 있었고 마차도…….”
말을 하는 조청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그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거기서 다시 이리 내려온 거야? 경정산을 오르던 중이었다며?”
“그건 상주가 놈이 달아났으면 아래쪽일 것이 분명하다고 쫓자고 해서…….”
일반적인 상식의 수준에서 보자면야, 상주의 생각도 잘못되지는 않았다.
그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표사 하나와 마차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부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차라리 마치…….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흘러나온 황서연의 말 그대로였다.
“진짜 유령이라도 나오나?”
우스갯소리로 황준우가 헛웃음을 지을 때였다.
“저기…….”
주변에서 눈치만 보며 서성거리던 객점의 어린 점소이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척 보아도 무언가를 아는 눈치로 보였다.
“혹시 아는 게 있느냐? 사례는 내 톡톡히 하겠다.”
황준우보다 유지량이 빨랐다.
그는 뒤늦게나마 사태의 이상함을 크게 깨달았고, 혼란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니, 그 표사분이나 마차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경정산에 유령에 대해서라면 짐작 가는 게 있습니다.”
“경정산 유령?”
척 보아도 이 자리에서 높아 보이는 황준우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러트린 점소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예. 유령이라기보다는 요괴랄까요. 그냥 인근에 떠도는 소문입니다만…….”
“말해 봐.”
본래의 황준우였다면 코웃음 치며 뒤로 넘길 이야기였다.
한데 문득 얼마 전 만총에게 들은 간장막야에 관련된 역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설상의 무기가 실존하고, 그 힘이 상상 이상이라고 하면 진짜 요괴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신빙성은 낮다.
하나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황준우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나리. 그냥 인면(人面)에 호익(虎翼)을 단, 사람도 요괴도 아닌 것이 돌아다니는 걸 봤다는 사람들이 몇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면에 호익?”
사람 얼굴에 호랑이 날개라.
그것만으로는 쉽게 무언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냥 상상을 한다고 하여도 진짜 고작해야 요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몸통은?”
“그게 그 부분은 잘…….”
“들었다는 걸 보니 목격하고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나 보지?”
“예예. 의외로 본 사람은 꽤 있습니다만. 이번처럼 사람이나 물건이 사라진 경우가 오히려 처음이지요.”
“흐음…….”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헛소리입니다.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뒤편에서 창을 끌어안고 있던 홍산이 그런 황준우를 향해 불쾌한 목소리를 흘린다. 한데 어째서인지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느낌이었다.
‘설마 홍산, 무서운 건가?’
담담한 얼굴에 고집 있는 입매.
그럴 리가 없겠다 싶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일단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네.”
그렇게 말한 황준우가 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점소이에게 던져 주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리!”
보통 이런 일에 끼어드는 점소이의 심리야 뻔하다.
돈을 받자마자 넙죽 엎드리며 인사를 한 점소이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멀어졌다.
“어쨌든 그쪽도 나름대로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나도 호기심이 생기는 일이니까 말이야. 한 번 자세히 알아보자고.”
“경정산에 다시 오릅니까?”
유지량의 질문에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굳이 뭐 벌써 그럴 필요 있나. 본 사람이 꽤 많다잖아. 정보부터 모으자고, 정보부터. 몸으로만 때우려고 하다 재수 없어서 피 보면 아무도 책임 안 져 준다고.”
“알겠습니다.”
그 무식한 짓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 봤기에 어렵지 않게 입을 연 황준우가 고개를 한 번 더 주억였다.
“자, 그럼 일단 다들 해산.”
고개를 주억인 유지량을 비롯한 새로이 만금표국의 표사가 된 이들 열한 명이 빠르게 객점을 벗어났다.
늦은 저녁이 되어 갈 때쯤,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이 다시 객점으로 돌아왔다. 황준우 역시 나름대로 몸을 움직여 정보를 수집했고 그 결과 돌아온 표사들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요괴란 놈, 진짜 있나 본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황준우의 말에 얼굴을 굳힌 유지량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인다.
“그럴 리가…….”
뒤편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홍산의 목소리가 떨린다.
“와, 세상에 그런 게 있긴 했구나. 오빠, 우리 요괴 보러 갈 거야?”
반면 황서연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흥분이 가득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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